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 있을 때에 책방 (4347.1.2.)
― 경남 진주 〈소소책방〉 010.9400.4334.
경남 진주시 동진로 54번지 2층
http://sosobook.co.kr
자그마한 책방에 책이 넘칩니다. 처음에는 책방 안쪽에만 책을 두었으나, 이내 책방 바깥쪽 계단으로 책이 뻗습니다. 책방이 깃든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한쪽은 책밭이 됩니다. 더운 여름에도 추운 겨울에도 계단짬 책들이 책손을 반깁니다.
책방 바깥쪽으로 책이 나와서 책손을 미리 반긴다면, 책방 안쪽은 책꽂이가 하나둘 늡니다. 새로 들여와서 갖추는 책을 놓으려면 책꽂이가 늘어야 합니다. 그리고, 사진책이 한꺼번에 잔뜩 들어왔습니다. 〈소소책방〉은 헌책방이면서 찻집 구실을 함께 합니다. 그리고, ‘사진책 도서관’ 구실까지 합니다. 책방지기는 틈틈이 이야기마당을 꾸립니다. 조그마한 책방 한 곳이지만, 이곳에서 흐르는 생각과 마음은 겹겹이 쌓입니다.
책이 있어야 책방이 되고, 책을 찾는 손길이 있어야 책방을 꾸립니다. 새로 나오는 책을 꾸준히 장만해서 즐겁게 읽는 사람이 있을 때에 새책방과 헌책방이 모두 힘껏 섭니다.
아무렴, 그렇습니다. 새로 나오는 책도 오래된 책도 꾸준히 사랑받을 적에, 책을 쓰는 사람과 엮는 사람 모두 새롭게 기운을 얻어요. 책을 사고파는 책방지기도 책을 사랑하는 손님이 있을 적에 날마다 새롭게 기운을 찾습니다.
영어로 된 그림책을 가만히 살펴봅니다. 《Richard Scarry-the busy world of Richard Scarry the treasure hunt》(Simon & Schuster,1994)는 리처드 스캐리 님 그림이 예쁘게 빛납니다. 요 몇 해 사이에 드디어 리처드 스캐리 님 그림책 몇 가지가 한국말로 나옵니다. 한국말로 된 이분 그림책을 여러 권 장만하기도 했지만, 꽤 예전부터 이분 그림책을 일본책으로든 영어책으로든 눈에 뜨이는 대로 장만했습니다. 꼬물꼬물 아기자기한 그림을 그리면서 이야기를 빚는 리처드 스캐리 님입니다.
《Molly Brett-Teddy flies away》(Medici society,1972)를 살피고, 《Josette Frank(엮음),Dagmar Wilson(그림)-poems to read to the very young》(Random house,1961)을 살피다가, 《Carol Thompson(글),Margaret A.Hartelius(그림)-Alphaboo! a hidden letter abc book》(Grosset & Dunlap,1994)을 살핍니다. 가볍고 조그마한 그림책이 싱그럽습니다. 《Vera B.Williams-a chair for my mother》(scholastic,1982)도 영어책이 한 권 보여 고릅니다. 한국에서 나온 베라 윌리엄스 님 그림책은 양장이지만, 오늘 만나는 책은 아주 가볍습니다.
새책방에는 없는 그림책인 《민정영(그림),김향수(글)-고마워 호두나무야》(재능교육,2010)를 봅니다. 펴낸곳을 보니, 이 그림책은 전집으로만 다루었거나 학습지를 받는 아이한테만 선물로 주었지 싶습니다. 그림책 《쿠마다 치카보/김석희 옮김-왕쇠똥구리와 신비한 벌레 이야기》(웅진주니어,2002)를 들여다봅니다. 이 그림책을 그린 분은 1911년에 태어났다고 하는데, “일흔 살이 지나자, 대상의 깊은 본질이 보이게 되었습니다(39쪽).” 하고 밝혀요. 일흔 살이 지난 뒤 비로소 들여다볼 수 있는 속살이란 무엇일까요. 예순 살이나 쉰 살에는, 또 여든 살이나 아흔 살에는 어떤 속살을 들여다볼 수 있을까요.
.. 당시 고등학교에는 군사 교련이라는 과목이 있어서, 교련 수업이 있는 날은 현역 장교가 학교에 와서 지도를 했습니다. 2학년 가을, 후지산 기슭의 들판에서 훈련이 있었습니다. 적진에 다가가 총에 칼을 꽂고 막 돌격하려는 순간, 나는 눈앞의 풀숲에 정신이 팔렸습니다. 가을이었기 때문에 귀뚜라미가 있었고, 개미와 먼지벌레도 바쁜 듯 걷고 있었습니다. 그 풀숲은 조용하고 평화로운데, 풀숲 밖에서는 한창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나는 이상한 기분이 들어서, 훈련 중인 것도 잊은 채 풀숲에 펼쳐진 벌레들의 세계에 눈을 못박았습니다 .. (38쪽)
한국은 아직 그림책 역사가 짧습니다. 한국에서는 아직 일흔 살 나이에 어린이 그림책을 그리는 분을 찾아보기 어려워요. 앞으로 스무 해나 서른 해쯤 지나면 일흔 살에도 어린이 그림책을 그리는 분이 나올 테고, 이분들은 한결 깊고 너른 눈길로 새로운 이야기를 엮으리라 생각해요.
