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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가을 고흥 억새길 걷기 (13.10.26.)
고흥 길타래 12―행정마을·수덕마을·두곡마을

 


  걷는 사람이 길을 봅니다. 걷는 사람이 흙을 만지면서 들일을 합니다. 오늘날에는 기계를 타면 밭갈이나 논갈이뿐 아니라 모내기에다가 가을걷이까지 척척 해 주지요. 아주 빨리 말끔하게 해 줍니다. 몇 만 평이나 몇 십만 평에 이르는 땅이라면 손으로 갈아엎어 일구고는 거름을 뿌려서 하나하나 씨앗을 심어 거두기 무척 어려우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기계를 부려 너른 땅을 갈고 엎고 심고 거두고 할 때에, 시골에서도 돈을 쏠쏠히 만질 만하다 여기리라 봅니다.


  돈을 벌 만한 농사라면 돈을 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돈을 버는 만큼 흙을 만지지 않고 흙내음을 모르며 흙빛을 못 읽습니다. 돈을 버는 길보다는 삶을 누리는 길을 걸어가는 흙일이라면 돈은 조금 만지거나 안 만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돈으로는 따질 수 없는 즐거움과 보람과 사랑과 꿈을 흙내음과 흙빛으로 맞아들입니다.


  두 다리로 걸어 들판으로 갑니다. 두 손을 움직여 흙과 풀을 만집니다. 두 다리로 걸어 들일을 하자면 신조차 번거롭습니다. 논밭에서는 아무도 구두나 운동신 안 뀁니다. 논밭에서는 누구나 고무신을 꿰는데, 고무신조차 성가시니 맨발이 됩니다.


  흙은 맨발로 찾아오는 흙지기를 반깁니다. 맨발은 흙을 곧바로 밟으며 느낄 적이 즐겁습니다. 맑게 흐르는 냇물을 장갑 낀 손으로 떠서 마실 사람은 없어요. 맨손으로 냇물을 느끼고 맨낯으로 냇물을 맞으며 마셔요.


  들바람과 숲바람을 맨몸으로 맞아들입니다. 들내음과 숲내음을 온몸으로 마십니다. 들에서 일하고 들에서 쉬며 들에서 밥을 얻고 들에서 바람과 해와 흙과 풀을 마주하는 사람은 언제나 튼튼합니다. ‘아프다’는 말을 모르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시골 흙지기 가운데 아픈 사람이 있어요. 왜 그러느냐 하면, 돈을 많이 벌거나 더 벌어야 하는 일이 생겨, 그만 너무 힘겹게 일을 하다 보니 몸이 삐끗거려 아픕니다. 날마다 즐겁게 먹고 즐거이 나누며 즐거운 웃음으로 노래를 부르는 삶이라면 아플 일 없이 한 해 내내 아름답습니다.


  우리들 부르는 모든 노래는 들에서 태어났습니다. 들에서 일하며 누구나 노래를 불렀어요. 들에서 거두거나 얻은 곡식이나 푸성귀나 열매를 손질하며 노래를 불렀어요. 모시풀에서 실을 얻으려고 하는 동안 노래를 부르고, 물레를 잣고 베틀을 밟으며 노래를 불렀어요. 길쌈을 하고 바느질을 하며 노래를 불렀습니다. 아이를 낳아 돌보고 재우고 놀리면서 노래를 부릅니다. 모를 내건 풀을 뽑건 나락을 베건 언제나 노래를 부릅니다.

 

 

 

 

 

 


  기계가 시골에 들어서면서 노래가 하루아침에 사라집니다. 경운기와 트랙터와 이앙기와 콤바인이 우렁찬 소리 내며 지나가는데, 사람 목소리는 잠겨서 안 들립니다. 기계가 들판을 누비는 동안 이웃 들에서도 노래를 못 부릅니다. 노래를 부를 만하지 않습니다.


  가을이 무르익어 논마다 누런 나락 거의 다 베는 즈음, 고흥 억새길을 걷습니다. 동백마을에서 고흥읍으로 군내버스를 타고 나옵니다. 군내버스를 내린 곳부터 천천히 걷습니다. 서문마을 쪽을 멀거니 바라봅니다. 조금씩 누렇게 물드는 느티나무 곁에 빨간 우체통 보입니다. 느티나무는 하루가 다르게 노란 빛 더하겠지요. 들판을 그득 채운 누런 물결은 사라져도 느티나무는 새삼스러운 노란 빛물결 베풀겠지요.


  대문 앞 조그마한 땅뙈기에 정갈하게 일구는 밭자락 만납니다. 어떤 손길로 이렇게 고운 살림 일굴까요. 어느 시골마을 시골집이나 이렇게 정갈한 손길로 예쁘게 밭자락 일구겠지요.


