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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 책사랑 도란도란
54. 책을 안 읽으면 안 되나


  우리는 누구나 ‘읽을 책’을 읽습니다. ‘읽을 책’을 읽기에, 안 읽을 만한 책이 따로 있지 않고, 더 읽을 만한 책이 따로 있지 않습니다. 더 좋은 책이나 더 나쁜 책은 따로 없습니다. 어느 책을 손에 쥐든, 이 모든 책은 우리한테 ‘읽을 책’이 됩니다.

  학교를 다니는 동안 교과서는 ‘내 읽을 책’이 됩니다. 학교에서는 교과서를 읽지 않으면 안 되니까요. 학교를 마치면 교과서는 이제 ‘내 읽을 책’에서 벗어납니다. 학교를 마친 뒤에도 교과서를 읽는 사람은 없어요. 대학생이 되어 중·고등학생한테 과외를 하는 부업을 하지 않는다면, 중·고등학교를 다니며 읽어야 하던 교과서를 다시 펼치는 사람은 없으리라 봅니다.

  대학교에 들어가면, 대학 교재가 ‘내가 읽을 책’이 됩니다. 영어 시험을 치러야 한다면 영어 교재가 ‘내가 신나게 읽을 책’이 됩니다. 제법 나이가 들어 시집이나 장가를 가서 아이를 낳으려 한다면, 아마 이즈음부터 ‘새롭게 읽을 책’이 눈에 뜨이리라 생각해요. 아기를 어떻게 맞이하고, 어떻게 돌보며, 어떻게 키우는가 하는 이야기가 깃든 책을 눈을 밝히면서 찾아 읽겠지요.


 오래된 꿈과 비밀을 간직한 부드러운 사람이고 싶어
 부드러움은
 망가진 것을 소생시킬 마지막 에너지라 믿어
 밥, 사랑, 아이 …… 부드러운 언어만으로도 눈부시다
 삶이라는 물병이 단단해 보여도
 금세 자루같이 늘어지고 얼마나 쉽게 뭉개지는지
 그래서 위험해 그래서 흥미진진하지
 〈해질녘에 아픈 사람-세월아, 너도 아프냐 나도 아프다 나를 더 아프게 해라〉


  신현림이라는 분이 있습니다. 시를 쓰고 사진을 찍으면서 딸아이와 삶을 누리는 ‘아주머니’입니다. 이 아주머니는 《해질녘에 아픈 사람》(민음사,2004)이라는 시집을 낸 적 있습니다. 짝님을 만나서 아이를 낳지만, 막상 짝님하고 헤어져야 하면서 아이를 혼자 돌보는 길로 나아가야 하는 삶자락에서 써서 내놓은 시집입니다.

  아주머니 시인이자 아주머니 사진가라 할 텐데, 이 아주머니는 어떤 마음이 되어 시를 썼을까 하고 헤아려 봅니다. 이 아주머니가 아기를 뱃속에 품으면서 쓴 시는 누구보다 아주머니 스스로한테 어떤 이야기가 되어 흐를는지 생각해 봅니다. 시인 아주머니가 시집을 선보인 지 제법 되었기에, 시인 아주머니가 낳은 딸아이는 제법 자랐습니다. 이 딸아이는 혼자서 책을 읽을 수 있으니 제 어머니가 저를 막 낳으려던 즈음 어떤 삶을 보내야 했는지를 이 시집을 읽으면서 살필 수 있습니다.


 토마투 주스를 마시고 저는 토마토가 되었습니다
 거친 시계 소리 들으며 제 머리는 시계가 되었고요
 바람 부는 마당에
 당신은 하얀 빨래가 되어 흩날립니다
 〈당신도 꿈에서 살지 않나요?〉


  책은 읽어도 되고, 안 읽어도 됩니다. 내 마음은 네가 읽어 주어도 되고, 안 읽어 주어도 됩니다. 나 또한, 네 마음을 읽어 보아도 되고, 안 읽어 보아도 됩니다. 시인 아주머니가 짝님과 헤어지고 홀로 씩씩하게 아기를 낳으며 삶을 새롭게 지으려고 하던 이야기를, 이 아주머니가 낳은 딸아이는 일부러 찾아서 읽어도 되고 안 읽어도 돼요.

  아름다운 책이 한 권 있을 적에, 우리는 이 책을 얼마든지 읽어도 되고 안 읽어도 됩니다. 사랑스러운 이야기가 한 꾸러미 있을 적에, 우리는 이 이야기를 얼마든지 들어도 되고 안 들어도 됩니다. 나는 내 동무가 털어놓는 이야기를 귀여겨들어도 될 뿐 아니라, 그냥 귀를 막거나 한귀로 흘려도 됩니다.


 세상의 남자들, 당신들은 잘 모를 거야
 깊이 생각하지 않았을 거야
 모든 어머니의 유적지인 부엌을
 바람 부는 밥상 일구는 노동과 피로를
 〈부엌〉


  어떻게 할까요? 어떻게 할 때에 삶이 즐거울까요? 내가 너와 동무라면, 나는 네 마음을 안 읽을 때에 즐거울까요, 네 마음을 읽을 때에 즐거울까요? 네가 나와 이웃이라면, 너는 내 마음을 안 읽을 때에 즐거울까요, 내 마음을 읽을 때에 즐거울까요? 어머니와 아이 사이에서, 또 아버지와 아이 사이에서, 그리고 아이와 어버이 사이에서, 우리는 서로서로 마음을 읽을 수 있지만 마음을 안 읽을 수 있습니다. 서로서로 마음을 활짝 열 수 있으며, 서로서로 그야말로 마음을 굳게 닫아걸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하고 싶은가요? 어떻게 할 때에 사랑스러운 하루가 될까요?

  책읽기는 남이 억지로 시켜서 할 수 없습니다. 영화를 보거나 노래를 들을 적에도 남이 억지로 시켜서 할 수 없습니다. 학교나 학원을 다니는 일도 남이 시켜서 할 수 없습니다. 언제나 내가 스스로 마음을 움직여서 합니다. 언제 어디에서나 내가 씩씩하게 마음을 기울여서 합니다.

  책을 안 읽는다고 해서 삶이나 사랑이나 마음을 못 읽지 않습니다. 책을 많이 읽는다고 해서 삶이나 사랑이나 마음을 잘 읽지 않습니다. 그러니, 곰곰이 생각을 기울여요. 즐거움이 무엇이고 기쁨이 무엇인지 차분하게 생각해 보아요. 내가 당차게 걸어갈 길을 생각하면서, ‘내가 읽을 삶’이 무엇이고 어디에 있는지 생각해요. 내 곁에 누가 있는지 생각하고, 나는 어떤 동무와 이웃이 되어 이곳에 있는지 생각해요. 4348.4.3.쇠.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청소년과 책읽기)



해질녘에 아픈 사람

신현림 저
민음사 | 2004년 0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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