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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 창작의 즐거움

[도서] 동화 창작의 즐거움

황선미 저

내용 평점 3점

구성 평점 4점

어린이책 읽는 삶 31

 


즐겁게 쓰고 읽는 어린이문학
― 동화 창작의 즐거움
 황선미 글
 사계절 펴냄,2006.3.29./10800원

 


  어린이문학을 꾸준하게 내놓는 황선미 님은 어느덧 대학교에서 문학을 가르치는 자리에 섭니다. 어린이문학을 꾸준하게 내놓는 분들이 대학교수 되어 문학을 가르치는 일이 반갑습니다. 평론가나 비평가들만 가르치는 문학이 아닌, 스스로 문학을 일구는 사람들이 들려주는 문학이 될 때에, 문학을 배우려 하는 젊은 넋한테 푸른 숨결 나눌 수 있으리라 생각해요. 더욱이, 어린이문학을 이야기할 자리에는 바로 어린이문학을 일구는 사람이 서야겠지요.


  《동화 창작의 즐거움》(사계절,2006)이라는 책은 황선미 님이 한창 ‘동화 창작 교육’을 하던 때에 내놓은 이론책입니다. 동화쓰기를 하고 싶은 이들한테 들려주는 ‘동화는 어떻게 쓰는가’ 하는 이야기를 다룹니다. 동화란 무엇인가를 살피고, 동화는 어떻게 이루어지고, 동화를 쓸 때에 어떤 얼거리를 살펴야 ‘읽을 만한 작품이 되는지’를 차근차근 밝힙니다.


  그런데, 황선미 님은 《동화 창작의 즐거움》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한 가지 이야기를 자꾸 되풀이합니다. 9쪽부터 이러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동화 창작은, 독자 대부분이 어린이인 데 반해 이 작업을 어른(작가)이 하게 된다는 사실에서 모순을 안고 시작할 수밖에 없다. 어른은 결코 어린이가 될 수 없고, 어린이는 결코 자신을 속속들이 설명할 수 없는 탓이다.” 하고 말합니다. 어른은 어린이가 될 수 없고, 어린이는 누구인지 밝힐 수 없다, 이 이야기를 꾸준하게 들려주어요.


  참말 그럴까 하고 고개를 갸우뚱하고 생각을 기울입니다. 어른은 어른이고 어린이는 어린이일 테니까, 어른이 어린이를 안다 할 수 없다 할 만하고, 어린이 또한 어른을 안다 할 수 없다 할 만하겠지요. 그러나, 참말 그럴까요.


.. 삶의 미세한 부분을 놓치지 않는 작가일수록 인간미를 다룰 줄 아는 따스한 감성의 소유자로, 거대담론에 집착하는 작가보다 소중할 수 있다 … 문학에는 정답이 없고 새로운 가치 창조란 작가만의 독창성에서 나온다. 작가는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만이 제시할 수 있는 방법으로 세계를 계획하고, 그 세계가 유기적으로 움직이도록 해야 한다 ..  (35, 53쪽)


  어른은 누구나 어린이로 살았습니다. 어른이라 하더라도 누구이든 아기로 태어났습니다. 어른 모두 어머니와 아버지한테서 사랑을 받아 태어난 목숨입니다.


  어린이는 모두 푸르게 자라고 크면서 어른이 됩니다. 어른이 된 어린이는 커다란 몸뚱이로 씩씩하게 이 땅을 일구면서 살림을 꾸립니다.


  나는 내 어린 나날 돌아보면서 ‘내 어린이 마음’을 헤아립니다. 나는 ‘내 어린이 마음’을 헤아리면서 ‘다른 사람 마음’과 ‘다른 어린이 마음’을 헤아립니다. 우리 집 두 아이를 돌보는 하루 누리면서 ‘이 아이들 마음’이 되지는 않아요. 그러나, ‘우리 집 두 아이와 같은 눈높이’에 서도록 ‘나 스스로 내 지난날 어린이 눈높이’가 되어 생각을 하고 마음을 기울입니다. 우리 집 두 아이하고 마주하려고, 나는 우리 집 두 아이하고 함께 어울리는 ‘어린 내 모습’으로 몸과 마음을 바꿉니다.


  어른은 어른이지요. 그러나, 어른은 어린이로 지낸 나날이 있어 어른입니다. 그리고, 몸뚱이는 어른이 되었어도 어릴 적 마음과 꿈과 넋과 사랑 고스란히 간직하면서 아름답게 보듬는 사람이 있어요. 큰 마음 작은 아이요, 작은 마음 큰 어른일 수 있어요.


