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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아도르노 (Theodor. W. Adorno, 1903~1969)

 

부정의 변증법(Negative Dialektik, 1966)

 

 

 

1

1966년 말에 발간된 아도르노의 부정의 변증법은 한마디로 유물론적 변증법의 새로운 해석이며 보완작업이라는 데 그 의의가 있다. 그의 날카롭고 섬세한 예술적인 색채로 치장한 이 획기적인 저서는 20세기 후반의 유물론적 사고에 크나큰 성과로 각인된 것이다. 이것은 마치 불꽃이 칠흑의 어둠을 밝히면서 부정하는 것처럼 그것이 반체계적인 것을 뒤덮을 때는 어두운 체계의 부정으로서, 그것이 개념이 없는 것을 강조할 때는 개념의 부정으로서, 그것이 비동일성을 끄집어낼 때는 동일성의 부정으로서, 그것이 실천만을 인정하려 할 때는 이론의 부정으로서, 그것이 현상의 미니마를 제시할 때는 자체 구조의 부정으로서, 그것이 개별화를 넘어설 때는 연관의 부정으로서 각기 작용한다.

 

그리고 아도르노는 자기의 사고조작을 다음과 같이 부른다. 즉 유물론이라든가, 객체로부터의 사고라든가, 객체의 공동사고라든가, 혹은 주체의 헤게모니적 지위의 폐위라고 부른다. 그러나 그의 반관념론적 증후는 흘러가 무산되고 사고의 자기반성을 요구한다.

 

부정의 변증법은 의식적으로 고정적이며 지속적인 긍정을 배격한다. 그것은 긍정을 거부한다. 때문에 아도르노에 있어서의 변증법적 사고방식은 비동일성의 철저한 의식이라 할 수 있다.

 

아도르노는 루카치가 말한 것처럼 분명히 현대문명의 날카로운 비판자이고 고발자이다. 그러나 그는 실천적인 혁명가는 아니었고 또 그렇게 되려고도 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는 그의 비판적 이론을, 특히 후기자본주의에 있어서의 사회나 문화의 비판을 혁명이론으로 받아들인 학생들의 오해와 충돌한다. 그에 의하면 현실의 부조리는 너무나 커서 물화(物化) 기계화 자동화 관리화된 현실은 절망적 양상을 띠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절망적 상황의 분석·비판·고발, 그러한 것들이 그의 문제였다.

 

그는 유대계 인텔리로서 이론과 씨름하는 것도 하나의 실천으로 간주하는 비판가였다. 그러기에 그의 부정의 성격에도 한계가 있게 마련이다. 그는 이 시대를 통렬히 비판하고 고발하는 용기 있는 인텔리였지만 반면 고독하고 감수성이 강한 소위 음악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는 위험·고독·유약한 성격이면서도 현실의 고발에는 단호하고 용감했다. 결코 종교적 신앙에 기대지도 않았고 또한 형이상학적인 절대라든가 영원 속으로 피난가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현실을 긍정하는 실증주의 내지 프래그머티즘 속으로 매몰되지도 않았다. 유명한 포퍼와의 논쟁이 이를 입증한다.

 

그리하여 거꾸로 이러한 피난이나 매몰을 통렬히 비판한 것이다. 세련된 예술적인 표현을 가지고 야만이나 부정에 맞서 그것을 폭로한 것이다. 그의 섬세함과 약함은 도리어 개별적인 것에 의의를 인정하고 약한 자에 가담하여 그것의 정의를 지키기 위한 강력한 비판으로 나타난 것이다.

 

이러한 그의 사고방식을 논리적으로 전개하여 마무리한 것이 바로 그의 주저인 부정의 변증법이라 하겠다.

 

2

한마디로 그의 철학은 체계화 일반화 전문화 고정화를 거부하고 개별적 특수적 미쇄적인 것에 관심을 쏟은 것이며, 변증법적·부정적인 색채를 지닌 난해한 것이다. 이것은 그의 예술적·음악적 천분에 의한 면도 있다.