  서문마을에서 고개를 넘으니 행정마을이 멀리 보입니다. 행정마을 한쪽에는 새로 아파트를 올리려는지 무얼 하려는지 높다랗게 쇠울타리 세웠습니다. 도시는 사람들 너무 몰려 어쩔 수 없이 아파트를 세운다지만, 시골에 왜 아파트를 세워야 할까 잘 모르겠습니다. 시골이라면 마당이 있고 텃밭이 있으며, 마당 한켠에 나무 심어 알뜰히 누리는 살림일 때에 더없이 아름다울 텐데요.


  봄에 이어 가을에 다시 피는 민들레는 어느새 꽃이 지고 씨앗을 새로 날립니다. 행정마을 어귀는 우람하게 선 느티나무가 모든 길손과 마을사람을 맞이합니다. 참말 마을 어귀는 이렇게 우람한 나무가 있어야 듬직합니다. 우람하게 자란 나무는 여름 내내 시원한 바람으로 흙지기들 땀방울 식힙니다.

 

 

 

 

 


  시골마다 기계가 척척 들어서면서 볃가리 쌓는 일이 자취를 감춥니다. 앞으로 스무 해쯤 지나면 볃가리도 낟가리도 아무도 못 엮거나 못 쌓지 않으랴 싶습니다. 앞으로 마흔 해쯤 지나면 짚신도 새끼도 아무도 못 삼고 못 꼬리라 느낍니다.


  군내버스가 지나갑니다. 천천히 걷는 옆으로 군내버스가 부웅 바람을 날리며 지나갑니다. 저 버스를 타면 1200원으로, 또 1400원으로, 또 1500원이나 1700원으로 얼마든지 이웃마을로 갈 수 있습니다. 저 버스를 타고 8분이면 고흥읍 서문마을에서 두원면 두곡마을까지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굳이 천천히 들길을 걷습니다. 논도랑이나 논둑을 따라 피어나서 흔들리는 억새를 바라보며 시골길을 걷습니다.


  수덕마을 군내버스 타는 곳 앞에 섭니다. 수덕마을 앞 버스터에는 ‘수덕’이라는 이름이 없습니다. 비와 바람과 햇볕에 바래 글씨가 사라졌을까요. 처음부터 따로 글씨를 넣지 않았을까요. 이곳에 따로 글씨가 없더라도 군내버스 일꾼은 이곳이 수덕마을인 줄 다 알아요. 이곳에서 버스를 내리는 마을사람도 이곳이 수덕마을인 줄 모두 압니다.


  길가에 피는 꽃들 바라봅니다. 이 꽃들은 어떤 마음으로 이 가을에 하얗고 파란 꽃송이를 벌릴까요. 이 길을 지나다니는 사람들은 이 꽃들을 얼마나 알아보면서 ‘아이 곱구나’ 하고 말 한 마디 건넬까요.

 

 

 

 

 

 


  두원면 소재지로 가는 길하고 풍류 쪽으로 가는 길이 갈리는 자리에 섭니다. 이 길에 자동차는 아주 뜸하지만, 이 뜸한 자동차 가운데 웬만한 자동차는 두원면 소재지 쪽으로 달립니다. 풍류 쪽으로 가는 길에는 자동차 거의 드나들지 않습니다. 아주 조용합니다. 자동차 소리가 사라지니, 깊은 숲속부터 울려퍼지는 풀노래가 곱게 흐릅니다. 늦가을 한낮 햇살 곱게 받으면서 늦가을 풀벌레가 늦가을 풀노래 들려줍니다.


  풀노래는 버스에서도 못 듣습니다. 풀노래는 자가용이나 택시에서도 못 듣습니다. 자동차 엔진 소리가 커서 풀노래를 온통 밀칩니다. 자전거를 달리면? 자전거를 달리더라도 천천히 달려야 풀노래를 들어요. 싱싱 달리는 자전거라면 자동차와 똑같이 풀노래하고 멀어집니다.


  노르스름하게 물든 큼지막한 잎사귀 길에서 구릅니다. 문득 걸음을 멈추고 한참 들여다봅니다. 잎사귀야, 너는 어쩜 이렇게 고운 물을 듬뿍 들일 수 있었니. 어떤 뛰어난 화가 있어 너를 종이에 그릴 수 있을까. 어떤 빼어난 예술가 있어 너를 예술품으로 그릴 수 있을까. 화가와 예술가 있더라도 겨우 가을잎 한두 가지 그린다지만, 네가 있던 나무는 수천 수만 수십만 수백만 다 다른 잎빛을 가을마다 곱게 물들여 이렇게 내려놓는구나. 다 다른 잎사귀 가을잎빛을 어떤 화가와 예술가 있어 담아낼 수 있겠니.


