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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어떻게 쓸까

[도서] 무엇을 어떻게 쓸까

이오덕 저

내용 평점 5점

구성 평점 5점

이오덕을 읽는다 3

 


모든 말은 삶에서 태어난다
― 무엇을 어떻게 쓸까
 이오덕 글
 보리 펴냄, 1995.9.30.

 


※ 책풀이 ※
중·고등학교 다니는 푸름이들이 글을 즐겁게 쓰면서 푸른 마음 살찌우는 길을 밝히도록 돕는 이야기를 담은 《무엇을 어떻게 쓸까》는 글 한 줄을 겉치레 아닌 삶짓기로 쓸 때에 아름답다고 말한다. 남한테 보여주거나 자랑하려고 쓰는 글이 아니라, 스스로 삶을 밝히고 즐기려는 꿈을 키우면서 쓰는 글이라고 말한다. 어른 문학이나 어른 사회에 휘둘리지 말고, 푸름이 스스로 가장 고운 사랑을 키워 글에 담자고 말한다.


..


  하늘빛이 예쁩니다. 아침에는 아침대로 하늘빛이 예쁘고, 저녁에는 저녁대로 하늘빛이 예쁩니다. 새벽과 밤에는 새벽하늘과 밤하늘이 새삼스럽게 예쁩니다. 예쁜 하늘빛은 둘레에 거치적거리는 것들 없을 적에 한결 예쁩니다. 이를테면, 전깃줄이나 전등이 없어야 더 예뻐요. 나무가 우거지거나 멧자락 넘실거린대서 하늘빛을 가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높다란 아파트나 건물은 하늘빛을 가립니다. 비행기도 하늘빛을 가립니다. 커다란 풍선과 걸개천도 하늘빛을 가려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하늘을 보며 살아야 합니다. 하늘을 보며 눈을 밝히고, 하늘을 마주하며 숨을 쉽니다. 하늘을 이루고 하늘을 흐르는 바람을 마셔야 비로소 사람들 목숨을 이어요. 하늘숨인 바람이 없고서야 사람은 살아가지 못합니다. 다른 짐승도, 풀과 나무도, 하늘숨인 바람이 없다면 모두 죽습니다.


  곧, 어떠한 목숨이든 하늘바람을 먹으며 삶을 잇습니다. 하늘바람을 먹으며 삶을 새롭게 짓습니다. 하루하루 새롭게 일구는 삶이요, 날마다 새롭게 북돋우는 삶입니다.


.. 자기가 실제로 겪었던 일을 자기 말로 하나의 이야기처럼 적었으니 재미있게 읽히지 않을 수 없다 … 마음이 착하지 않고는 이렇게 살 수 없고 이런 글을 쓸 수 없다. 이런 착한 심성은 가정에서 부모들이 기르는 것이다. 아마도 이 학생의 부모님은 일하기를 즐기면서 살아가시는 분들이라 여겨진다. 글은 이렇게 해서 써야 살아 있는 글이 된다. 보고 듣고 일한 것, 실제로 몸으로 겪은 삶 속에서 나와야 생명이 있는 글이 된다. 방안에 앉아서 책만 보고 생각만 해서는 절대로 살아 있는 글을 쓸 수 없다. 학생이고 소설가고 시인이고 다 그렇다 … 삶을 정직하게 쓰면서 스스로 삶을 키워가야 한다. 그래야 좋은 글이 씌어진다 … 글이란 무엇이든지 보기 좋은 것, 듣기 좋은 것을 써야 버젓한 글이 된다고 알고 있다면 글을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 어떤 말이든지 생활 속에서 익혀야 비로소 제것이 되는 것이다 ..  (12, 14, 15, 65쪽)


  하늘을 품에 안으면 하늘마음 됩니다. 바다를 품에 안으면 바다마음 됩니다. 별을 품에 안아 보셔요. 달과 해를 품에 안아 보셔요. 우리는 누구나 별마음과 달마음과 해마음 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옆지기나 아이들을 품에 안으며 사랑마음 되고, 한솥밭 먹는 이들과 꿈을 키우는 동안 꿈마음 됩니다.


  풀 한 포기 뜯으며 풀마음 됩니다. 나무 한 그루 아끼면서 나무마음 됩니다. 우리는 저마다 어떤 마음이 될 때에 즐거우면서 아름다울까요. 우리는 어린 나날부터 어떤 마음으로 하루하루 삶을 짓는가요. 내 어버이는 나한테 어떤 마음 되도록 숨결을 물려주었을까요. 나는 내 아이한테 어떤 마음 되라는 뜻을 물려줄까요.


