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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넋·삶 28 ‘풀잎빛’과 ‘나뭇잎빛’



  시골에서 흙을 만지면서 살던 사람은 언제나 ‘흙’을 보았고, ‘흙’을 생각했으며, ‘흙’을 먹었습니다. 그러나, 시골에서 살지 않고 흙을 만지지 않는 사람은, 도시에서 으레 ‘토양(土壤)’을 말합니다. 시골에서 풀을 밟으면서 살던 사람은 언제나 ‘풀’을 보았고, ‘풀’을 생각했으며, ‘풀’을 먹었습니다. 그러나, 시골에서 살지 않고 풀을 밟지 않는 사람은, 도시에서 흔히 ‘잡초(雜草)’나 ‘화초(花草)’를 말합니다.


  이리하여, 예부터 이 땅에서 삶을 지으며 조용히 살림을 가꾸고 아이를 낳아 사랑으로 돌본 사람은 홀가분하게 ‘흙내음·흙빛·흙집’을 말하고 바라보며 돌보면서 ‘풀내음·풀빛·풀밥’을 말하고 바라보면서 돌봅니다. 이와 달리, 이 땅에서 살기는 하되 손수 삶을 짓지 않거나 도시에서 정치나 사회나 경제나 문화나 문학이나 과학이나 철학이나 종교를 다루는 사람은 ‘농업(農業)’을 말하는 한편, ‘초록(草綠)’과 ‘녹색(綠色)’을 말합니다.


  숲에서 살아온 사람들이 쓰는 ‘숲말’은 ‘풀빛’입니다. 숲말을 쓰던 이 나라 한겨레는 한국사람이니, 한국말도 ‘풀빛’입니다. 정치와 경제와 문화와 교육 모두 중국을 섬기면서 중국에서 받아들인 중국말은 ‘초록’이고, 일제강점기부터 일본 제국주의에 다가서며 떡고물을 챙기다가 일본을 거쳐 서양 학문을 받아들인 지식인이 쓰는 일본말은 ‘녹색’이며, 해방 뒤 미국을 앞세운 서양 문화에 온마음을 사로잡힌 사람들이 쓰는 영어는 ‘그린(green)’입니다.


  곰곰이 살피면, 한국사람은 자그마치 네 가지 말을 씁니다. 한국말(숲말) ‘풀빛’을 비롯해서, 중국말 ‘초록’과 일본말 ‘녹색’과 영어 ‘그린’을 함께 써요. 하나를 가리키는 낱말이 ‘네 나라 말’로 네 가지 있습니다.


  우리가 ‘풀빛’이라고 하면, 이 풀빛은 “풀잎 빛깔”입니다. 풀잎 빛깔 가운데 “여름에 보는 풀잎 빛깔”이라고 할 만합니다. 여름에는 풀잎 빛깔이 거의 그대로 있어요. 잣대나 표준으로 삼는 ‘풀빛’은 수많은 풀잎 빛깔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리하여, ‘풀빛’ 하나만 놓고 보더라도, ‘봄풀빛·여름풀빛·가을풀빛·겨울풀빛’이 다 다릅니다. 봄에는 갓 돋은 보들보들 여리면서 옅은 빛깔입니다. 여름에는 짙푸른 빛깔입니다. 가을에는 살그마니 누렇게 바래는 빛깔입니다. 겨울에는 샛노랗거나 싯누렇게 바래어 시든 빛깔입니다.


  봄에도 갓 돋은 싹이라면 ‘싹빛’이나 ‘풀싹빛’입니다. 그리고, 풀마다 빛깔이 다 다르니, ‘민들레잎빛’과 ‘씀바귀잎빛’과 ‘봄까지꽃잎빛’과 ‘별꽃나물잎빛’과 ‘돌나물잎빛’과 ‘갓잎빛’과 ‘배춧잎빛’과 ‘당근잎빛’처럼 다 다른 풀빛을 헤아릴 수 있어요. 이러한 풀잎빛도 철마다 다르니, ‘봄민들레잎빛’과 ‘여름민들레잎빛’처럼 갈라서 쓸 수 있지요.


  나뭇잎 빛깔도 ‘풀빛’으로 아울러서 가리킵니다. 그러나, 나뭇잎은 나무에 달린 잎사귀 빛깔인 만큼, 따로 ‘나뭇잎빛’처럼 쓸 수 있어요.


 풀빛 = 풀잎빛 + 나뭇잎빛


  다시 말하자면, ‘풀빛 → ㄱ. 풀잎빛 ㄴ. 나뭇잎빛’처럼 풀빛을 두 갈래로 나눌 수 있습니다. 나뭇잎빛도 ‘봄나뭇잎빛·여름나뭇잎빛·가을나뭇잎빛·겨울나뭇잎’으로 더 나눌 수 있어요.


  모든 풀잎빛과 나뭇잎빛을 아울러서 ‘풀빛’이라 합니다. 그러니까, 바탕말이 되는 ‘풀빛’을 곰곰이 들여다보면서 넓고 깊게 살피면, 끝없이 펼쳐지는 수많은 풀빛을 헤아릴 수 있습니다. 풀빛은 그저 한 가지 풀빛이 아니라, 수없이 많은 풀빛이 잇달아 우리 곁으로 스며드는구나 하고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온갖 풀빛을 맞아들이려 한다면, 우리 스스로 숲말(한국말)을 제대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풀잎 빛깔이기에 풀빛인데, 이 낱말을 그대로 쓰지 못하고 ‘초록(중국말)’이나 ‘녹색(일본말)’이나 ‘그린(영어)’ 같은 낱말을 함부로 섞어서 쓰면, 생각날개를 조금도 못 펼칩니다. 한국사람답게 한국말을 슬기롭게 바라보면서 헤아릴 때에 비로소 온갖 풀빛이 마음껏 나래치면서 퍼집니다.


  하나 더 헤아린다면, 풀 가운데 사람이 먹는 풀은 따로 ‘푸성귀·남새·나물’로 나누기도 합니다. 사람이 손수 심는 ‘남새’라는 풀은 ‘남새빛’이 되고, 들과 숲에서 스스로 씨앗을 퍼뜨려서 돋는 ‘나물’이라는 풀은 ‘나물빛’이 되며, 남새와 나물을 아우르는 ‘푸성귀’라는 풀은 ‘푸성귀빛’이 되어요. 게다가 들나물은 ‘들나물빛’이고 멧나물은 ‘멧나물빛’입니다. 봄나물은 ‘봄나물빛’이 되고, 겨울나물은 ‘겨울나물빛’이 될 테지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풀과 나무가 우거진 곳을 가리키는 ‘숲’을 바라보면서 ‘숲빛’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숲말을 쓰는 우리들은 숲빛을 바라봅니다. ‘봄숲빛’을 바라보고, ‘여름숲빛’을 바라보지요. 수많은 푸른 빛깔을 얼싸안을 수 있을 때에, 내 몸과 마음은 푸르게 흐르는 바람이 됩니다. 4348.2.24.불.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람타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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