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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살림말

 

중앙일보 김규항 : 어린이 인문만화잡지 《고래가 그랬어》를 펴내는 김규항 님이 〈중앙일보〉에 글을 쓴 지 여러 달 된다. 이분이 ‘왜 중앙일보에 글을?’이라는 궁금한 대목에 시원스레 글을 남겼는지는 잘 모르겠다. 얼추 스무 해쯤에 걸쳐 이분 글을 모조리 읽기는 했으나, ‘왜?’를 풀지 못했고, 이제 이분 글은 읽지 않는다. 지난해에 《혁명노트》란 책을 사서 읽으면서도 생각했다. ‘혁명을 말하는 분이 혁명을 할 가장 나즈막한 사람들 말씨가 아닌 가장 웃자리에 있는 이(기득권·권력가·자본가·작가) 말씨로 책을 새로 썼구나 하고.

 

나는 《고래가 그랬어》를 처음에 정기구독으로 보았지만, 끊은 지 오래된다. 만화나 글이 ‘삶을 숲으로 짓는 놀이로 나아갈 어린이’하고 도무지 안 맞는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외치는 목소리로는 ‘진보 좌파’일는지 모르나, 진보나 보수 가운데 누가 옳다고 느끼지 않는다. 좌파나 우파 가운데 누가 옳을 수도 없다. 옳다면 ‘옳게’ 사는 사람이 옳지 않을까? 바르다면 ‘바르게’ 사는 사람이 바르지 않을까? 왼쪽을 찍기에 바를 수 없고, 오른쪽을 찍기에 틀릴 수 없다. 생각도 넋도 말도 삶도 사랑도 바르거나 옳다면 그이가 바르거나 옳을 뿐이다.

 

열한 살에 접어든 작은아이가 엊저녁에 “어머니, 아침에 일어나면 있잖아, 우리 집 후박나무로 해가 막 비추려고 할 때, 그때 해를 봐. 그 아침에 솟는 해를 보면 좋아.” 하고 이야기하더라. 《고래가 그랬어》가 ‘나쁜’ 잡지라고 생각한 적은 없다. 다만 ‘알맹이는 없다’고 생각한다. ‘알맹이’란 뭔가? ‘알맹이 = 씨알’이다. ‘씨알 = 열매에 깃든 숨결’이다. ‘열매에 깃든 숨결 = 숲을 이루려는 사랑’이다. 《고래가 그랬어》는 ‘제도권학교를 다니며 입시지옥에 멍이 들려는 어린이를 달래려는 글이나 만화’는 있지만, 정작 ‘어린이 스스로 삶을 지어 푸르게 노래하는 꿈을 품고서 사랑으로 나아가는 길’은 아직 없다고 느낀다.

 

김규항 님이 〈중앙일보〉에 꾸준히 글을 실을 수 있는 바탕도 이러하지 않을까? 뭐, 한두 꼭지쯤은 쓸 수 있을는지 모른다. 아니, 〈중앙일보〉만이 아니라 ㅈㅈㄷ에 글을 써도 좋다.

 

다만, 글을 쓰려면, 적어도 톨스토이나 시튼이나 로라 잉걸스 와일더나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이나 이와사키 치히로나 윌리엄 스타이그나 엘사 베스코브나 완다 가그처럼 글을 쓸 노릇 아닐까? 이런 분들처럼 글을 쓰지 않겠다면, 한낱 돈과 이름을 팔려고 〈중앙일보〉에 글을 쓰는구나 하고 느낄밖에. 202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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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적어 놓고서 한 달을 보냈는데, 그사이(2021.2.26.)에 〈신동아〉하고 만나 90분 동안 이야기했다고 한다. 김규항 님은 ‘마르크스 + 페미니즘 + 생태주의’를 좋아한다고 밝힌다. 그렇구나. 스스로 좋아하는 길이 있으니 그 길에 맞추어 걸어갈 뿐이로구나. 그러면 그 길은 어디로 나아갈까? ‘마르크스·페미니즘·생태주의’가 나쁘다고는 여기지 않으나, 이쪽하고 저쪽을 가르는 울타리나 담벼락이 되기에 좋을 뿐 아니라, 이러한 이름을 허울처럼 내세워서 장사하는 사람이 수두룩하다.

 

굳이 세 가지를 살피는 길을 헤아린다면, 나는 ‘숲·살림·사랑’ 이렇게 세 가지를 꼽는다. ‘마르크스·계급·인민’이란 이름으로 사람을 바라볼 수도 있을 텐데, 이제는 좀 ‘사람을 사람으로’ 바라보면 좋겠다. ‘페미니즘이 아닌 살림하는 사람을’ 마주하면 좋겠다. ‘생태주의가 아닌 오롯이 숲을 숲으로’ 품으면 좋겠다. 살림을 하지 않고 숲을 품지 않는 곳에는 아무런 사랑이 없으니, ‘마르크스·계급·인민’한테서도 사랑을 찾아볼 수 없다고 느낀다. 아무튼, 잘 가시라, 그 길을. 202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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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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