 

그는 현실의 비판과 고발이 철학의 첫째 과제이고 거기에 인간과 사물과의 옳은 질서가 있다고 보았다. 즉 개별적인 것과 일반적인 것, 주관과 객관, 인간과 자연, 개인과 사회의 매개적 종합을 지향했던 것이다.

 

부정의 변증법은 부정성의 현상으로서 철저한 부정적 비판이론이다. 아도르노는 동일, 체계, 전체, 일반, 체제, 현실적인 진리 등에 비판의 눈을 돌렸다. 그때마다의 모델은 여하간에 적극적인 체계적·통일적 프로그램을 비판했다. 따라서 이 비판에는 단지 자본주의적 시민체제 뿐만 아니라 사회주의 체제 특히 스탈린적 체제도 철저하게 폭로했던 것이다.

 

그러한 긍정적인 것을 가지고 있지 않는 부정에는 납득이 안간다고 하는 이도 있다. 한때 동독의 독일철학지에서는 아도르노의 부정의 변증법을 다음과 같이 비판한 바 있다.

 

시민사회체제의 스케치와 그 조소, 시민사회의 비참함의 폭로, 그것들의 전율적인 묘사는 우리에게 있어서 아주 의미 있는 것같이 보인다. 그러나 이 비판은 다음에 오는 체제의 긍정으로 전환하지 않는다. 새로운 것, 보다 높은 것을 향하는 준비가 없다. 단지 개개의 계기를 폭로하는 데 그칠 뿐이다. 그의 비판은 대담하고 아이러니컬하기는 했지만 그 사명감을 상실했다. 전체에 대해서 긍정 내지 부정을 하는 것이 아니고 단지 개개의 단막극에 대해서 갈채를 보내고 비꼬았을 뿐이다. 때문에 참된 의미에 있어서의 사상 선택은 아무 것도 없다.”

 

이것은 동독체제에 대한 아도르노의 신랄한 비판에 대한 반론이라 하겠다. 그들은 아도르노의 부정의 변증법을 건설이 없는 단순한 파괴의 연속성으로 파악한 것이다.

 

그러나 아도르노에게 유토피아가 없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렇다고 마르쿠제와 같이 노동과 쾌락의 조화와 같은 적극적인 것도 아니다. 아도르노적 유토피아는 적극적으로 기술되든가 제안된 것 같은 류는 아니다. 말하자면 현실의 철저한 부정을 매개로 해서 그 뒤에서 소망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신의 상이 포지티브하게 그려져서는 아니된다는 것이다. 아도르노에게는 그것만이 참된 비판이었던 것이다.

 

무엇인가 포지티브한 제안을 진리처럼 내놓는 것, 그 자체가 진리에 대한 모독이고 비진리를 진리처럼 보이게 하는 거만이라고 지적했다. 유한 내지 비진실에 대한 겸허한 반성, 그것이 엄격한 비판의 진면목이라고 하였다. 분명히 이러한 의미에서의 사회적 비판이론은 전체주의를 억압하는 이론은 되지 않을 것이나 아도르노가 말하는 가능성을 현실성으로 전환시키는 것은 된다.

 

부정의 변증법은 부정된 것의 명확성을 요구한다. 그러나 비동일성의 수미일관된 의식으로서의 변증법이 대상과 개념과의 차이만이 보일 뿐이다라고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아도르노가 획득한 전망은 보편적인 것의 반대, 즉 특수한 것과 개별적 것에 있으면서 보편적인 것의 구성요소를 무시하고 개념이 없는 것, 특수한 것, 개별적인 것에 즐겨 머무는 것이다. 보편적인 것은 보편적인 것이 지니는 부정적인 것이 없다고 생각되지 않는 것에 한에서만 그는 흥미가 있다.

