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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순간으로 압축된 영원을 경험하는 사람은 누구일까. 《흐르는 강물처럼》(밝은세상, 2005)의 저자 노먼 F. 매클린은 낚시꾼이라고 단언한다. "온 세상이 물고기로 가득 차 있다가 갑자기 사라져버리는 순간을 경험하기 전까진 어느 누구도 시간의 한 점을 논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남자와 낚싯대와 강물! 《흐르는 강물처럼》은 이 셋의 합일을 담기 위해 창작된 장편이다.

 

형제에게 플라이 낚시를 가르친 이는 "강물이 말씀 위로 흘러간다"고 주장한, 스코틀랜드 인이자 독실한 장로교 신도인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낚시를 오락거리로 여기지 않고, "열 시에서 두 시 방향 사이에 네 박자 리듬을 살펴서 날리는 예술"로 규정한다. 물고기를 많이 낚는 것보다 낚싯대를 우아하고 정확하게 뿌리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

 

동생 폴은 일 때문에 낚시를 방해 받지 않겠다는 신념을 평생 지켰다. 폴의 애인은 '봄에 올라오는 어린 싹'이라는 뜻을 지닌 인디언 혼혈 여인 모나세타다. 그녀는 "파트너에게 자신이 버려지거나 혹은 이미 버려졌다는 느낌을 갖도록 만드는" 탁월한 춤꾼이다.

 

폴은 모나세타를 업신여기는 백인 사내들과 싸우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형은 폴을 돕고 싶지만 그 방법을 찾지 못한다. 고민하는 큰아들에게 아버지는 충고한다. "도움이란,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하고 또 기꺼이 받아들이려는 사람에게 나의 일부를 주는 것"인데, "도움을 주기엔 너는 너무 젊고 나는 너무 늙었다"고.

 

 

가족인 그들이 폴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함께 몬태나 주 블랙풋 강으로 플라이 낚시를 가는 것뿐이다. 낚시에 열중하는 폴의 모습은 반항적으로 보일 만큼 당당하다. 그 당당함이 때 이른 파국을 낳는다. 폴이 리볼버 권총 손잡이에 맞아 살해당한 것이다.

 

버지는 추억한다, 낚싯대를 쥔 폴은 아름다웠다고. 그리고 큰아들에게 우리가 함께 살았고 우리가 사랑했고 우리 곁을 떠나간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짓도록 권한다. 각박한 삶을 살아낸 뒤, 일흔세 살의 노먼은 장편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젊은 시절 사랑했지만 이해하지 못한 폴을 비롯한 많은 이들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노먼의 글쓰기란 그들을 향한 늦었지만 진심어린 화해의 손 내밀기다. 기억은 사랑이니까.

 

현재를 잠시 접어두고 그 때 그 시절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촉매가 필요하다. 마르셀 프루스트는 홍차에 적셔 먹은 마들렌 과자 냄새를 통해 고향의 어린 시절로 들어갔다. 《흐르는 강물처럼》에서 그 촉매는 다름 아닌 블랙풋 강의 물소리다. 소설은 이렇게 끝을 맺는다. "나는 물소리에 넋을 잃는다."

 

을 덮고 곰곰 짚어본다. 나는 무엇에 넋을 잃는가. 내 넋을 살피지도 못한 채 허둥지둥 살아왔던 것은 아닐까. 문득 경상남도 진해시 작은 항구에 만발했던, 푸른 하늘을 온통 가린 흰 벚꽃과 그 아래를 신나게 내달리는 소년이 떠올랐다. 아, 넋을 잃고 싶은 봄날 아침이다.

 

2008. 5. 24(토)

김탁환 KAIST교수·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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