  어른이 어린이를 모른다는 말이 참이냐 거짓이냐 하고 가리려는 뜻이 아닙니다. 어른 스스로 어린이를 모른다고 여기면 참말 모릅니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도 스스로 어린이 넋과 꿈과 마음과 사랑을 가만히 돌아보면서 눈높이를 맞추고 삶을 어깨동무할 적에는 ‘마음읽기’와 ‘생각나누기’를 할 수 있어요. 나는 이를 어른이 되고서 깨닫습니다. 내가 어린이일 적에는 마땅히 스스로 어린이이니까 어린이를 헤아린다고 할 테고, 어른으로 살아가는 오늘날은 ‘내가 누린 어린이 나날은 이러했구나’ 하고 하나하나 짚으면서 어린이 속살을 곱씹어요.


  거꾸로, 어린이일 적에도 어른을 생각합니다. 어린이였던 나는 ‘내가 저 어른과 같은 자리에 있으면 어떤 마음이 되고 어떤 생각을 할까’ 하고 가만히 되뇝니다. 속으로 오래도록 마음을 기울이고 생각을 가눕니다. 이렇게 하면, 어린이인 나는 어른인 내 둘레 누군가를 읽을 수 있습니다.


  꽃을 마주할 때에도 똑같아요. 꽃하고 눈높이를 맞추고 마음을 주고받으려고 하면 꽃하고 이야기를 나눕니다. 나무하고도 이와 같고, 새와 벌레와 풀과 들짐승하고도 이와 같아요. 스스로 마음을 기울일 때에 마음을 나누어요. 스스로 생각을 쏟을 때에 생각을 주고받아요.


  그래서, 동화를 쓰든 어른소설을 쓰든, 글을 쓰는 사람은 생각을 쓰는 사람이요 마음을 쓰는 사람입니다. 스스로 생각을 기울여 나무마음을 글로 씁니다. 스스로 마음을 바쳐 이웃사람 꿈과 사랑을 글로 빚습니다.


.. 작가가 어린이의 본질과 염원을 고스란히 내포한 인물을 그려내면, 어린이는 이야기와 주인공들이 아무리 많아도 자신에게 기쁨이 되고 자신의 소망을 대신 이루어 줄 수 있는 주인공을 용케도 알아보고 찾아 갖는다 …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평범한 언어로 이루어진 것이 동화의 문장이지만, 작가는 이 평범한 언어로 특별하고 놀라운 이야기를 들려주어야만 한다 ..  (75, 121쪽)


  글을 쓰는 사람은 늘 ‘글을 쓰는 바로 나 스스로’를 이야기합니다. 언제나 ‘나를 한복판에 둔 채’ 이야기합니다. 왜냐하면, 이웃을 읽거나 동무를 읽거나 푸나무를 읽거나 하늘이나 바람을 읽거나, ‘내가 마음을 기울여서 읽기’ 때문입니다. 이기주의나 개인주의라는 소리가 아닙니다. 나 스스로 ‘내 목소리 들려주는 눈높이’를 이웃한테 맞추고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삶을 읽고 삶을 쓴다는 뜻입니다. 곧, 내 넋을 제대로 읽을 때에, 내 아이들 넋을 제대로 읽을 수 있어요. 내 마음을 슬기롭게 알아차릴 때에, 내 이웃들 마음을 슬기롭게 알아차립니다. 내 생각을 사랑스레 보듬을 때에, 내 동무들 생각을 사랑스레 보듬을 수 있어요.


  글쓰기란, 언제나 마음을 씁니다. 마음쓰기가 글쓰기입니다. 글쓰기는, 늘 생각을 씁니다. 생각쓰기가 글쓰기예요. 글쓰기이기에, 노상 사랑을 씁니다. 사랑쓰기가 바로 글쓰기이지요.


  판타지동화가 되든 생활동화가 되든, 모두 마음을 쓰고 생각을 쓰며 사랑을 씁니다. 글쓴이가 내놓은 글틀이 ‘판타지’나 ‘생활’이 되었을 뿐이고, ‘동화’나 ‘소설’이 될 뿐이에요.


  그래서, 《동화 창작의 즐거움》이라는 이론책은 다른 무엇보다, 이 책을 쓴 황선미 님 스스로 ‘동화를 쓰는 즐거움’이 무엇을 밝히는 책이 될 때에 올바르면서 아름답습니다. 황선미 님 스스로 ‘동화를 즐겁게 쓰는 모습’을 이 책에서 드러낼 때에 환하게 빛나면서 널리 따스한 숨결 나눌 수 있어요.