 

부정의 변증법이 갖는 부정적인 것은 긍정적인 것의 극으로서, 즉 대극으로서 존재한다. 그는 반철학이라는 절에서 겸허한 자세로서 아이러니컬하게 자기귀죄를 밝히고 있는데 참되고 솔직한 자기성찰이 깃들어 있다. 아도르노는 자기의 체계를 가령 문자 그대로 비체계적 사고의 경우에서도 강제적으로 반체계라고 부른다. 그러나 체계가 아니라는 것도 또한 하나의 체계이기 때문에 자기의 비체계적 사고 때문에 다른 체계적인 것을 가져오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이 아도르노의 부정이다.

 

그 부정으로써 체계적 성격이 존속되는 것이고, 이 부정만이 해결하지 못한 것을 파헤치는 사변적 힘을 갖는 것이다. 이 부정을 통해서 전체성을 요구하는 체계에 비해서 특수한 것이 성숙되고 포괄되게 된다. 체계를 정당하게 넘어서는 것은 개별적인 것에 의해서 성취된다. 개별적인 것은 체계의 외부에 그 장소가 있다. 그리하여 체계는 부정되는 것이다. 부정의 변증법은 그 결과에 만족한다.

 

철학적으로 사고한다는 것은 여러 가지의 모델로 사고하는 것과 같다. 부정의 변증법은 여러 가지 모델 분석의 하나의 앙상블이다. 이 모델 분석의 앙상블에 돌진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여러 가지의 부정을 계속하는 것이 필요하다. 모든 분석은 부정과 여러 가지 부정으로부터 이룩된다. 이러한 여러 가지 부정에로의 사고 과정은 후퇴이다. 부정과 후퇴, 그 결과는 붕괴이다. 변증법적 유물론에 있어서는 부정은 전진이지만 아도르노 철학에서 있어서는 그것은 후퇴인 것이다.

 

아도르노의 부정의 변증법은 철학의 모자이크이론과 같다. 아도르노의 개개의 부정성은 구조 내지 기능의 면에서 합성되는 가능성을 갖는 것이지만 그러나 그것은 아무리 노력하더라도 참된 전체를 산출할 수는 없고, 또한 산출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모자이크의 합성, 혼합물의 합성은 분화(分化)의 기회를 입증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도르노에게 있어서는 개체의 부정은 전체성으로 향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전체는 아도르노에게 있어서는 허위인 것이다.

 

그러나 모든 사고는 사고이기 위해서 매개 결합 연관 개관을 요구한다. 비교한다고 하는 경우에 있어서도 무엇인가 결합시키는 것, 접속하는 것이 필요하다. 따라서 아도르노는 전체성이나 전체의 카테고리 대신 되는 것을 기대할 수밖에 없다. 그의 대피소는 성좌(星座)라고 불리어진다.

 

마르쿠제가 1966년 제6회 국제헤겔학회에서 부정적인 것이 그 작용을 갖는 것은 전체에 있어서이고, 전체가 철학적으로 부정되는 것이 아니고 부정이 전체의 내부에서 작용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는데, 아도르노는 이에 대하여 항상적인 것’ ‘형식적 사고의무와의 싸움은 그와 같이 아주 비변증법적인 것을 비난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전체를 폭파하고 부정에 독립한 생명을 부여하려는 것이라고 했다. 전체의 파기는 개개의 부정성을 자유롭게 한다. 결국 그의 부정의 변증법은 시간과 공간 속에서 변증법의 자기반성을 도입시키는 것이라 하겠다.

 

3

아도르노는 1903년생으로 호르크하이머와 함께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대표적인 사회철학자로 알려진 사람이다. 1930년에 히틀러의 나치정권에 쫓기어 미국으로 망명하여 뉴욕대학에서 철학과 사회학을 가르쳤고, 2차 대전 후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프랑크푸르트대학에서 정력적인 교편생활을 하다가 1969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저서로는 주저인 부정의 변증법외에 키에르케고르』 『신음악의 철학』 『도덕소론』 『문학노트 1·2』 『계몽적 변증법』 『헤겔에 관한 세 가지 연구』 『미술가』 『음악의 동인』 『바그너 연구등이 있다.

 

류준수 (전 한양대 인문대 교수·철학)

 

부정변증법

테오도르 아도르노 저/홍승용 역
한길사 | 1999년 0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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