  두곡마을과 지남마을로 갈리는 길목입니다. 두 마을 갈림길 한쪽에 조그마한 빗돌 섭니다. 빗돌에 새긴 글씨는 비바람에 많이 바랬습니다. 자동차를 타고 지나간다면 이 빗돌 못 알아보겠구나 싶습니다. 참말 지남마을에 갈 사람이 아니라면 이 빗돌을 알아보지 않겠지요. 아니, 지남마을에 갈 사람이라면 늘 아는 길이니 이 빗돌이 있건 없건 대수롭지 않겠지요.

 

 

 

 

 

 


  가을제비꽃을 만납니다. 민들레도 씀바귀도 고들빼기도 한 차례 나고 진 뒤, 새삼스럽게 다시 피는데, 제비꽃도 한 차례 진 지 꽤 되었는데 이렇게 가을맞이 새 꽃송이 틔웁니다.


  한쪽에서는 꽃송이 붉고, 다른 한쪽에서는 씨주머니 터집니다. 가을제비꽃 앞에서 오래도록 쪼그려앉아 꽃 구경을 하노라니, 군내버스 한 대 씽 하고 지나갑니다.


  이윽고 억새가 밭을 이루는 길이 나타납니다. 이 길 참 곱네 하고 느끼면서, 고흥사람은 고흥에서 고흥 들길 거닐면 고흥 억새밭 흐드러지게 누리겠다고 생각합니다. 도시사람은 비행기나 배를 타고 제주섬으로 억새 구경 가겠지요. 제주섬은 관광객 발길이 끝없습니다. 이와 달리 고흥에는 관광객 발길이 거의 없습니다. 관광객이라 할 도시사람이 이 멋진 억새밭길 구경하지 못한다 싶으니 아쉽다 싶으면서도, 고흥으로 관광객 찾아들지 않아, 아주 한갓지면서 느긋하게 이 길을 거닐 수 있구나 싶습니다. 시골 들판 억새밭길은 온통 시골마을 흙지기가 누리는 가을빛입니다.


  고갯마루 하나 지나니 금빛이라는 말로도 가리키기 어려운 샛노란 들빛이 폭 안깁니다. 거의 모든 논은 나락을 베었지만 늦게 심어 늦게 베는 논은 샛노란 들빛이 눈부십니다. 가을이 깊어 가면서 노란 들빛 또한 깊이 물듭니다. 살며시 떨어지는 저녁햇빛과 얽혀 마음속까지 후련하게 씻어 주는 샛노랑 물결입니다.


  붉나무 곁을 지나 두곡마을 어귀에 닿습니다. 지팡이 짚고 집으로 돌아가시는 할매 뒤를 따라 걷다가 안골 쪽으로 발길을 돌립니다. 두곡마을도 수돗물 놓는 공사를 한창 벌이는구나 싶습니다. 시멘트벽돌로 쌓은 낡은 담을 바라봅니다. 슬레트로 지붕을 이은 헛간을 바라봅니다. 시멘트담이 없던 때에는 따로 대문도 없었을 테니, 지붕을 받치는 기둥에 이름패가 붙습니다. 담 너머에서 이름패를 들여다봅니다. 더는 안 쓰는 빨래터와 우물자리를 바라봅니다. 어느 집 담벼락에 “뭉치자 일하자 잘 살아 보자”라는 글씨 페인트로 적혔습니다. 새마을운동을 한창 하던 때에 적은 글월이지 싶습니다.

 

 

 


  두곡마을 안골 깊숙한 데에서 지내는 이웃집에 닿습니다. 땀을 식히며 앞 멧자락 바라봅니다. 멧새들 노래하면서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저 나무에서 저저기 있는 나무로 옮겨 앉습니다.


  두곡마을 이웃집 뒤꼍 장독대에 가을풀 살짝 돋았습니다. 풀잎을 살살 쓰다듬습니다. 차츰 해가 기울며 다른 손님 하나둘 찾아옵니다. 모두들 짐차나 자가용을 타고 찾아옵니다. 멀거나 짧은 길 즐거이 마실하셨겠지요. 다른 분들도 다음에는 짐차며 자가용이며 내려놓고는 이 길을 걸어서 찾아오면 아름다운 가을빛 실컷 누리리라 생각합니다. 한 달 서른 날 자가용을 타더라도 하루쯤은 두 다리로 한두 시간 천천히 거닐 수 있기를 빌어요. 그래야 비로소 가을볕 샛노랗고 싱그럽게 드리우는 고흥 시골길 억새밭과 들내음 누릴 테니까요. 4346.11.2.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고흥 길타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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