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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한스 제들마이어 (Hans Sedlmayr, 1896~1984)

〈예술과 진리〉(Kunst und Wahrheit, 1958)

 

 

 

1.
한스 제들마이어의 <예술과 진리>(Kunst und wahrheit: Zur Theorie und Methode der Kunstgeschichte)는 학문으로써의 미술사학의 형성과 그 후의 미술사학의 두 흐름을 설명하고, 저자 자신의 이론인 작품해설을 통한 미술사의 길을 밝힌 저작이다. 그래서 이 저작은 미술사학의 길잡이가 되고 있을 뿐 아니라, 종래의 미술사학의 논쟁을 일단 마무리지은 저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줄 안다.

 

제들마이어는 1896년에 오스트리아와 헝가리의 국경지대인 호른슈타인에서 출생하여 1984년 잘츠부르크에서 88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1차 대전 이후 빈의 공과대학에서 수학하였으나, 막스 드보르작의 영향으로 예술사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드보르작이 세상을 떠난 후 슐로서의 지도로 학위논문을 썼다(1923). 이 논문은 1690년 칼 6세의 요청으로 진에 건립된 바로크 양식의 칼 성당을 설계한 피셔 폰 에를라흐에 관한 것이다(이 논문은 1925년 뭔헨에서 출간).

 

그는 슐로서 교수가 은퇴한 후(1936)에 빈 대학의 교수로 취임했다. 그의 교수취임 강연이 「대성당의 성립」(1950, 취리히와 프라이부르크에서 출간)이다. 보통 중세 대성당의 건축을 건축기술적인 면과 양식사적인 면에서만 설명하려 하는데, 그는 총체적인 개념인 ‘빛의 연관’에서 대성당의 성립을 해석했다. 그는 예술작품을 半球의 경우처럼 눈에 보이는 부분만 볼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부분도 아울러 고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제들마이어는 2차 대전 중 빈학술원 회원이 되었고, 전선에 나간 학생들을 위해 「예술작품과 예술사」라는 글을 집필하였다. 종전 후 그는 나치 당원이었다는 사실로 인하여 빈 대학에서 추방되었다. 그러나 그는 나치 치하에서 피해받은 사람들 중의 한 명이었다. 1937년에 강의 원고를 출판하려 했으나, 출판금지령에 저촉되어 뜻을 이루지 못했다. 종전 이후 1948년에야 이것이 출간되었는데, <중심의 상실>이 바로 그것이다.

 

「시대의 징후와 상징으로서 19·20세기의 조형예술」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이 책은 많은 문화현상 속에서 예술에서만이 시대정신이 그 탈을 벗고 자신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에 예술을 통해서 시대정신을 파악할 수 있다는 입장을 취한다. 베르자예프는 “19세기와 20세기의 의식에서는 인간의 이상이 사라졌다”고 말했는데, 제들마이어는 19세기 이후 조형예술이 양식의 혼란을 가져온 것은 신과 인간의 분리에서 오는 시대정신의 징후라고 보아 이것을 <중심의 상실>이라고 이름지었다. ‘자율적 인간’이라는 슬로건을 앞세워 이간이 중심에서 빠져 나가려 하고 있다고 보았다. 이 고찰은 예술사를 숭배사로 보려 했던 드보르작의 흐름을 밟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951년 제들마이어는 독일 뮌헨 대학의 미술사학 교수로 초빙되어 나치 정권의 협력자라는  오명을 씻을 수 있었다. 그의 취임 강연은 「피터 브뤼겔의 맹인들의 전락」이었다. ‘맹인들의 전락’이라는 작품에 관하여 모르는 사람에게 이 작품의 복사물을 보이고, 작품 속에 무엇이 있었는가를 묻는다면, 거의 다 작품 속에 인물이 몇 있었는지, 또 작품이 어떤 요소로 구성되었는지를 설명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느낀 인상들을 기술하라고 하면 놀랄만한 일치를 보여 준다는 것이다. 즉 ‘기분이 나쁜 것을 보았다’든가, ‘무서운 것을 보았다’, ‘죽음의 무도같은 것을 보았다’든가 하여 ‘무시무시하다’는 말로 요약할 수 있는 일치점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것은 ‘직관적 성격’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으로, 그 형식과 내용이 거기에 합치되는 예술작품의 중심이라고 그는 말한다(논문집 『에포크와 작품』Ⅰ, 1955).

 

제들마이어는 바이에른학술원 정회원으로 선출된 해(1955)에 <현대미술의 혁명>을 출간하여 미술사 연구에서 ‘적은 假定에서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것을 이해하는 학문적 처리방법’을 제시하였다. 즉 가능한 한 적은 중심적인 것에서 많은 주변적인 부분을 이해하는 원리로서, 그는 ‘순수 형상에의 경향’이라는 가정을 가지고 미증유의 혁명을 겪고 있는 20세기 예술의 여러 흐름을 이것으로 이해하려 하였다. 이것은 종래의 양식사에 입각한 미술사 기술을 극복하는 새로운 시대 구획을 이루었다.

 

그는 1964년 정년퇴임까지 뮌헨 대학에 있다가 그 해 잘츠부르크 대학의 객원 교수로 초청되어 그 곳에 옮겨 마지막 20년을 이 음악의 도시에 거주하다가 세상을 하직했다. 1970년 <景觀없는 도시-잘츠부르크의 내일의 운명>을 출간하여 아름다운 도시의 경관이 훼손된 것을 어떻게 회복할 것인가를 제기하였다.