《新堀邦司-金敎臣の信仰と抵抗》(新敎出版社,2004)은 일본에서 나온 책입니다. 김교신 님이 일제강점기에 어떠한 삶길을 걸었는지 들려주어요. 《가스똥 바슐라르/이가림 옮김-촛불의 미학》(문예출판사,1975)이라는 책을 봅니다. 스무 해쯤 앞서 읽은 적이 있는데 새삼스레 다시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손에 쥡니다.
.. 만약 당신의 정원의 튜울립을 당신의 책상 위에 가져온다면, 당신은 하나의 램프를 갖는 것이다. 붉은 한 송이의 튜울립, 다만 한 송이의 튜울립을 목이 긴 꽃병에 꽂아 보라. 그러면 그 꽃의 근처, 그 외로운 꽃의 고독 속에서 당신의 촛불의 몽상을 갖게 될 것이다 .. (109쪽)
뇌성마비라서 발가락으로 연필을 쥐어 시를 쓴다는 분이 내놓은 시집 《이흥렬-앉은뱅이꽃》(시어사,1991)을 들여다봅니다. 이분은 요즈음에도 꾸준하게 시를 쓴다고 합니다. 날마다 알알이 엮는 말빛은 아름다운 노래가 되어 찬찬히 흐를 테지요.
.. 아침마다 햇님은 / 아침상을 차리시는 / 어머니의 정성스런 모습 .. (헷님/86쪽)
이흥렬 님은 손수 밥상을 차린 적이 있을까 궁금합니다. 어쩌면 손수 밥상을 차리기 어려울 수 있고, 어쩌면 씩씩하게 손수 밥상을 차릴 수 있습니다. 다만, 이흥렬 님이 밥상을 마주하는 마음을 바라봅니다. 아침마다 해님이 찾아오고, 저녁마다 해님이 다시 찾아옵니다. 어머니 손길은 해님과 같아 아침저녁으로 이흥렬 님을 북돋웁니다. 어머니 손길은 해님처럼 아침저녁으로 이흥렬 님을 보듬습니다.
《오치 도요코(글),히라노 에리코(그림)/김창원 옮김-생활도감》(진선북스,2010)과 《사토우치 아이(글),후지에다 쓰우·사노 히로히코(그림)/김창원 옮김-원예도감》(진선북스,2010)과 《아리사와 시게오(글),쓰키모토 카요미(그림)/김창원 옮김-자유연구도감》(진선북스,2009)을 들여다보다가 《버스카 글리아/허문순 옮김-나를 찾기 위하여》(자유문학사,1987)라는 책을 집어들어 읽습니다.
.. 교육의 본질은 어떤 사람에게 지식을 주입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독특한 요소를 발견하고 개발하는 것을 도와주고, 그런 후에 여러분으로 하여금 다른 사람에게 그것을 줄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고 믿읍니다 … 여러분은 천재일 수도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작가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삼각함수에서 점수를 따지 못하면 대학에 입학할 수 없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돼야 합니까 … 하나의 개채로써 우리는 자기가 다른 사람을 닮는다는 것에 흡족해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그릇된 교육제도와 싸워야 합니다 … “보세요, 여기에 나무가 있어요.” 그러면 어린이들은 그 나무를 보고서는, “저것이 나무야? 저건 라리팝(꼬챙이에 낀 사탕)이지.” 그러나 그 여교사는 그게 나무라 했고 그림에 홀린 듯, “자아, 어서 나무를 그려요.”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녀가 말한 진정한 뜻은 ‘나무를 그리라’는 것이 아니고 ‘내가 그린 나무를 그리라’는 것입니다. 그녀의 말뜻이 무엇인가를 알아채어 그녀의 라리팝을 모사해서 그녀에게 건네주면 미술 점수는 ‘A’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 (21∼24쪽)
한국에서 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은 입시에 얽매입니다. 입시에 얽매이지 않고 삶을 아름답게 가르치거나 배울 수 있는 학교는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교과서라는 책은 입시만 다루고, 교사라는 어른은 입시 아닌 이야기를 들려줄 길이 없습니다. 아이들은 초등학교뿐 아니라 중·고등학교에서 마음과 몸이 무럭무럭 자라는 삶을 배울 수 없습니다. 머리에 지식을 넣는 만큼 몸을 실컷 움직이면서 삶을 익혀야 할 텐데, 중학교에만 들어서면 책상맡에서 떠날 수 없어요. 고등학교에 들어서면 밤늦도록 책상맡에서 교과서와 참고서만 파야 합니다. 학교에서뿐 아니라 집에서도 아이들은 교과서와 참고서에 들볶여야 합니다.
