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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매무새’와 ‘언어현실’
[말사랑·글꽃·삶빛 40] 바르게 쓸 한국말이 없다

 


  국어사전을 틈틈이 새로 장만합니다. 내가 ‘한국말 사랑스레 살려서 쓰는 길’을 찾으며 살아가니까 국어사전을 새로 장만한달 수 있지만, 내가 꼭 이 일을 안 했더라도 국어사전을 틈틈이 새로 장만했으리라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나는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사람을 이웃으로 두며 한국말을 쓰는 사람으로 살아가거든요.


  학자이기에 국어사전을 들추지 않습니다. 교사나 작가이기에 국어사전을 읽지 않습니다. 한국말을 쓰는 여느 한국사람이기에 국어사전을 살핍니다.


  내가 우리 아이들을 아끼거나 사랑하는 까닭은 ‘내가 남달리 훌륭한 사람’이기 때문이 아니에요. 우리 아이들을 낳은 어버이로 살아가니 우리 아이들을 아끼거나 사랑합니다. 이웃 어버이도 나와 같아요. 이웃 어버이가 ‘남달리 훌륭한 사람’이라서 이녁이 이녁 아이들을 아끼거나 사랑하지 않아요. 그저 수수한 여느 어버이입니다만, 바로 이처럼 그저 수수한 여느 어버이인 터라 아이들을 아끼거나 사랑합니다.


  옆지기 남동생은 이제 곧 고등학교 2학년이 됩니다. 손전화로 얘기하는 모습을 어느 날 지켜보는데 “아버지 오고 계셔요” 하고 말하기에, 곰곰이 생각하다가 한 마디 들려줍니다. “‘아버지 오고 계셔요’ 하는 말은 잘못 하는 말이에요. ‘아버지 오셔요’ 하고 말해야 알맞아요. ‘오고 계셔요’가 아니라 ‘오셔요’이거든요. 높임말은 ‘오다’에 붙여야 하는데, 요즈음 사람들 가운데 이런 말투를 옳게 짚는 분이 드물어 ‘오고 계셔요’나 ‘오시고 있어요’라 말해도 다 알아듣지만, 이런 말투에 길들면 뜻은 짚을 수 있어도 말이 엉터리가 될 수 있어요.”


  고등학교 아이들뿐 아니라 중학교 아이들도, 또 초등학교 아이들도 영어를 배웁니다. 영어를 배우는 아이들은 문법이건 말투이건 낱말이건 ‘하나도 안 틀리도록’ 배워요. ‘잘못 쓰는 영어 말투’를 가르치는 일도 없고 배우는 일도 없습니다. 학교에서나 학원에서나 ‘사람들이 잘못 쓴다 하지만, 사람들이 다 알아들으니 안 고쳐도 된다’ 하고 말하지 않아요. 생각해 보셔요. 교사나 강사가 ‘익숙한 버릇대로 어떠한 말투를 잘못된 모습 그대로 안 고치며 쓴다’고 한다면 어찌 될까요. 아마, 학원에서라면 쫓겨날 테고, 학교에서라면 아이들한테서 비웃음을 사겠지요. 이와 달리, 한국말을 잘못 쓰거나 엉뚱하게 쓰는 교사나 강사라면? 안타깝다 해야 할는지 어쩔 수 없다 해야 할는지 아리송합니다만, 국어교사라 하더라도 ‘옳고 바르며 알맞게 쓰는 한국말’을 제대로 모르다 보니, 국어교사조차 ‘가르치다’와 ‘가리키다’마저 잘못 말하기 일쑤예요. 맞춤법과 띄어쓰기를 잘 다스리느냐 하는 대목을 넘어, 말투와 낱말을 슬기롭게 다스릴 줄 아는 분이 너무 적어요. 대학입시 시험공부는 잘 시킬는지 모르지만, 한국사람으로서 한국사람답게 한국말 슬기롭게 쓰는 길을 밝히는 국어교사가 몹시 적습니다. 그래서, 옆지기 남동생이 고등학교 2학년이 되도록 잘못 쓰는 말투를 둘레에서 어느 누구도 건드려 주지 못하거나 바로잡아 주지 않습니다.


  ‘오고 있다’라는 말투는 현재진행형이요, 한국말에는 현재진행형이 없으며, ‘오는 中이다’라든지 ‘오고 있는 中이다’ 같은 말투가 한국 말투에 얄궂게 스며든 일본 말투인 줄 깨닫는 사람은 매우 드물어요. 이러한 말투는 신문과 방송과 잡지와 인터넷과 교과서와 숱한 책과 문제집과 참고서에까지 속속들이 파고듭니다. 교사도 학생도, 어른도 아이도, 이러한 말투에서 홀가분하지 못합니다.


