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음현의 옛지도.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된 ‘여지도’ 6책 가운데 4책에 소장된 경상도 전도 1장과 고을 지도 30장 가운데 수록된 안음현의 지도다.
뙤약볕이 내리쬐는 여름이었을 1751년 음력 6월18일의 조선. 혼비백산한 두 명의 사내가 안음현(현 경상남도 함양군 안의면 일대) 현청으로 뛰어들어온다. 사내 두 명은 지역의 치안을 담당하는 기찰군관이다. 이들은 또 다른 기찰군관 한 명과 그의 수행원이 도적떼를 만나 두드려 맞고 있다고 고한다.
임기 3개월을 남기고 느긋하게 지내던 안음현감 심전은 바짝 긴장하며 자세를 고쳐 앉는다. 그런데 이들을 뒤따라 들어온 승려 한 명이 더욱 충격적인 소식을 전한다. 두드려 맞고 있는 줄 알았던 기찰군관과 수행원이 장수사 아래 골짜기 입구에서 죽은 채 발견됐다는 것이다. ‘강도상해’에서 ‘살인’으로 사건이 전환되는 순간이다. 추후 4개월의 조사를 통해 이 살인사건의 범인은 처음에 현청으로 뛰어들어와 소식을 알린 기찰군관 두 명으로 판명된다.
<1751년, 안음현 살인사건>(푸른역사)은 1751년 조선의 기찰군관 김한평과 수행원 김동학 피살사건의 수사, 재판, 처형 과정을 담은 책이다. 200쪽 분량의 작은 책을 펼치면 270년 전에 벌어진 살인사건과 수사·재판 과정이 손에 잡힐 듯 생생하게 그려진다.
책은 현장검증, 부검(검시), 수차례의 용의자 신문 내용까지 담아 한 편의 범죄 사극처럼 쓰여졌다. 저자인 이상호씨(51)는 한국국학진흥원에서 책임연구위원으로 14년간 근무하며 무명인과 지방 사람들의 일기와 기록을 연구해왔다. 지난달 26일 이 연구위원과 전화로 책 이야기를 나눴다.
책의 중심이 되는 기록은 당시 경상감사를 지낸 조재호의 일기다. 조재호는 1751년 5월10일 경상감사로 파견돼 약 1년3개월간 활동하면서 있었던 일들을 매일 기록해 <영영일기>를 남겼다. 총 3권의 <영영일기> 중 조정에 올린 보고서들을 모아놓은 <영영장계등록>에 안음현 살인사건의 내용이 세세하게 기록돼 있다.
기록을 잘 분석하면 살인사건이 벌어진 장소와 사건 속 인물들이 이동하던 동선까지도 추정 가능하다. 살인사건은 경남 함양군 덕유산의 용추사(장수사 옛터)와 용추계곡 인근에서 벌어졌다.
이 연구위원은 “지역에서 쓰는 일기들 중에 매우 촘촘하게 쓰인 것들이 많다”며 “특히 장계(보고서)는 왕으로부터 승인을 받기 위해 썼기 때문에 취조 과정이나 시간대 같은 것도 자세하게 기록돼있다”고 설명했다.
기록이 전하는 조선의 형사 시스템은 상당히 체계적이다. 살인사건 초기 수사과정은 나름의 과학수사를 표방하고 있다. 안음현 살인사건에서 초기 수사를 지휘하는 안음현감은 날이 밝자마자 현장으로 달려가 지형을 살폈다. 시신 부검에 참관할 참검인들도 함께 현장으로 향했다.
참검인단은 기본적으로 시신을 직접 살필 전문가인 오작인, 의생, 율관으로 구성된다. 객관성을 담보하기 위해 피해자들의 친·인척들도 포함된다. 안음현 살인사건의 검시기록을 보면 참검인들이 눈동자 아래의 1.55㎝ 상처라거나 귀 옆의 0.31㎝ 칼자국까지도 매우 꼼꼼하게 확인했음을 알 수 있다.
이 연구위원은 “조선의 수사 절차를 보면 검시 전에 주변인 탐문 조사를 반드시 하고 이들의 진술까지 받아서 검시서에 기록하도록 돼 있다”고 말했다.
안음현 살인사건이 일어난 장소로 보이는 경남 함양군의 용추계곡(왼쪽)과 장수사 옛터(오른쪽).
부검 이후 수사·재판 과정은 여러 단계를 거치도록 돼 있다. 현감은 검시와 용의자 신문 등의 수사결과를 감사에게 올린다. 살인사건의 경우 초기 수사 과정을 제하고도 용의자의 진술이 맞는지 확인하는 세 번의 심리(삼복)를 또 거쳐야 한다.
절차는 조선 성종 때 완성된 <경국대전>을 주로 따른다. <경국대전>에는 신문할 때 사람을 때리는 몽둥이인 ‘신장’의 길이 및 타격 부위, 횟수까지도 규정돼 있다. 안음현 살인사건의 용의자였던 기찰군관 두 명은 약 4개월간 이 모든 과정을 거치고 나서야 사형을 당했다.
“얼마 전에 사극을 보니까 경상감사가 바로 사형을 선고하던데, 조선시대에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조선에서 ‘인권’의 개념은 약했지만, 백성의 목숨을 빼앗는 것처럼 돌이킬 수 없는 것들은 몇 단계의 검증을 반드시 거치도록 했고 사형은 어명을 통해서만 가능했어요. 중국의 <대명률>(조선시대 현행법·보통법에 적용된 중국 명나라의 형률서)을 받아들여 <경국대전>이 최종적으로 완성될 때 들어간 내용입니다. 시스템이 잘 갖춰지지 않았다면 조선이 그렇게 오래 유지될 수도 없었겠죠.”
이 연구위원은 “우리나라 사람들은 ‘기록열’이 아니라 ‘기록벽’이 있었다고 할 정도로 옛 기록들이 많이 남아 있는데, 너무 중앙의 기록들만 다뤄져서 아쉽다”며 “민간 일기 중에 재밌는 것들이 많은데 번역자들이 적다보니 이 중 10% 정도만 번역됐다”고 말했다. 그는 요즘 절세를 위해 현감과 결탁하고, 구휼미를 가로채기 위해 배를 난파시킨 것으로 보이는 민간의 기록들을 들여다보고 있다.
“원래 사람 사는 이야기는 어느 시대든 다 재밌어요. 아무래도 역사학자들은 ‘사실’ 자체에 관심을 가지다보니, 일상의 이야기들이 잘 안 알려진 부분이 있죠. 역사가 재밌으려면 내가 살아가는 이야기, 미시적인 것, 일상적인 것이 필요해요. 앞으로도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더 많이 전달하는 연구자가 되고 싶습니다.”
<1751년, 안음현 살인사건>의 저자인 이상호 한국국학진흥원 책임연구위원
*출처: CSI 저리가라할 조선시대 과학수사, 1751년 ‘안음현 살인사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