  우리들은 하늘마음 될 수 있듯이, 전쟁마음이나 돈마음 될 수 있습니다. 바다마음 될 수 있지만, 권력마음이나 학벌마음 될 수 있어요. 나무마음뿐 아니라 농약마음이나 비료마음 될 수 있습니다. 꽃마음이 될 수 있으나, 자동차마음이나 아파트마음 될 수 있어요.


  어느 길로 나아가고 싶은지 생각할 노릇이에요. 어느 길로 접어들 적에 스스로 즐겁다고 느끼는지 살필 노릇이에요.


  무엇을 바라보는가요. 무엇을 느끼는가요. 무엇을 생각하는가요. 바라보는 대로 걸어가고, 바라보는 대로 이룹니다. 느끼는 대로 살아가고, 느끼는 대로 사랑합니다. 생각하는 대로 일을 하고, 생각하는 대로 놀이를 찾습니다.


  언제나 사랑을 바라보는 사람은 언제나 사랑을 찾습니다. 늘 활짝 웃는 기쁨 누리려는 사람은 아무리 고되거나 벅찬 때를 마주하더라도 늘 활짝 웃으며 기쁨늘 누립니다. 삶이 생각을 짓기도 하지만, 생각이 삶을 짓기도 합니다. 삶이 오늘 내 모습을 빚기도 하지만, 오늘 내 마음이 그대로 삶으로 드러나곤 합니다.


.. 우리가 보통으로 쓰는 말이라도 좀더 깨끗한 우리 말이 있으면, 우리 말을 살려서 쓰도록 하는 것이 좋다. 가령 ‘생활’이란 말도 때에 따라서 쓸 수도 있지만 ‘살아간다’고 해도 될 자리에 ‘생활한다’고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 중고등학생의 글은 시인이나 수필가나 소설가들이 쓰는 문학작품의 흉내를 글감과 제목에서부터 내려고 하다 보니 솔직한 자기 이야기, 평범하게 살아가는 이야기가 잘 안 나온다 … 남들이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 글을 써야 한다는 말이 되기도 한다. 가치가 있는 글을 쓰려면 가치가 있는 삶을 살아야 하고, 가치가 있는 생각을 해야 한다 … 몸으로 겪은 것을 그대로 잘 생각해 내어서 쓰면 꾸며낸 이야기보다 더 재미있고 감동을 준다 … 어른들이 쓰는 시도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어린이들이 알 수 있는 말로 쓰는 것이 바람직하다 ..  (24, 30, 33, 39, 178쪽)


  풀벌레 노랫소리 즐기는 사람은 고속도로를 시외버스 타고 달리더라도, 이렇게 시끄럽고 복닥거리는 한복판에서까지 풀섶 풀벌레 노랫소리를 느낍니다. 나비를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은 땅밑으로 깊이 파고든 지하철을 타고 움직이더라도, 이렇게 깜깜하고 햇볕 한 줌 없는 데에서조차 꽃송이 따라 나풀거리는 나비 날갯짓을 느낍니다.


  곁에 있어도 우리 아이요, 먼발치에 있어도 우리 아이입니다. 옆에 있어도 사랑이고, 멀리 있어도 사랑입니다. 눈에 보이는 자리에 있어야 그 모습이지 않아요. 눈을 감아도 늘 그 모습입니다.


  삶이란 빛입니다. 하늘빛이고 물빛이며 흙빛이요 햇빛입니다. 빛이란 사랑입니다. 하늘사랑이고 물사랑이며 흙사랑이요 해사랑입니다. 사랑이란 이야기입니다. 하늘과 물과 흙과 해를 누리며 살아가는 이야기가 바로 사랑입니다. 이야기란 삶이지요. 하늘을 누리고 물을 마시며 흙을 밟고 해를 어루만지는 삶이 고스란히 이야기입니다.


  나랏님은 훈민정음을 만들고 뭐를 만들며 무엇무엇 만들었습니다. 나랏님 곁에 있던 지식인과 학자는 이것저것 쓰고 만들어 남겼습니다. 오늘날 학교에서는 문학이나 역사라는 이름을 붙여 나랏님과 지식인과 학자가 남긴 몇 가지를 배우고는, 시험문제로 풉니다.

