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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중이나 상류계층으로 그 수요가 한정되었던 책거리가 민간으로 확산되면서 민화 책거리가 발달하게 되었다. 궁중 책거리의 잔영이 남아 있는 작품도 있지만, 우선 대형 병풍으로 제작되던 궁중 및 상류계층의 책거리는 민간의 주거공간에 맞게 키가 작은 병풍 그림으로 바뀌었다. 이에 따라 서가가 있는 책거리보다 서가가 없는 책거리를 선호하게 되었고, 그것도 위아래로 펼쳐놓은 책거리보다는 콤팩트하게 밀착된 책거리가 유행하게 되었다. 그림의 소재도 민간의 취향에 따라 변했다. 중국의 도자기와 청동기가 조선의 도자기와 가구로 바뀐 경우가 많고, 학문보다는 출세를 비롯한 기복적인 상징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

 

책거리 시렁의 칸이 다른 칸과 연결되기보다는 각기 독자적으로 표현되었고, 각 칸에는 병풍을 배경으로 책, 청동기, 문방구, 과일과 채소 등이 배치되어 있다. 궁중 책가도를 본떴으나 민화식으로 새롭게 재구성한 민화 책가도로서, 적색의 색조가 독특하게 느껴진다. 19세기, 종이에 채색, 112.8×72.1cm, 삼성미술관 리움.

 

선문대학교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책거리에서는 책보다 채소··기물·과일의 비중이 더 크다. 책이 중심인지 아니면 주전자나 가지가 중심인지 아리송할 정도로 후자의 비중이 높아졌다. 여기에 등장한 채소와 꽃은 다산(가지·매화), 부귀(모란) 등을 상징하는 길상문들이다. 결국 이 책거리는 무엇보다도 복을 비는 소망이 더 간절하다. 책조차 학문에 대한 열정보다는 출세에 대한 바람으로 가득 있는 듯하다.

 

책거리 화사한 꽃과 기물들로 장식된 책거리이지만, 그 속에는 행복을 염원하는 소망이 깃들어 있다. 19세기, 종이에 채색, 62.9×33.1cm, 선문대학교박물관.

 

책거리의 자유자재한 변신은 에로틱한 책거리에서 절정을 이룬다. 파리 국립기메동양박물관에 소장된 책거리에는 옷가지와 문방구 등의 생활용품들이 어지러이 놓여 있고, 책은 뒷전으로 물러나 있다. 사선 방향으로 가파르게 놓인 평상 위에는 요와 이불 등의 침구, 그리고 그 위에는 흐트러진 여인의 옷가지들이 던져져 있다. 방금 벗어던졌는지 옷자락에는 동감(動感)의 여운이 남아 있다. 그런데 무엇이 그리 급했는지 옷을 재는 자와 가위가 흐트러져 있고 신발도 가지런하지 않다. 이것들은 여인이 사용하는 생활용구다.

 

반면에 책거리의 가장 중요한 소재인 책들은 평상 뒤편으로 물러나 있고, 그 옆에는 촛불이 꺼져 있다. 공부는 뒷전이다. 앞에는 여성의 젖가슴 같은 연적과 벼루와 먹, 그리고 편지가 이리저리 놓여 있다. 이것들은 선비가 애용하는 문방사우다. 여인의 생활용구와 선비의 문방사우가 어지러이 만나고 있다. 이쯤 이야기가 진행되면, 화면에 보이지 않는 공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어렴풋이 짐작이 갈 것이다. 놀라게도 책거리 속에 에로티시즘이 암시되어 있다.

 

책거리 평상 주변에 널려 있는 흐트러진 옷가지와 정리되지 않은 문방구가 배경에 반듯하게 정리된 책들과 대조를 이루고 있다. 이처럼 흐트러진 책거리는 민화에서만 가능한 파격이다. 19세기, 종이에 채색, 63.5×34.5cm, 파리 국립기메동양박물관.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책가도 병풍에서 책으로만 가득 찬 모습, 이형록의 책거리에서 볼 수 있는 섬세함과 중후함은 어느새 온데간데없다. 틀에 박힌 반듯함보다는 자유로움을 추구했고, 학문보다는 길상적인 염원과 생활의 정감을 내세웠다. 단지 서가의 틀만 없앴을 뿐인데, 민화 책거리에서는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본래의 의미마저 위협받을 지경이다. 틀에 박힌 책거리에서 흐트러진 책거리로의 변신은 민화의 거스를 수 없는 대세다. 이뿐만 아니라 책과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소재가 등장했다. 심지어 노름의 도구를 그린 책거리, 에로틱한 책거리 등 기상천외한 그림까지 그려졌다.

 

책거리는 학문을 중시하는 조선의 유교문화가 낳은 산물이다. 정조는 책거리를 어좌 뒤에 설치하고 직접 그 의미를 신하들에게 설명할 정도로 애착을 가졌다. 그는 책거리를 통해 청나라 패관잡문 투의 문체를 지양하고 정통 고전의 문체로 돌아가기 위해 화원들에게 그림으로 제작케 한 것이다. 초창기 경사자집(經史子集) 위주의 책으로 구성된 책거리는 점차 책 위주의 그림에서 벗어나 책과 더불어 청나라에서 수집된 진기한 기물들로 가득 배치되었다. 이는 또한 민화로 확산되면서 학문보다는 길상적인 염원과 생활의 정감이 두드러졌고, 틀에 박힌 반듯함보다는 자유로운 조형세계를 만끽하게 되었다. 민화 책거리에서는 좀 더 현실적인 요구를 반영하게 된 것이다. (250~253

 

저자 정병모 경주대 문화재학과 교수 

 

민화, 가장 대중적인 그리고 한국적인

정병모 저
돌베개 | 2012년 0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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