  다만, 황선미 님은 이 대목까지 건드리지 않습니다. 동화쓰기 새내기한테 ‘동화를 어떻게 써야 읽을 만한 작품이 되는가’ 하는 대목만 건드립니다. 동화를 즐겁게 쓰는 삶을 이야기하지는 않아요. 동화를 읽는 즐거운 나날을 이야기하지는 않아요. 동화를 말하는(비평하는) 즐거운 생각나눔을 이야기하지는 않아요.


.. 쉽고 짧고 단순한 문장에 작가의 의도를 모두 담아야 한다 … 호기심을 돋울 만한 아무런 복선도 장치도 없이 예쁜 언어들만 나열하는 것은 언어 낭비에다 지면 낭비이다 … 어린이는 읽고도 무슨 뜻인지 모를 정도로 모호한 문장에는 흥미를 갖지 못한다. 은유적이고 복합적인 의미로 가득 찬 문장 때문에 결국 책읽기를 포기해 버리기도 한다. 작가가 아무리 대단한 사상을 가졌어도 결국 아무것도 전달하지 못하고 마는 것이다 ..  (109, 111, 116쪽)


  여러 비평가 목소리를 따서 ‘정의’를 하거나 ‘결론’을 내야 하지 않습니다. 동화 하나를 놓고 문학평론이 꼭 있어야 하지 않습니다. 누군가 대학교에서 문예창작을 강의해야 하지 않습니다. 동화쓰기를 다루는 이론책을 꼭 써내야 하지 않습니다.


  즐겁게 동화를 쓰면 됩니다. 즐겁게 동화를 읽으면 됩니다. 즐겁게 동화를 말하면 됩니다. 한결같이 헤아릴 대목은 오직 하나, 즐거움입니다. 이리하여, 사랑씨앗이 즐거움에서 비롯합니다. 웃음꽃이 즐거움에서 샘솟습니다. 눈물나무는 즐거움을 먹고 자랍니다.


  예쁜 낱말 얽는대서 동시나 동화가 될 수 없듯, ‘읽을 만한 작품이 되는 뼈대를 어떻게 갖추어야 하는가’ 하는 이론을 밝힌대서 ‘동화 창작법’이 되지 못합니다.


  어린이뿐 아니라 어른도, “은유적이고 복합적인 의미로 가득 찬 문장 때문에 결국 책읽기를 포기해 버리”지요. 어린이문학에서만 이런 말을 하지 않아요. 어른문학도 이와 똑같아요. 그런데, 이런 말조차 너무 어렵지 않나 싶습니다. “은유적이고 복합적인 의미”란 무엇일까요. 어쩌면, 이런 말마디가 춤추기 때문에 문학평론이나 동화이론조차 사람들이 멀리하지 않나 궁금해요. 굳이 이런 말마디로 춤을 추지 않아도 얼마든지 아름다이 춤출 문학평론이 되거나 동화이론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해요. 왜냐하면, 모든 문학은 바로 ‘즐거움’ 때문에 짓고 읽으며 말하거든요.


  즐겁게 밥을 짓습니다. 즐겁게 빨래를 합니다. 즐겁게 아이들하고 복닥거립니다. 즐겁게 옆지기하고 이야기꽃 피웁니다. 즐겁게 사진을 찍고, 즐겁게 그림을 그리며, 즐겁게 글을 써요. 어제도 오늘도 모레도 즐거움이에요. 지난날에도 오늘날에도 즐거움이에요. 옛날이든 앞날이든 즐거움입니다. 즐거움으로 삶을 일굽니다. 즐거움으로 일군 삶을 글 하나로 담습니다. 즐거움으로 일군 삶을 담은 글을 책으로 묶습니다.


  동화책을 아이들이 좋아한다면 즐겁기 때문입니다. 옛날이야기를 아이들이 좋아한다면 즐겁기 때문이에요. 판타지문학을 좋아하는 까닭도 즐겁기 때문이지, 다른 까닭은 없어요. 앞으로 황선미 님이 새로운 이야기 하나 쓸 수 있기를 빌어요. ‘읽을 만한 동화를 쓰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같은 이야기 말고, ‘황선미 님 스스로 그동안 동화를 쓰면서 얼마나 즐거웠고 얼마나 웃고 울었으며 얼마나 아름다운 삶 누렸는가’ 같은 이야기를 쓰기를 바랍니다. 4346.4.4.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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