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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넋·삶 13 바라보기·보기



  바라볼 때에 무엇이든 이루어집니다. 바라보지 않을 때에는 무엇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바라보기에 내 앞에 무엇이든 있고, 바라보지 않을 때에는 내 앞에 무엇도 없습니다.


  우리 눈은 ‘몸에 달린 눈’만 있지 않습니다. ‘몸에 달린 눈’은 지구라는 별에 사는 이 몸에 맞게 있는 눈입니다. 우리는 이웃이나 동무와 사귈 적에 ‘몸으로 사귈’ 수도 있으나, ‘몸이 아닌 마음’으로 사귈 때에 참다운 이웃이나 동무라고 말합니다. 아무렴, 그렇겠지요. 겉모습으로 사귈 때에는 ‘겉사귐’입니다. 마음으로 사귈 때에 비로소 ‘속사귐’이면서 ‘참사귐’입니다. 이웃이나 동무라는 이름을 붙일 만한 다른 사람은, 서로 마음을 나누면서 함께 지내는 사이입니다.


  사람과 사람으로서 마음으로 사귄다고 한다면, 우리한테는 ‘몸에 달린 눈’ 말고 다른 눈도 있다는 뜻입니다. 어떤 눈일까요? 바로 ‘마음으로 보는 눈’입니다. 마음으로 보는 눈은, 내 이웃과 동무가 어떤 마음인지 읽는 눈입니다.


  왜 우리한테는 ‘마음으로 보는 눈’이 있을까요? 우리 몸뚱이는 ‘몸에 걸치는 옷’처럼 ‘넋이 깃들 수 있는 옷’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몸을 움직이는 기운은 바로 넋한테서 비롯합니다. 넋이 생각을 지어서 마음에 심으면, 마음에서 새로운 기운이 솟아서 몸이 움직입니다. 이를 제대로 바라볼 수 있다면, 나는 ‘한 사람’으로 오롯이 섭니다.


  ‘보다’는 “눈을 뜰 적에 눈으로 들어오는 모습을 헤아려서 알다”를 가리킵니다. ‘바라보다’는 “눈을 떠서 내 앞에 있는 것을 내 마음에 따라 헤아려서 알다”를 가리킵니다.


  우리는 누구나 처음에는 그냥 ‘봅’니다. 처음에는 그냥 눈을 뜨니까요. 처음에는 그냥 눈을 떠서 이것저것 두루 봅니다. 그저 봅니다. 그저 보다가 비로소 생각을 처음으로 합니다. ‘아, 나는 무엇을 볼까? 이 많은 것 가운데 내가 보려고 하는 모습은 무엇일까?’ 하고 생각합니다. 이때부터 나는 스스로 ‘삶짓기(현실 창조)’로 나아갑니다. 그저 내 눈으로 들어오는 모든 모습을 ‘쳐다보기’만 하겠는지, 이 모습을 내가 바라는 대로 마주하면서 새롭게 짓는 ‘바라보기’를 하려는지 곰곰이 생각합니다.


  곰곰이 생각한 끝에 어떤 길로 가겠노라 하고 다짐을 합니다. 생각을 맺으면 씨앗이 나옵니다. 풀과 나무가 봄과 여름을 지나 가을에 열매와 씨앗을 맺듯이, 사람도 생각을 맺으면 씨앗이 나오고, 이 씨앗을 바람(숨결)에 얹어 마음에 심으면, 이제 내 둘레가 차츰 달라집니다. ‘보기’에서 ‘바라보기’로 나아갑니다.


  한자말 몇 가지를 살펴봅니다. 먼저, ‘관찰(觀察)’은 “사물이나 현상을 주의하여 자세히 살펴봄”을 뜻한다 합니다. ‘관찰 = 주의하여 살펴봄’입니다. ‘자세(仔細)히’는 ‘낱낱이’를 가리킵니다. 한국말 ‘살펴보다’는 “낱낱이 보다”를 뜻합니다. 그래서, 한국말사전에서 풀이하는 “자세히 살펴보다”는 겹말입니다. 잘못된 풀이입니다. 이 같은 잘못된 말풀이를 깨닫는 국어학자가 없어서 아직도 한국말사전은 엉터리이고, 이런 엉터리 한국말사전을 살펴보는 사람도 제대로 말을 바라보지 못합니다.


  ‘주의(注意)’는 “1. 마음에 새겨 두고 조심함 2. 어떤 한 곳이나 일에 관심을 집중하여 기울임”을 뜻한다 합니다. ‘주의 = 마음을 기울임’입니다.


  ‘조심(操心)’은 “잘못이나 실수가 없도록 말이나 행동에 마음을 씀”을 뜻한다 하고, ‘집중(集中)’은 “1. 한곳을 중심으로 하여 모임 2. 한 가지 일에 모든 힘을 쏟아부음”을 뜻한다 해요. 그러니, ‘조심 = 마음을 씀’이요, ‘집중 = 마음을 모음’입니다. ‘주의·조심·집중’은 뜻이 조금씩 다르니, 다 다르게 써도 되는데, 한국말로는 “마음을 기울이다·마음을 쓰다·마음을 모으다”인 줄 알면 됩니다.


  우리는 한국말로 생각하면서 보는 몸짓을 거의 못 익힌 채 어른이 됩니다. 학교와 사회에서는 한국말을 안 가르치거나 못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느 어른이라면 ‘관찰·주의·조심·집중’ 같은 한자말을 익히 쓸 텐데, 이런 한자말을 쓰든 말든, 말뜻을 제대로 알고 써야 합니다. 말뜻을 제대로 모르는 채 이러한 한자말을 쓰면, 그만 스스로 말길이 막혀서 마음길을 열지 못합니다.


  ‘바라보기’를 할 수 있을 때에 ‘살펴보기’를 합니다. 나 스스로 마음을 모아서 하나를 똑똑히 마주할 수 있을 때에 둘레를 두루 볼(살펴보기) 수 있습니다. 둘레를 두루 볼 수 있으면, 이제 ‘올려다보기·내려다보기·둘러보기·되돌아보기·돌아보기·뒤돌아보기·톺아보기’ 같은 여러 가지 ‘보기’를 할 수 있습니다.


  하면서 보아야 됩니다(해 봐 돼). 하면서 보지 않으면 되지 않습니다. ‘바라보기’란 사람이 사람으로 서는 길에서 맨 먼저 하는 일입니다. 밥을 차리려 하든, 나들이를 나서려 하든, 사랑을 꽃 피우려 하든, 씨앗을 심으려 하든, 옷을 입으려 하든, 내가 나를 바라보아야 실마리를 엽니다. 4348.2.4.물.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람타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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