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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넋·삶 24 하나 둘 셋



  한국사람은 ‘셋’이라는 숫자를 무척 아낍니다. 둘이나 넷이나 하나가 아닌 ‘셋’을 그야말로 섬깁니다. ‘셋’이라는 숫자를 쓰자면, ‘하나’와 ‘둘’이 앞서 있어야 합니다. 그러니, ‘셋’이라는 숫자를 사랑하는 한국사람은 ‘셋’만 외따로 쓰지 않습니다. ‘하나·둘·셋’을 나란히 씁니다.


  ‘하나·둘·셋’은 ‘처음·가운데·끝’입니다. ‘하나·둘·셋’은 ‘어제·오늘·모레’입니다. ‘하나·둘·셋’은 ‘너·나·우리’입니다. ‘하나·둘·셋’은 ‘이곳(여기)·저곳(저기)·그곳(거기)’입니다. ‘하나·둘·셋’은 ‘아이·철들기·어른’입니다. 이리하여, ‘하나·둘·셋’은 ‘삶·바람(숨결)·죽음’입니다. 그리고, ‘하나·둘·셋’은 ‘어둠·해님(별님)·빛’입니다. 그예 ‘하나·둘·셋’은 ‘씨앗·나무(풀)·열매’이지요.


  모든 것은 두 갈래로 짝을 이룹니다. ‘짝꿍’이요 ‘짝지’입니다. 그런데, 두 갈래로 짝을 이루는 것은 모두 사이에 ‘보이지 않으면서 보이는 것’이 있습니다. 얼핏 보자면 ‘둘’이지만, 찬찬히 헤아리면 언제나 ‘셋’입니다. 이를테면 삶과 죽음이라는 두 갈래로 우리 길을 나눈다 할 테지만, ‘삶·죽음’ 둘로만 바라볼 수 없습니다. 삶과 죽음 사이에는 언제나 바람(숨결)이 함께 있기 때문입니다. 어둠과 빛도 이와 같아요. 어둠과 빛 두 가지만 있지 않습니다. 어둠과 빛 사이에는 늘 ‘해님(별님)’이 나란히 있습니다.


  하나와 둘과 셋이라는 얼거리로 나아가는 삶이기에, 우리는 언제나 ‘하다(하나)’와 ‘보다(둘)’와 ‘되다(셋)’라는 세 가지 낱말을 씁니다. 한국말에서는 이 세 낱말이 어느 곳에서나 반드시 깃드는, 가장 자주 쓰는 낱말입니다. 세 낱말이 없으면 한국말을 할 수 없습니다. 반드시 세 낱말이 있어야 모든 한국말이 태어납니다.


  사내와 가시내, 또는 가시내와 사내가 만나서 두 씨앗이 만날 적에 새로운 목숨이 태어납니다. 한 사람과 다른 한 사람이 어우러져야 새로운 한 사람이 태어납니다. 얼핏 보면 ‘사내와 가시내’ 또는 ‘가시내와 사내’ 두 짝이지만, 이 사이에는 늘 ‘둘이 만나도록 잇는 숨결(바람)’이 있어야 합니다. 두 씨앗이 만나자면 ‘사랑’이라는 숨결이 있어야 하고, ‘사랑’이라고 하는 숨결은 이윽고 ‘아기’라는 ‘새사람’으로 거듭납니다. ‘두결(양자)’은 하나와 다른 하나만 있다고 해서 움직이지 않습니다. 두결을 바라보는 님(관찰자)이 있어야 움직입니다만, 두결을 바라보는 님이 생각을 심어서 씨앗으로 날릴 ‘바람(숨결)’이 반드시 함께 있어야 합니다. 느끼지 못하면서 느껴야 하는 한 가지가 늘 언제 어디에서나 함께 있기에 비로소 ‘두 가지 결’은 ‘새로운 결’로 다시 태어날 수 있습니다.


  아침과 낮과 저녁입니다. 한국사람은 예부터 늘 ‘아침·낮·저녁’으로 하루를 갈랐습니다. 세 때 사이나 앞뒤로 ‘새벽·밤’이 들어가기도 하지만, 하루를 가르는 세 때는 ‘아침·낮·저녁’입니다. 이 또한 ‘하나·둘·셋’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재미있는 대목이 있으니, 한국사람한테 ‘밥때’는 ‘아침·저녁’ 두 가지일 뿐입니다. 일을 하든 놀이를 하든 무엇을 하든 ‘아침저녁으로’ 한다고 말합니다. ‘아침 = 아침밥’이기도 하고, ‘저녁 = 저녁밥’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낮 = 낮밥’이 되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셋’과 ‘두결(양자)’이 서로 얽히는 수수께끼이자 실마리입니다.


  두결은 늘 두결이지만, 두결을 이루는 셋이라는 얼거리입니다. 그리고, 셋이라고 하는 얼거리는 언제나 셋이지만, ‘바람 타고 찾아온 씨앗(삶)’을 받으면 셋은 언제나 둘로 바뀝니다(삶짓기를 이룹니다). 4348.2.21.흙.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람타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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