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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살 봄날 청량리에서 경춘선을 타고 능내에 가면 아득했다. 손을 잡고 걸어도 또 혼자여도 찰나의 충만함이 따사로운 햇볕 아래 좋았다. 평생 단 한 번 찾아 든 아득함인 줄 그때 알았더라면 서둘러 표를 끊고 귀경하진 않았으리라.

 

그날의 아득함을 쥐어 보이는 작품들이 있다. 영화 《박하사탕》 마지막 장면에서 하늘을 올려다보는 설경구의 어정쩡한 얼굴, "오늘 이렇게 우리 모두가 한 자리에 모여 당신의 앞길을 축복합니다"로 시작하는 들국화의 노래 '축복합니다' 그리고 김사인의 시집 《가만히 좋아하는》(창비·2006).

 

인은 반복해서 묻는다. "나의 옛 봄날 저녁은 어디로 갔을까, 키 큰 미루나무 아래 강아지풀들은, 낮은 굴뚝과 노곤하던 저녁연기는" 하여 "나의 옛 나는 어디로 갔을까, 고무신 밖으로 발등이 새카맣던 어린 나는 어느 거리를 떠돌다 흩어졌을까"(〈아무도 모른다〉)

 

흩어지는 것이 어디 어린 시절 뿐이랴. 매 순간 칼 바람 속에 서서 완전무결한 하루하루를 갈망하지만 오늘은 어제가 되고 모든 일에는 후회가 남는다. "이미 저질러진 일들이여/완성된 실수여//아무리 애써도 남의 것만 같은/저 납빛의 두꺼운 하늘/잠시 사랑했던 이름들"(〈길이 다하다〉)


자 이제 어찌 할 것인가. 다시 간들 봄 경춘선에 아득함이, 충만함이, 사랑이 남았을 리 없다. 그렇다고 상처 받기 두려워 방문 꼭꼭 걸어 잠근 채 숨으려는가. 육신의 나이는 아직 젊되 내 정신은 쭈그렁이가 되었다며 자책할 것인가.

 

 

상처 깊은, 그리움에 사무치는 영혼들에게 시인은 권한다. 가만히 좋아하라고. 그냥 천천히 조용조용 속절없이 고요히 사랑하라고. 결코 소유하지 않지만 늘 곁에 머무는 바람처럼 그렇게! 내게는 이 '가만히'가 김소월이 발견한 '저만치' 홀로 피는 것만큼이나 멋지고 어려운 자세로 읽힌다.

 

삶이란 흔들림이 아닌가. 경쟁과 격정과 또한 비탄의 세월이 아닌가. 그러나 한 번쯤은, 이 시집을 읽는 짧은 순간만큼은 '가만히' 삶의 기미들을 들여다보고 만져보고 냄새 맡아보라는 것이다. "나른한 고요의 봄볕 속에서" 잊고 잃은 사물과 기억들을, "가녀린 것들의 생의 한 순간"을, 그 "외로운 떨림"에 함께 떨어보라는 것이다. 〈풍경의 깊이〉에서 시인은 단언한다. "그 작은 목숨들의 더듬이나 날개나 앳된 다리에 실려온 낯익은 냄새가/어느 생에선가 한결 깊어진 그대의 눈빛인 걸 알아보게 되리라 생각한다"

 

집을 읽은 후엔 아무 것도 하지 마시라 권해드린다. 시를 옮겨 적지도 말고 침묵을 견디지 못해 텔레비전을 켜지도 말고 친구에게 전화 걸어 좋은 시집 읽었다 수다도 떨지 말고, 가만히 눈앞의 풍경을 바라보시기를. 살아 있음의 아득한 고마움 느끼시기를. "이도 저도 마땅치 않은 저녁/철 이른 낙엽 하나 슬며시 곁에 내린다//그냥 있어볼 길밖에 없는 내 곁에/저도 말없이 그냥 있는다//고맙다/실은 이런 것이 고마운 일이다"(〈조용한 일〉)

 

2008. 5. 10(토)

김탁환 KAIST교수·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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