  1920∼30년대에 윤동주 님이 쓴 시를 요사이 다시 읽다가 새삼스레 느낍니다. 시인 윤동주 님이 1920∼30년대에 쓴 글에 ‘오고 있다’처럼 ‘한국 말투에 없는 현재진행형’ 글투는 거의 안 나타납니다. 시골 어르신들 말투에서도 이런 모습을 비슷하게 느껴요. 이른바 ‘구비문학’이라 일컫는 시골 할머니 할아버지 이야기를 들으면, 이분들 말씨에 ‘오고 있다’라든지 ‘하고 있다’라든지 ‘보고 있다’ 같은 말투는 거의 안 나타나요. 아예 없다고까지 할 수 있어요. 아니, 나타날 수 없겠지요.


  국립국어원에서 내놓은 《표준국어대사전》을 찾아보면 ‘-이기’라는 씨끝을 놓고 ‘-기’라는 올림말로만 싣는데, 막상 《표준국어대사전》에 실린 ‘-기’ 올림말 자리에서 보기글을 살피면, 모두 ‘-이기’ 꼴로 다뤄요. 이를테면, “혼자이기는 해도”, “화가이기도 하다”처럼요. 국립국어원에서는 언제나 ‘-이기’ 꼴로만 씁니다. 그렇지만 막상 씨끝 ‘-이기’는 올림말로 다루지 않아요.


  우리 둘레를 살펴보면, 사람들은 “화가기도 하다”나 “혼자기는 해도”처럼 쓰곤 합니다. “나이기는 하지만” 아닌 “나기는 하지만”처럼 쓰는 사람이 제법 많아요. 국립국어원에서는 ‘-이기’를 ‘-기’로 쓰는 일도 받아들일 만하다고 밝히는데, 표준어규정이나 맞춤법해설 같은 자리에서는 이런 이야기를 적바림하지 않아요. 이 같은 대목을 이야기하는 국어학자나 지식인이나 전문가도 따로 없어요.


  한국말을 다루는 전문가조차 스스로 한국말을 올바로 들려주지 못하고 제대로 알려주지 못하는 모습입니다. 여느 자리 여느 한국사람은 여느 한국말을 아무렇게나 쓸밖에 없어요. 더 생각해 보면, 학자나 전문가가 한국말을 슬기롭게 다루지 못하더라도, 우리들 여느 사람이 슬기롭게 쓰면 돼요. 신문이나 방송에 엉뚱한 말씨가 실려도, 우리들 여느 사람이 아름답게 쓰면 돼요. 교과서나 책에 얄궂다 싶은 말투가 나타나도, 우리들 여느 사람이 올바르게 쓰면 돼요.


  누군가 “땡큐!” 하고 말한대서 나까지 이 말을 따라서 할 까닭이 없습니다. 나는 “고맙구나!” 하고 말하면 됩니다. 누군가 “익사이팅!” 하고 말한대서 나마저 이 말을 따라서 할 일이 없어요. 나는 “즐거워!”나 “짜릿해!”나 “좋아!”나 “신난다!”나 “두근두근!”처럼 느낌과 뜻을 살리는 말을 쓰면 돼요.


  생각을 바르게 가다듬으며 삶을 바르게 가다듬습니다. 삶을 바르게 가다듬으면서 말을 바르게 가다듬습니다. 눈길과 손길과 마음길을 따사롭고 환하게 가다듬습니다. ‘언어현실’이 이렇다 하더라도 나는 내 ‘말매무새’를 스스로 가장 사랑스러우며 넉넉하게 가다듬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영어를 자랑하듯 쓴다 하더라도 나는 내 말씨를 스스로 가장 고우며 맑게 가다듬습니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이 쓰레기를 아무 데나 버린대서 나까지 쓰레기를 아무 데나 버릴 수 없어요. 다른 사람들이 나뭇가지를 함부로 꺾는대서 나까지 나뭇가지를 함부로 꺾을 수 없어요. 나는 숲이 푸르게 빛나도록 보살피고 싶습니다. 나는 풀과 꽃과 나무를 살포시 쓰다듬으며 아끼고 싶습니다. 내 삶매무새를 가다듬으며 말매무새를 가다듬습니다. 내 삶결을 북돋우면서 내 말결을 북돋웁니다. 내 삶자락을 돌보면서 내 말자락을 돌봅니다. 오늘날 이곳저곳 둘러보노라면 바르게 쓸 한국말이 없구나 싶지만, 내 마음속에서 조그맣게라도 바르며 착한 한국말이 샘솟을 수 있도록 힘을 쓰려 합니다. 4345.12.14.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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