학교를 벗어나 집이나 동네에 있어도 아이들이 뛰놀 만한 데가 없습니다. 동네에 너른 쉼터나 숲이 없습니다. 자동차로 물결치는 도시에서는 아이들이 학원과 피시방 아니고는 갈 데가 없습니다. 시골에서도 아이들은 뒷산이나 바다나 냇가에 갈 틈을 내지 못합니다.
더욱이, 아이들뿐 아니라 어른들이 갈 곳도 없습니다. 아이들도 놀이터와 숲이 없지만, 어른들도 놀이터와 숲이 없어요. 다만, 어른들은 돈을 쓰면서 쉬는 찻집이나 밥집이나 술집이 있습니다. 도시에서도 시골에서도 아이와 어른 모두 느긋하게 쉬거나 어울릴 터전이 없습니다. 그저 학교와 회사와 공장만 있습니다. 어린이와 푸름이일 적에는 학교에서 맴돌아야 하고, 어른일 적에는 회사나 공장에서 맴돌아야 합니다.
.. ‘사랑이 깊은 사람’은 자기가 개성있게 된 것으로만은 흡족해 하지 않고 개성을 보다 발전시키고 유지하기 위하여서 노력합니다 … 세계의 3분의 2가 유럽을 제외한 다른 지역입니다. 그들은 우리와 다른 생각을 하고, 느끼며, 이해합니다. 서구의 환경을 탈피해서 예수의 존재조차도 알지 못하는 지역으로 가게 되면 여러분은 자신에 대해, 인간 관계에 대해 보다 많은 것을 배우게 됩니다. 서구의 문화가 무엇을 생각하며, 행동하며 어떤 것을 느끼는가를 전혀 모르는 지역도 있읍니다. 그리고 이곳 사람들과 우리가 만나면 갈등을 겪게 되는데, 그들의 언어가 우리와 틀리고 그들의 감각이 우리와는 상이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이런 불편을 수반하는 데도 불구하고 이들 나라를 여행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 다른 사람에게 내가 필요하다는 사실이 얼마나 멋진 일입니까?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당신과 함께 생활하는 것이 즐거워요’라고 말하는 것도 얼마나 멋있는 일입니까 .. (25, 27, 28쪽)
레오 버스카글리아 님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담은 책은 꽤 묵었습니다. 그렇지만 이 묵은 책에 깃든 이야기는 아직 달라질 낌새가 없습니다. 왜 안 달라질까요. 아니, 우리는 왜 안 바꾸려 할까요. 우리는 왜 대통령을 바꾸지 못하고, 시장이나 군수를 바꾸지 못할까요. 우리는 왜 교장과 교사를 바꾸지 못하고, 학교와 동네와 사회와 문화를 바꾸지 못할까요.
이대로 나아가는 삶이 재미있을는지요. 오늘 이대로 지내는 삶이 즐거울는지요. 돈을 벌려고 애를 쓰지만 돈이 안 잡힙니다. 평화를 누리겠다면서 전쟁무기와 군대에 어마어마한 돈을 쏟아붓지만 사회와 나라는 평화롭지 않습니다. 공무원이 아주 많지만 공무원이 여느 사람들한테 몸을 바치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4대강사업을 한다며 엄청난 돈을 들이부었지만 이 나라 숲과 내와 들은 자꾸 망가집니다.
만화책 《강경옥-스타가 되고 싶어?》(댕기네책들) 1권(1992)과 2권(1993)을 봅니다. 만화책을 넘기면서 머리를 쉽니다. 1990년대 첫무렵에 나온 만화책에 붙은 이름처럼, 오늘날 사회에서는 저마다 ‘별’이 되고픈지 모릅니다. 다 함께 별이 되려는 길이 아니라 혼자 쇠밥그릇을 붙잡으면서 별이 되고픈지 모릅니다.
자그마한 책방에서 묵은 책을 만지작거리며 생각합니다. 삶을 배우고 사랑을 배우며 꿈을 배울 수 있을 때에 학교라고 생각합니다. 삶과 사랑과 꿈이 없으면 학교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자그마한 책방에 깃든 책을 들여다보며 생각합니다. 삶을 가꾸고 사랑을 가꾸며 꿈을 가꿀 수 있을 때에 나라요 마을이며 보금자리라고 생각합니다. 삶과 사랑과 꿈을 가꿀 수 없으면, 나라도 마을도 보금자리도 덧없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삶과 사랑과 꿈이 없으면 아무것도 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책이 있기에 책방입니다. 책이 없으면 책방이 아닙니다. 삶이 있고 사랑과 꿈이 함께 있기에 학교입니다. 삶과 사랑과 꿈이 없으면 학교가 아닙니다. 이 나라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그리고, 이 나라에는 무엇이 없을까요. 4347.11.26.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헌책방 나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