  그런데, 오늘날 학교에서는 먼먼 옛날부터 모든 시골사람이 스스로 짓고 누리던 노래와 놀이를 배우지 않고 가르치지 못합니다. 모내기를 가르치는 학교는 없습니다. 모내기를 하며 부르던 노래를 배울 수 있는 학교는 없습니다. 나물캐기를 가르치는 학교는 없습니다. 나물을 캐며 부르던 노래를 배울 만한 학교는 없습니다.


  방아찧기나 절구질을 가르치는 학교가 있나요? 아이 낳기와 아이 돌보기를 가르치는 학교가 있나요? 기저귀천을 어떻게 끊고 어떻게 빨래하며 어떻게 개는가를 배울 수 있는 학교가 있나요? 아기한테 젖 물리는 매무새를 가르치는 학교란 없고, 젖떼기밥을 어떻게 마련해서 먹이는가를 배울 만한 학교란 없습니다.


  오늘날 학교 어디에서도 삶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오늘날 학교 어디에서도 삶을 들여다볼 수 없습니다. 삶이 없고 사랑이 없으며 사람이 없는 오늘날 학교입니다. 대학입시에도 삶과 사랑과 사람이 없어요. 졸업장에도 논문에도 교과서에도 삶과 사랑과 사람이 없습니다. 오직 지식과 시험문제만 있습니다.


.. 글을 살리기 위해 자기를 속여서는 안 된다 … 한글학자들의 잘못은 ‘말’을 떠난 ‘글’의 질서에 매달리고, 그 질서 속에 빠져버린 데 있었다. 말을 떠난 글의 질서는 남의 것이다. 중국 것이고, 일본 것이고, 미국 것이고 서양 것이다 … “아무리 교과서가 그렇게 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문학작품, 더구나 시를 쓰는 사람은 살아 있는 우리 말을 써야지요. 교과서고 사전이고 그밖에 어떤 책보다도 위에 있어야 하는 것이 백성들이 쓰는 살아 있는 말 아닌가요?” 내가 이렇게 말했지만 그 시인은 시원스럽게 찬성하는 태도가 아니었다 … ‘유식한 말’은 쓰지 않는 것이 좋다. 말에서만은 ‘유식’한 것이 사실은 무식한 것이다 … 글은 몸으로 부딪힌 일을 쓰고 가슴에 울려온 느낌과 생각을 쓰는 것이지, 머리로 써서는 안 된다 … 우리가 하고 있는 학교의 교육이 ‘국어 교육’으로는 되어 있어도 ‘우리 말 교육’으로는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 ‘국어 교육’과 ‘우리 말 교육’은 어떻게 다른가? ‘국어 교육’은 한자말과 한자말로 된 글을 가르치는 교육이다. ‘우리 말 교육’은 우리 말과 우리 말로 된 글을 가르치는 교육이다 ..  (35, 57, 66, 74, 98, 216쪽)


  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칩니다. ‘우리 말’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한국말’이든 ‘겨레말’이든 가르치지 않습니다. 무슨 소리인가 하면, 학교에서는 지식과 시험문제만 가르칠 뿐, 삶과 사랑과 사람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풀’과 ‘나무’라는 낱말을 누가 지었을까요? ‘말’이라는 낱말을 누가 지었을까요? 임금님이 지었을까요, 학자가 지었을까요? 모두 아닙니다. ‘풀’도 ‘말’도 시골사람이 지은 낱말입니다. ‘짓다’라는 낱말도 시골사람이 지었어요. ‘사람’이라는 낱말도, ‘살다(삶)’와 ‘사랑’이라는 낱말도, ‘시골’이라는 낱말도 모조리 시골사람이 지었어요.


  모든 풀이름을 시골사람이 지었습니다. 왜? 왜 지었을까요? 시골사람은 늘 풀을 먹거든요. 풀에 둘러싸여 살거든요. 그러니, 풀을 잘 알밖에 없어요. 아니, 풀을 잘 알아야지요. 풀밭이나 풀숲에서 보금자리를 일구는 시골사람이니, 풀을 하나하나 알아차립니다. 다 다른 풀을 하나하나 알아차리는 동안 다 다른 풀에 하나씩 이름을 붙입니다. 골골샅샅 시골마을마다 다 다르게 이름을 붙이지만, 재미있게도 모두 엇비슷해요. 조금씩 말투와 말씨가 다르지만 고갱이는 똑같습니다. 텔리비전이나 라디오나 인터넷이나 전화조차 없지만, 함경도와 경상도와 전라도에서 풀 한 포기한테 붙이는 이름 고갱이는 똑같아요.