 

그 회복의 길은 기능주의를 거부하고, 자연을 보호하는 일이라고 기록했다. 그런데 자연보호란 자연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인간의 감정, 사고, 행위를 상속받은 유기적 조건 안에서 인간을 알고 이해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그는 같은 해(1970)에 네 개의 강연 원고를 모아 <기술시대의 위기와 희망>을 출간했는데, 삶이 황폐화된 비유기성의 기술도시에서 보다 높은 존재단계에 대응하는 인간 정신의 조화로운 발전을 제창하였다.

 

2.
제들마이어는 주저는 역시 <예술과 진리>이다. 이것은 미술사학에 관한 오랫동안의 논문들을 엮은 것인데, 「미술사의 이론과 방법을 위하여」라는 부제가 붙어 있고, 이 부제가 그의 학문적 목표이다. 1958년에 로볼트 총서(제71권)로 출간되었는데, 78년에 그의 제자 프리드리히 필 교수가 주도하는 메안더 출판사에서 개정판을 냈다. 여기에는 두 논문이 추가되었다.

 

미술사의 기술이 주어진 어느 작품에 대한 인식이 아니고, 어떤 원리에 입각하여 역사 경과의 법칙성을 추구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입장에서, 학문으로서의 미술사학이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걸쳐 형성되었다. 여기에 두 흐름이 생겼는데, 작품의 형식적 발전, 즉 양식의 징표를 더듬은 것이 바젤 대학의 전통이었고, 작품의 정당한 이해를 위해서는 시대의 정신 현상을 밝혀야 한다는 것이 빈 대학의 전통이었다. 바젤학파의 대표자는 뵐플린이고, 빈학파의 대표자는 드보르작이었다.

 

위에서 언급한대로 제들마이어는 빈 대학에서 드보르작의 영향으로 미술사학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드보르작의 「정신사로서의 예술사」는 ‘숭배사’로서의 미술사에 지나지 않는다고 지적하고, 그것이 예술 외적인 선입관 때문에 너무도 구체적인 것을 무시하였다고 비판하면서 자기의 방법을 추구해 나갔다.

 

<예술과 진리>에서 제들마이어는 ‘학문으로서의 미술사’가 어떻게 형성되었는가를 기술하였다. 백과사전식 항목인 이 장은 초판에는 부록형식으로 뒷부분에 첨부되어 있었으나, 개정판에는 제1장을 차지하여 우리에게 미술사학의 체계적 개관을 보여 주었다.

 

초판에서 서론으로 취급된 「예술사의 새로운 길」(개정판에서는 제2장)에서 그는 자기의 입장을 명확히 했다. 그에게 있어 예술사는 과거의 역사가 아니고 현전하는 역사이다. 예술사는 작품이 지난 날 어떤 사상적 배경에서 생겼는가, 또 어떤 양식을 빌어 묘사되었는가 하는 것에 머물지 말고, 예술작품이라는 하나의 작은 세계에 부딪쳐 ‘해석의 과정’에서 現前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이 저작에서 양식사로서의 미술사와 정신사로서의 미술사를 각기 장을 달리하여 기술하였다. 양식사가 너무 형식적 고찰에 치우치는가 하면, 정신사 역시 방향은 다르나 비슷한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고 그는 보았다. “만일 그릇된 미술사가 형식적 고찰을 통해서 생기를 잃어버린 미술작품의 해골을, 육체를 갖지 않는 정신성의 접합으로서 다시 소생시키려고 한다면, 그것은 이상주의의 가면을 바꿔 쓴 유물론과 평행에 서는 일이다”고 그는 꼬집었다. 종래의 미술사의 두 유형의 불완전성을 보충하면서 나선 그의 방법은 ‘작품이해로서의 미술사’라고 우리가 특징지을 수 있겠다.

 

해석, 즉 재창조의 과정 없이는 죽은 형식의 역사는 가능하겠지만, 예술의 역사는 불가능할 것이라는 것이 제들마이어의 입장이다. 예술사를 기술하는 목적이 작품 이해에 있는 것이지 단순한 지식을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것은 바로크 양식이다, 로코코 양식이다 하는 따위의 類개념의 범례에 예술사가 머물러 버리면 무의미하다는 것이 그의 입장이다.

 

이 저작의 핵심부는 「해석의 문제」라는 장이다. 그의 해석론은 은연 중 예술본질론을 전제하고 있다. 딜타이의 말대로 전체를 파악하는 것이 개체를 이해하는 길인데, 예술작품의 전체적인 것이란 무차별한 통일이 아니라 그 자체 독립된 구조를 말한다. 그는 여기에서 ‘구조분석’이라는 절차를 말한다.

 

구조분석의 절차란 작품의 객관적, 형식적인 층과 주관적, 비유적 층을 함께 전체로서 감싸주는 직관적 성격의 힘에 의해 작품의 중심을 건지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상호 관통의 작용에 의하여 감상자가 한 예술작품의 특색을 여러 형용사의 묶음에서 찾는 올바른 해석의 절차를 말한다.

 

우리가 작품을 정당하게 해석하려면 역사적 지평의 고려를 거쳐야 한다. 그러나 종래의 ‘익명의 예술사’에서 보는 것처럼 작품들과 시대들 사이의 등급과 가치가 너무 간단하게 처리되면 작품비평이 불가능하게 된다는 입장에서 제들마이어는 “예술사를 개개의 작품의 해석 위에 건립하여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문제 중의 문제, 즉 언제 어디에서 어떤 조건 밑에서 시대에 제약받고 있는 것에서 시대를 초월하는 것이 생기는가 하는 것은 아직 미해결의 장으로 남는다고 겸손하게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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