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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기로운 사람
[말사랑·글꽃·삶빛 23] 내 나름대로 사랑하는 말

 


  어린이 눈높이로 엮은 그림책 《흙 속에 누가 살아?》(웃는돌고래,2012)를 읽다가 11쪽에서 “산타가 건망증이 심한 거 알고 있지요?”와 같은 글월을 봅니다. 어린이책뿐 아니라 어른책에서도 쉽게 볼 만한 글월입니다. 어린이도 어른도 이 같은 글월을 두루 씁니다.


  책을 살며시 덮고 생각에 잠깁니다. 이러한 글월이 잘못이라고 따질 수 없습니다. 글 얼거리 가운데 몇 군데 손질하면 더없이 좋겠구나 싶으나, 글쓴이 스스로 이녁 글월을 사랑스레 손질하지 않는다면 이러한 글월은 앞으로도 곳곳에 수없이 쓰입니다.


  내 나름대로 헤아려서 이 글월을 다시 적어 봅니다. 나라면 이러한 글월을 어떻게 쓸까 하고 생각을 기울입니다. 먼저, 나는 “심(甚)한 거” 같은 글월을 안 씁니다. “심히 실망(失望)스럽다”느니 “심하게 아프다”느니 하고 둘레에서 말하지만, 나는 “몹시 서운하다”나 “매우 아프다”처럼 말합니다. 그런데 바로 앞에 ‘건망증(健忘症)’이라고 나오니, 이 자리에서는 ‘심하게’를 ‘몹시’나 ‘매우’로 고쳐쓰지 않습니다. 깜빡깜빡 잘 잊어버린다는 뜻으로 쓰는 ‘건망증’이니 ‘깜빡증(-症)’이라든지 ‘깜빡병(-病)’으로 적바림할 수 있고, 말뜻 그대로 “잘 잊는다”나 “곧잘 깜빡거린다”처럼 적바림해도 돼요. 아이나 어른이나 으레 쓰는 ‘까먹다’를 써도 되고요. 한국말 ‘까먹다’는 비속어가 아니에요. 널리 쉽게 쓰는 말이에요. 조금 더 얌전하게 쓴다면 ‘잊다’일 뿐이에요. 그러니까 보기글 앞쪽은 “깜빡증이 대단한 줄”로 손질하거나 “잘 잊어버리는 줄”이나 “곧잘 까먹는 줄”로 손질해 봅니다. 다음으로 “알고 있지요”는 서양말 현재진행형을 잘못 적은 꼴이면서 일본말 ‘中’을 어설피 옮긴 꼴이에요. “길을 가는 중이에요”나 “길을 가고 있어요”나 모두 잘못 쓰는 말투예요. “길을 가요”라고 적어야 올발라요.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와 “이야기를 나누는 가운데”도 잘못 쓰는 말투예요. ‘中’을 ‘-고 있는’이나 ‘가운데’로 옮긴다 해서 한국말이 될 수 없어요. 서양말은 서양말이고 일본말은 일본말이거든요. 서양말에서 흔히 나오는 관사 ‘a(an)’를 ‘한’으로 옮겨 “a book”을 “한 책”으로 적으면 몹시 어설퍼요. “한 세일즈맨의 죽음” 같은 번역은 번역이라 하기 어려운 번역이기도 해요. 그냥 “세일즈맨의 죽음”이라 옮기든지 “어느 세일즈맨의 죽음”이라 옮겨야 맞아요. 한국말에는 관사가 없으니, 한국말에 억지로 ‘관사 같은’ 말씨를 넣는 일은 여러모로 안 어울려요. 곧, 한국말에 없는 현재진행형 꼴을 함부로 쓰는 일도 한국말하고 어울릴 수 없어요. 이리하여, 나는 이 글월 한 줄을 “산타가 자주 깜빡거리는 줄 알지요?”라든지 “산타가 곧잘 잊어버리는 줄 알지요?”처럼 적을 수 있습니다.


  어떤 말을 하든 나는 내 나름대로 말을 합니다. 내가 오늘 이곳에 서기까지 스스로 익히고 살피며 가다듬은 대로 말을 합니다. 책에서 배운 대로 하는 말이 아닙니다. 어느 스승이나 어른이 들려주는 대로 하는 말이 아닙니다. 내가 가장 사랑할 만한 말을 스스로 생각해서 익힙니다. 내가 가장 즐길 만한 말을 스스로 살피면서 배웁니다.


  때로는 책을 읽으며 깨닫습니다. 때로는 이야기를 나누다가 깨닫습니다. 때로는 누군가 슬그머니 일깨워 줍니다. 그런데, 책을 읽든 이야기를 나누든 누가 일깨우든, 내가 알아채거나 느껴야 받아들여요. 나 스스로 내 말삶을 북돋우려는 마음일 때에 내 말밭을 일굴 수 있어요.


  내 손을 움직여 밥술을 뜹니다. 내 다리를 움직여 길을 걷습니다. 내 눈알을 굴려 이곳저곳 바라봅니다. 내 마음을 기울여 사랑을 나눕니다. 이와 같은 흐름하고 똑같이, 나는 내 넋을 가만히 헤아리면서 내가 나눌 말을 고릅니다. 내 얼을 곰곰이 돌아보면서 내가 쓸 글을 가눕니다.


  생각할 때에 말이 태어납니다. 생각할 때에 말이 꽃피울 수 있습니다. 슬기로운 생각은 어디 먼 데에 있지 않습니다. 바로 내 가슴속에 슬기로운 생각이 있습니다. 내가 깨우는 생각이고, 내가 가꾸는 생각이요, 내가 돌보는 생각이며, 내가 나누는 생각입니다.


  곱게 생각해 보셔요. 곱게 주고받을 말을 빚을 수 있어요. 사랑스레 생각해 보셔요. 사랑스레 주고받을 말을 길어올릴 수 있어요. 참다운 길을 살피며 생각해 보셔요. 참답게 주고받을 멋스러운 말을 낳을 수 있어요. (4345.10.4.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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