  풀이름뿐 아니라 나무이름에서도, 물고기이름에서도, 벌레이름에서도, 새이름에서도, 짐승이름에서도, 모두 살짝살짝 말투와 말씨가 다르더라도, 서로서로 이내 알아차립니다. 무엇을 가리키는 ‘다르게 가리키는 이름’인가 하고 깨달아요.


  왜 시골사람이 말을 지었을까요? 참 마땅한 소리입니다만, 시골사람은 풀과 나무를 다루면서 살아갑니다. 풀과 나무와 돌과 흙으로 집을 짓습니다. 나무를 땔감으로 마련해서 불을 지핍니다. 흙을 일구고, 흙을 만집니다. 냇물이나 바다에서 물고기를 낚습니다. 풀벌레를 늘 바라봅니다. 온갖 들짐승을 만납니다. 수많은 새하고 만날 뿐 아니라, 새들 노랫소리를 듣습니다.


  이렇게 모든 숨결하고 이웃이요 벗으로 지내는 시골사람이니, 이웃이요 벗으로 지내는 모든 숨결들한테 이름을 붙여 주지요. 너는 달팽이라고, 너는 왜가리라고, 너는 방울벌레라고, 너는 쑥이라고, 너는 참나무라고, 너는 꽃마리라고, 하나하나 사랑스러운 눈길과 살가운 마음으로 이름을 붙입니다. 그리고, 시골사람은 스스로 ‘사람’이네 하고 이름을 붙여요.


.. ‘말을 창조하면서 쓴다’고 하면, 신기한 말을 머리로 궁리해서 만들어 낸다는 말이 아니다. 자기 말, 어렸을 때부터 배워서 잘 알고 있는 우리 말을 살려서 써야 말을 창조하는 것이 된다 … 글의 내용이 절실한 이야기로 꽉 차 있으면 허튼 말이 없고 겉치레 글 꾸미기도 없다. 하고 싶은 말이 없으니까 뭔가 있는 것처럼 쓰려고 하는 것이고, 그러다 보니 남의 것 흉내나 내고 말재주를 부리게 되고, 이래서 깨끗한 우리 말 대신에 어려운 한자말이나 유식하게 보이는 남의 나라 말과 말법을 쓰는 것이다 … 한자말을 쓰고 싶어하니 한문글자를 써야 한다고 우기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이렇게 한문글자와 한자말을 쓰고 싶어하는 마음이 바로 외국숭배사상이다 … 말 하나 바로잡는 것이 단지 말버릇 하나 고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죽어 가는 우리 겨레의 마음을 살리는 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 중고등학생 때 우리 말을 제대로 익히지 않으면 아주 평생을 괴상한 병신 같은 말로 살아가게 되고, 이래서 우리 말은 죽어버리는 것이다 ..  (88, 89, 105, 107쪽)


  ‘우리 말’이란 바로 삶입니다. 살아가는 결대로 쓰는 말이 바로 ‘우리 말’입니다. 한국말이자 겨레말인 ‘우리 말’은 우리한테 우리 말인데, 이웃나라에서는 이웃 이녁대로 ‘우리 말’이 다를 테지요. 왜냐하면, 일본과 중국은 서로 삶이 달라요. 서로 삶이 다르니 말이 다릅니다.


  서로 삶이 다르기에 집이 다르고 옷과 밥이 다릅니다. 날씨가 다르고 철이 다르니 집과 옷과 밥이 다를밖에 없습니다. 물과 바람과 흙이 다르니 집과 옷과 밥이 다르기 마련입니다. 그러니까, 물과 바람과 흙이 다른 결에 따라 “말이 서로 다른 나라로 살아갑”니다.


  한국사람이 중국사람처럼 말할 까닭 없어요. 중국사람이 한국사람처럼 말할 까닭 없어요. 한국사람은 한국말 하면 되지, 중국말이나 한자말 쓸 까닭 없습니다. 일본사람은 일본말 하면 넉넉하지, 미국말이나 영국말 쓸 까닭 없지요.


