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노래책/숲노래 시읽기 2022.10.21.
노래책시렁 238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이가림
창작과비평사
1981.5.30.
요새는 아이들이 말을 못 배우고 글을 배웁니다. 예부터 아이들은 말을 배우면서 마음을 가꾸는 길을 스스로 노래로 돌보고 무럭무럭 자랐어요. 오늘날 아이들은 말하고 동떨어지면서 글을 꾸미는 하루에 길들어요.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는 퍽 잘 꾸민 글입니다. 반드레레하게 손질해 놓은 글입니다. 이렇게 꾸미거나 손질한 글이기에 ‘시’라는 이름을 붙이는구나 싶습니다. 이처럼 꾸미거나 손질한 글은 나쁠 수 없습니다. 그저 ‘꾸민 글’이나 ‘손질한 글’에 그칠 뿐입니다만, ‘문학’으로 가르치거나 배우는 자리에서 들려주거나 외우더군요. 왜 배움판(학교·강의)에서는 ‘꾸민 글’이나 ‘손질한 글’만 들려주거나 외우거나 따라쓰도록 할까요? 왜 삶글이 아닌 꾸밈글을 베껴쓰기(필사)를 시키거나 할까요? 왜 살림글이 아닌 꾸밈글에만 ‘문학’이란 껍데기를 씌울까요? 모든 ‘글자랑(문학상·백일장)’은 덧없습니다. 누구나 날마다 삶을 이야기하면 넉넉할 뿐이요, 이 이야기를 옮기면 고스란히 글입니다. 자랑할 삶이 아니니, 자랑할 글이 아닙니다. 말(국어)과 노래(문학)는 셈겨룸(시험문제)으로 다룰 수 없고, 가르칠(강의) 수 없습니다. 스스로 삶을 가꾸는 사람은 스스로 삶을 노래합니다. 삶이 없으니 멋을 찾더군요.
ㅅㄴㄹ
나를 짓밟아다오 제발 / 수세식 변소에 팔려 온 이 비천한 몸 / 억울하게 모가지가 부러진 채 / 유리컵에나 꽂혀 썩어가는 외로움을 / 이 눈물겨운 목숨을, 누가 알랴. / 말라비틀어진 고향의 얼굴을 만나면 / 죽고 싶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 슬픈 전라도 계집의 죄, / 풀꽃들만 흐느끼는 낯익은 핏줄의 벌판은 / 이미 닳아진 자를 받아주지 않는다. (오랑캐꽃 1/26쪽)
가시내야, 가시내야 / 우리도 예전엔 / 한개 고운 피리였단다 / 가느랗게 心琴 울리는 피리였단다 (피리타령/4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