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철주의《사람보는 눈》은 내게 '그림 보는 눈'이었다. 그는 그림에 얽힌 일화와 주인공의 애환과 인품 그리고 정겨운 삶과 풍경을 눈 안 가득 담았다.
손철주는 신문사에서 미술 담당 기자, 문화부장과 취재본부장 등을 역임하고 지금은 학고재 주간이자 미술 평론가로 활동 중이다. 일찍이 그는《그림 아는 만큼 보인다》로 그림보는 실력과 남다른 문필(文筆)을 뜻하지 않게 자랑하더니 이번에는 우리 옛 그림으로 찾아왔다. 어찌나 반가운지!
▲신윤복,〈꽃을 꺾다〉간송미술관
지은이는 그림 70여 점을 크게 네 가지 주제로 나눠 4부에 걸쳐 소개했다.
1부 같아도 삶, 달라도 삶 (16점)
2부 마음을 빼닮은 얼굴 (23점)
3부 든 자리와 난 자리 (14점)
4부 있거나 없거나 풍경 (16점)
각 단락에 '건너는 글'을 덧붙여 깊이 읽는 즐거움을 안겨준다. 나는 게 중에서도 2부 끝자락에 놓인 매미 그림 이야기가 더없이 좋았다. 겸재, 김인관과 심사정 등이 매미를 그린 이유는 이 놈이 선비가 갖추어야 할 다섯 가지 덕(文·淸·廉·儉·信)을 지녔기 때문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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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속,〈조는 새〉, 개인 소장 |
이
런 해설서는 나같이 '그림 보는 눈'이 없는 사람에게는 여간 반가운 게 아니다. 혼자 보는 것도 제멋이겠지만, 그러다 자칫 봄날의 잔설마냥 놓치는 것들이 있기 마련이어서 제대로 보려면 이런 책이 딱이다. 하긴 '사람 보는 눈'이 어디 그림에만 해당되겠는가. 관상도 잘 봐야 하고, 정치판도 두루두루 살펴야 할 것이다.나는 맘에 와 닿은 그림을 보노라면 어느새 양화(養和)의 기운을 얻는다. 곱씹는 맛도 일품인 주옥같은 우리말을 허겁지겁 쓸어 담는 재미는 무엇과 견줄 데 없는 능준한 덤이다.
어디, 내가 홀렸던 그림 몇 점을 여기 소개해 보자.
눈보라가 생애를 쓸고 간 듯 격정의 삶을 보냈던 최북의 그림, 강고한 성격 탓에 불화(不和)를 구태여 조정하려 들지 않았던 송시열의 초상(김창업), 듣는 귀가 컸고 기쁨과 노여움을 얼굴에 드러내지 않았던, 무엇보다 자물쇠 입을 가졌던 황희의 초상(작자 미상), 영화〈관상〉에 캐스팅되어도 좋았을 개성적인 윤두서의 자화상, 초시에 장원급제하고도 벼슬길로 나아가지 않고 유학자적 자존을 끝내 지켰던 황현 초상(채용신)과 유불선(濡佛仙)에 두루 밝은 학자의 면모가 남다른 포즈에 살아 있는 최치원 초상(채용신)은 인물화의 백미다. 지은이는 이들 그림에 얽힌 일화와 주인공의 인품을 조화롭게 서술한다.
나는 과욕으로 마음이 수란할 때면 아산에 있는 맹씨 행단(孟氏杏亶)을 곧잘 찾곤 했다. 조선 초기 청백리의 표상이었던 맹사성 선생이 살았던 고택이 있는 곳이다. 거기에는 선생이 심었다는 600살도 더 된 은행나무가 두 그루 있다 해서 ‘행단’이라 이름 붙였다. 고택은 정면 4칸, 측면 3칸의 ‘工’자형 집이다. 참 검소하게 살아서 찾을 때면 스산하기조차 하다. 툇나무에 걸터 앉아 색바랜 결을 쓰다듬다보면 어느 새 내 마음도 참 정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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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상,〈검선도〉국립중앙박물관 |
당나라의 문인 여동빈(呂洞賓)은 시 잘 짓는 학자이자 벼슬을 버린 은자, 그리고 칼솜씨 하나로 신선의 반열에 오른 인물이었다. 조선 선비들 사이에서도 많은 인기를 누렸다고 한다. 그런 동빈은 자신있게 유혹에 휘둘리지 않았다. "나에게 칼이 세 자루나 있다. 번뇌를 끊는 칼, 분노를 끊는 칼, 색욕을 끊는 칼." 허나 나는 동빈과 같이 처신하지 못한다. 온갖 번뇌와 오욕 칠정에 휘둘리고 색욕에 밤잠을 설칠 때도 많아 민춤하기 그지없다. 아 고매한 인품이여!
어디 이뿐이겠는가? 신윤복이 그린〈꽃을 꺾다〉를 보노라면 지은이의 구수한 해설이 읽는 맛을 더한다. "혜원의 난봉기질은 작품마다 질펀하다." 이 그림에서도 사내의 음심과 닮은 불끈 솟은 바위가 나오고, 석 달 열흘 내내 꽃이 지고 피는 백일홍(배롱나무)도 있다. "열흘로는 성에 안 차니 한 백 일 더불어 놀아 보잔 소리다. (중략) 낯 뜨거운 행태를 재미삼아 건드려보는 짓거리로 묘사한 혜원, 18세기에 태어났기에 몸 성히 지냈다."고 평한다.` 가히 고수(高手)의 눈썰미가 아닐 수 없겠다.
한편 인조반정에 공을 세우고도 텃세를 부리지 않았던 조속이 그린〈조는 새〉는 여리고 조만한 참새를 그렸다. 겸손의 미덕을 배울 수 있는 그림이다.
내가 느낀 감흥을 일일이 열거하자니 숨이 가빠진다. 어릴 적에 할머니가 꿀단지를 신주 모시듯 했었는데, 어느 새 이 책이 내 꿀단지가 되겠지 싶다. 그렇게 매미 마냥 단물을 쏙쏙 빼 먹고 싶어지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