  그런데, 오늘날 어느 나라나 영어(미국말이나 영국말)를 참 많이 써요. 왜 그럴까요? 오늘날은 미국이 지구별에 크게 힘을 뻗칠 뿐 아니라, 비행기로 쉬 오가니까, 또 미국 사회와 문화가 다른 나라로 널리 파고들었으니까, 저절로 영어를 많이 씁니다. 자연스러운 결은 아니에요. 문화사대주의나 식민지주의라 할 만한데, 오늘날 지구별 여러 나라는 스스로 제 삶을 갈고닦아 제 사랑을 누리기보다는, 물질문명을 더 받아들이거나 뽐내어 경제성장을 이루려고 용을 씁니다. 이러다 보니 저절로 영어를 많이 쓰고 말아요. 안 쓸 수 없어요. 영어를 쓰는 미국과 영국(유럽) 사회는 경제성장과 물질문명을 앞세워요. 그러니, 경제성장과 물질문명을 받아들이려 하는 나라는 중국이건 일본이건 한국이건 영어를 자꾸 가르치거나 배우거나 쓰려고 용을 씁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셔요. 시골에서 조용히 흙을 만지면서 숲속에서 스스로 밥과 옷과 집을 누리는 사람들이 어떤 말을 쓰는지 생각해 보셔요. 한국사람이라면 한국말만 씁니다. 일본사람이라면 일본말만 씁니다. 그렇겠지요? 제아무리 한국과 일본에 경제성장과 물질문명이 눈부시게 들어왔다 하더라도, 손전화 안 쓰고 텔레비전 안 보고 자동차 안 타며 전기조차 안 쓴다 하면, 이렇게 시골 두멧집에서 지내는 이들은 ‘먼먼 옛날부터 시골에서 이어온 수수하고 투박한 시골말’을 씁니다. 한국에서도 일본에서도 똑같습니다. 시골사람은 영어를 안 써요. 시골사람은 한자말도 안 써요.


  학교를 오래 다닌 사람이 한자말도 쓰고 영어도 씁니다. 학자와 지식인이 쓴 책을 많이 읽은 사람이 한자말과 영어를 즐겨씁니다. 텔레비전 많이 본 여느 사람들 말씨에 한자말이나 영어가 저절로 녹아듭니다.


.. 과연 대학 진학만이 학생들의 갈 길인가? 대학 진학이 그런 끔찍한 비극을 겪고 목숨까지도 걸어 볼 만한 가치가 있는 길인가? 인생의 황금기에 온갖 잡동사니를 암기하는 일로 시달리고, 벗들을 죄다 적으로 만들고, 그래도 안 되어 더러는 스스로 목숨을 끊고, 그런 살벌한 경쟁에 이기고 살아남아도 대개는 몸과 마음이 다 병들어 있는 이 엄연한 사실 앞에서, 그래도 여전히 대학이요 대학만이 사람이 가야 할 단 하나 최상의 길인가 … 잘못된 교육의 결과는 다시 또 더 잘못된 교육의 씨를 뿌리고, 이래서 우리 아이들의 불행은 끝없이 되풀이되고, 역사의 비극은 끊어질 줄 모른다 … 글을 어렵게 쓰는 것이 쉽고, 쉽게 쓰기가 도리어 어렵다. 이것이 거꾸로 가고 있는 우리 사회의 현실이다. 이제 우리는 말을 책에서 배우지 말고 삶에서 배워야 하고, 유식한 사람들에게 배울 것이 아니라 무식한 사람들에게, 저보다 나이 어린 사람들에게 배워야 한다. 말이 말로 되어야 글도 되는 것이니까 … 고향 이야기를 하자니 고향 말, 곧 우리 말로 쓰지 않을 수 없다 ..  (95, 114, 155쪽)


  시골살이하고 멀어질수록 ‘우리 말’하고 멀어집니다. 살림집이 시골에 있대서 시골말을 쓰지 않아요. 시골에서 일하거나 살아가더라도 텔레비전을 보고, 지식인들이 쓴 책을 읽으며, 학교를 오래 다닌 사람들은, 누구나 똑같이 한자말과 영어를 즐겨씁니다. 도시에서 살더라도 학교를 안 다니거나 조금 다닌 사람들은, 지식인들이 쓴 책을 안 읽는 사람들은, 텔레비전을 안 보는 사람들은, 먼먼 옛날부터 이어온 수수하고 투박한 시골말로 이야기를 나눕니다.


  삶에 따라 말이 다릅니다. 삶에 따라 스스로 말을 짓습니다. 도시에서 물질문명에 둘러싸여 살아가는 사람은 새로운 물건을 만나면 한자말이나 영어로 새 이름을 붙이려 합니다. 시골에서 시골스럽게 살아가는 사람은 새로운 물건을 마주하면 오랜 겨레말(우리 말)로 이름을 붙이려 합니다.


  참말 시골에서 시골스레 살아가는 어느 할머님 이야기를 들은 적 있는데, 이분이 택시를 처음 보고는 “상투 달린 것”이라고 말씀했다고 해요. 스스로 살아가는 대로 이름을 붙입니다. 우리 집 여섯 살 아이는 나비를 아주 좋아합니다. 언젠가 ‘수국’이라는 꽃을 처음 보고는 여섯 살 아이는 곧바로 “어, 나비꽃이네?” 하고 말했습니다. 수국에 달린 꽃잎이 마치 나비 날개 모양과 같이 생겼기 때문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비를 좋아하는 아이 눈으로 수국은 ‘수국’ 아닌 ‘나비꽃’입니다. 왜냐하면, 이 아이한테는 아이 삶대로 모든 것을 바라보니까요.


.. ‘대지’는 우리 말이 아니다. 만약에 ‘땅’이라 쓰면 뭔가 보잘것없는 말, 빈약해 보이는 말 같고 ‘대지’라 하면 그럴싸해 보이고 시가 될 것 같은 말로 느낀다면, 그런 사람은 절대로 좋은 시를 쓸 수 없다는 것을 잘라 말하고 싶다 … 나는 벌써 이런 정신 상태를 우리 겨레가 가지고 있는 무더기 정신병이라 하여, 우리 말을 버리고 한자말·일본말·서양말을 쓰고 싶어 하는 고약한 버릇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시란 사람의 마음을 깨끗하게 해 주고 높여 주는 것인데, 이런 병든 마음을 보여주고 있으니 이 글을 어찌 시라 하겠는가 … 바윗돌 위에서나 콘크리트 바닥에서, 또는 플라스틱 상자 속에서는 씨앗이 싹터 날 도리가 없다. 잡초가 나 있더라도 적어도 흙이 있고 햇빛이 쬐는 땅이라야 씨앗이 싹틀 수 있다. 시라는 씨앗도 삶이라는 땅이 있어야 한다 … 시인과 소설가들이 글만 쓰고 있다는 것, 이것이 문제다. 나는 글만 쓰고 있는 이들이 써 놓은 글을 제대로 되었다고 보지 않는다 … 흔히 한자말에 중독이 되어 있는 사람들이 “쉬운 우리 말로 쓰면 글이 길어진다”고 하는데, 이것을 보면 요란한 한자말로 쓴 글보다 깨끗한 우리 말로 쓴 글이 훨씬 짧아졌다. 그런데, 이렇게 어린이도 어른도 누구나 알기 쉽게 쓸 수 있는 말을 왜 그렇게 어렵게 쓰고 싶어 하는가? 이게 병 아니고 무엇인가? 병이라도 예사로운 병이 아니라, 나라와 겨레를 아주 망치는 병이다 ..  (138, 144, 148, 149, 225쪽)


  모든 말은 삶에서 태어납니다. 글은 말을 옮긴 이야기입니다. 곧, 글도, 모든 글도 삶에서 태어납니다. 삶이 있고서야 말이 태어나듯이, 삶이 있은 뒤에 글이 태어납니다. 삶을 말로 나타내듯이, 삶을 글로 나타냅니다.


  그런데, 때때로 글에 삶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신문 사설이나 칼럼을 쓰는 사람들입니다. 사설이나 칼럼 아닌 여느 신문글에도 삶이 드러나지 않습니다. 삶을 모두 도려낸 채 쓰는 글이 신문글이라 할 만해요. 대학교 논문도 이와 같습니다. 학술논문에 삶이 드러나는 일이 없습니다. 정치평론, 문학평론, 예술평론도 이와 같아요. 그림과 사진을 놓고 쓰는 평론도 이와 같지요. 간추려 말하자면, 비평이나 평론이나 논평을 한다는 글에는, 또 연구를 하거나 학문을 한다는 글에는, 아무런 삶이 안 드러납니다.


  삶을 드러내는 글에는 마음이나 생각이 드러납니다. 그러니까, 마음도 생각도 안 드러낸 채 ‘객관’이라는 눈으로 쓰려 하는 글이 비평이요 논평이며 신문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의사가 쓰는 진료글이나 법관이 쓰는 판결글도 이와 같을 수 있어요. 그런데, 생각해 봐요. 삶이 없는 일이 있을 수 있을까요. 기자나 작가나 학자가 삶이 없이 일할 수 있을까요. 학문이나 연구에 삶이 안 깃든다면, 이러한 학문이나 연구는 무슨 뜻이 있을까요. 법관이 내리는 판결이 삶하고 안 이어질까요. 의사가 내리는 진료는 삶하고 동떨어질까요.


  프랑스사람 파브르가 쓴 《곤충기》와 미국사람 시튼이 쓴 《동물기》가 널리 읽히며 사랑받는 까닭을 헤아려 봅니다. 벌레 한 마리와 짐승 한 마리를 찬찬히 살펴보고 나서 쓴 글인데, 이 글은 ‘학문’이자 ‘연구’이자 ‘논문’이자 ‘비평’인데 아주 아름답습니다. 잘 읽힙니다. 군더더기조차 없습니다. 왜 그러할까요? 바로, 파브르와 시튼 두 사람은 이녁 삶을 담아 글을 썼기 때문입니다. 논문이나 비평, 또는 책을 쓴다는 생각이 아니라, 이녁 스스로 벌레와 짐승을 사랑하고 아끼며 함께 살아가는 이웃으로서 벌레 이야기와 짐승 이야기를 쓴다는 생각이었기에, 이 글은 논문도 되고 학문도 되며 문학도 됩니다. 그러니까, 이 글은 바로 ‘글’입니다. 삶이면서 글입니다. 삶이면서 글이 되는, 다시 말해서 ‘삶글’이 될 적에는 따스함과 너그러움이 감돕니다. 삶글일 적에 참글이요 ‘글’입니다. 글이 글다울 적에는 부스러기나 찌끄러기나 겉치레를 끌어들이지 않습니다. 수수하고 투박한 그대로 아름다운 이야기요 삶이며 사랑입니다.


  오직 삶으로 쓰고 삶을 쓸 때에 글이 됩니다.


.. 농사꾼이고 일반 서민들이 쓰지도 않는 ‘자애’니 ‘환희’니 하는 말을 써야 그럴듯한 시가 된다고 생각하는 우리 나라 시인들의 잘못된 글쓰기 병폐는 김소월과 같은 민요시인까지도 어릿광대 노릇을 하게 만들어, 문학이라는 글쓰기 상품을 만들어 내는 모든 작가들의 정신을 오염시키고 말았다 … 우리 나라의 시인들은 우리 말에 너무 관심이 없고 감각이 무디다 … 맨 처음 일본시와 서양시를 따라 쓰기 시작했던 최남선 때부터 잘못되었던 것이다 … 시는 ‘가장 싱싱하게 살아 있는 말로 나타내는 예술’이다 … 시골 농사꾼들의 말, 어린이의 말, 이것이 시로 쓸 수 있는 가장 귀한 말이다 … 생활 따라 말이 달라지더라도 지금까지 쓰던 말을 아주 버리고는 낯설고 엉뚱한 새 말을 지어낼 것이 아니라, 될 수 있는 대로 지금까지 써 오던 말을 잘 살려서 쓰는 것이 슬기롭다 … 한자말이나 서양말, 외국 말법보다는 오히려 우리 시골말, 시골에 남아 있는 사투리를 쓰면 시가 살아나고 새로와 보인다. 시골말, 시골 사투리가 가장 깨끗한 우리 말이기 때문이다 ..  (162, 166, 168, 169, 172∼173쪽)


  이오덕 님이 쓴 《무엇을 어떻게 쓸까》(보리,1995)라는 책을 읽습니다. 이 책은 글쓰기가 무엇인가를 또렷하게 밝힙니다. 글쓰기란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삶쓰기’입니다. 삶쓰기가 아니고서는 글쓰기가 되지 않습니다. 삶쓰기가 아닌 글쓰기는 거짓쓰기일 뿐입니다. 삶을 쓰지 않으니 겉치레와 거짓부렁을 하고야 맙니다.


  삶이 있어야 글에 담을 알맹이가 있습니다. 삶이 없으면 글에 담을 알맹이가 없습니다. 알맹이가 없는 글을 억지로 쓰려 하니, 겉멋을 부리지요. 한자말이나 영어를 자꾸 섞어 쓰며 어려운 글이 되도록 합니다. 어려운 글이 되도록 해서 못 알아듣게 하면, 사람들은 처음에는 어리둥절해 하다가 ‘글이란 이렇게 해야 되는가 보다’ 하고 잘못 받아들이곤 합니다.


.. 내가 아주 크게 걱정하는 것은 이런 일본말의 ‘찌꺼기’가 아니다. 찌꺼기쯤이야 언젠가는 버리게 될 것이고, 가령 그 한 부분이 남아서 아주 우리 말이 되어 버린다고 해도 그다지 크게 걱정할 일은 아니다. 문제는 찌꺼기가 아니라 우리 말을 자꾸 잡아먹는 무서운 독소를 지닌 알짜 일본말과 일본 말법이 널리 쓰이고 있는데도 그것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 우리가 아직도 일본말을 못 버릴 뿐 아니라 중국글자와 그 글자말을 즐겨 쓰는 까닭은 순전히 일본제국주의가 주사해 넣어 놓은 무서운 마약이 우리 겨레의 몸과 정신 속에 깊숙이 파고들어 있기 때문이다 … 우리는 이렇게 서양말을 많이 섞어서 쓰는 일본말을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듣고 또 그런 일본글과 그 글을 번역한 글을 많이 읽다 보니 저절로 서양말을 일본사람들처럼 많이 쓰게 된 것이다 … 이 ‘국민학교’는 일본제국주의자들이 마지막 발악을 하면서 조선사람들을 철저히 황국신민으로 만들고 학교를 군대식 훈련장으로 바꾸기 위해 붙힌 이름이다 ..  (186∼187, 188, 189, 196쪽)


  하늘은 사람을 속이지 않습니다. 시월은 시월이고 오월은 오월입니다. 해는 아침마다 뜨고 저녁마다 집니다. 달과 별은 저녁마다 빛나고, 어디에나 미리내가 곱습니다. 다만, 도시에서는 전깃불을 지나치게 밝혀 별빛도 미리내빛도 안 보이도록 가로막습니다. 그러니까, 도시에서는 참을 감추고 거짓을 드러낸다 할 만합니다. 도시에서는 ‘있는 것’을 ‘있는 듯 없는 듯’ 모르도록 한다는 뜻입니다. 이런 곳에서 삶을 누린다면 자꾸 참하고 멀어지거나 삶을 잊고 맙니다. 참하고 멀어지거나 삶을 잊으니, 글을 써도 글답지 못하고 말을 해도 말답지 못해요. 시골말하고 등돌릴 뿐 아니라 ‘한국말(우리 말)’이 무엇인지 못 알아챕니다.


  시골에서 살더라도 시골사람답게 안 살고 도시사람처럼 살면 말다운 말을 몰라요. 도시에서 살더라도 시골사람다운 넋을 건사하면 말다운 말을 알아요. 삶을 가꿀 때에 말을 가꿀 수 있고, 말을 가꾸며 마음을 가꿉니다. 마음을 가꾸기에 사랑을 가꾸고, 사랑을 가꾸는 동안 일과 놀이도 아름답게 가꿉니다. 하루하루 아름다움이 샘솟는 삶이라면, 이러한 삶을 바탕으로 글을 즐겁고 아름답게 쓸 수 있습니다.


  문장수련을 하거나 글쓰기강좌를 듣는대서 글이 나아지지 않아요. 삶을 가꾸어야 글이 나아집니다. 대학교를 다니거나 책을 많이 읽어야 글을 잘 쓰지 않아요. 삶을 즐겁고 아름다우며 사랑스럽게 잘 가꾸면 글은 저절로 거듭납니다.


  마음속에 사랑을 심을 때에 글이 사랑스럽습니다. 삶에 꿈을 심을 때에 글이 빛납니다. 글쓰기는 삶쓰기이듯, 글읽기는 삶읽기입니다. 책읽기는 늘 삶읽기입니다. 삶읽기란 사람읽기요 사랑읽기예요. 그러니까, 글쓰기란 사람쓰기이면서 사랑쓰기입니다. 4346.10.25.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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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워블로그 샨티샨티

    교육자로 존경하는 이오덕 선생님의 맑고 향기로운 삶이 우리말 교육으로 이어져 사고와 일상이 일치한 분이 아닌가 싶어요. 책장 속에 꽃혀 있는 <<무엇을 어떻게 쓸까>>를 다시 꺼내 보며 마음을 다잡습니다.

    2013.10.25 09:08 댓글쓰기
    • 스타블로거 숲노래

      누구나 생각과 삶과 말을 하나로 모둘 수 있으면,
      언제나 아름답게 살아갈 수 있으리라 느껴요.
      이러한 길을 이오덕 선생님이 잘 밝혀서
      우리들 누구한테나 빛을 보여주었지 싶습니다.

      2013.10.26 06:09

PRIDE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