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넷플릭스 드라마 『킹덤』을 보다 보니, 제가 여전히 우리나라의 과거 풍습과 역사에 대해서는 참 무지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드라마를 감상하는 데에야 별 문제가 없었습니다만 낯선 용어들이 등장할 때마다 역사교양서적 몇 권 읽은 것으로는 도무지 메워지지 않는 간극을 느꼈거든요. 물론 대충 두드려 맞추면 무슨 뜻인지야 짐작이 되었습니다만 이참에 역사 상식의 폭이나 좀 넓혀보자 싶어서 이것저것 조사를 좀 해봤습니다.

 

 

 

 

1) 염습(??)


  매 에피소드가 시작할 때마다, 장례 준비로 싸놓은 왕의 시신을 풀어 뜸을 뜨고 약재를 이용해 되살리는 과정을 보여주는데요, 원래 예서에 나오는 염습이 이미 진행되었던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염습이란,  을 통칭하는 말이며, 습을 먼저 하고 염은 습을 한 뒷날에 합니다.

  우선 의 과정은, 사망한 날에 시신을 깨끗이 씻기고 수의로 갈아입힌 다음 반함(飯含, 죽은 사람의 입에 쌀이나 구슬, 또는 엽전을 물리는 일)을 하는 절차입니다.


 

   소렴 대렴이 있으며, 대렴은 소렴한 시신을 관에 넣는 입관 절차라 드라마에서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소렴의 과정은, 전날 습이 끝난 시신을 ‘염포’라는 천으로 싸는 것이며, 이 때 천으로 시신을 감싸되 매듭을 짓지 않고 둘둘 말아 돌려서 끼워둔다고 하네요. 염포로 쓰는 천은 모시나 베, 비단 등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지금은 거의 삼베를 쓴다고 하고요.

 


 

2) 잠행

 

  사극에서는 왕이나 세자가 남몰래 궁을 빠져나가는 장면이 곧잘 등장하지만 실제로는 거의 없는 일이었다고 볼 수 있죠. 드라마에서도 툭 하면 얘기하듯 왕이나 세자는 국가의 근본, 국본, 지존이신 분들이라 절대로 혼자 마음대로 돌아다녀서는 안 되었습니다. 특히 세자가 궁 밖으로 나가는 것은 자칫하면 폐위당할 수도 있는 위험한 행동이었던 게, 왕이야 민정을 몸소 살펴본다는 명분이라도 있었지만 아직 수습사원에 해당되는 세자의 경우엔 그런 게 성립이 안 되거든요. 실제로도 세자가 궁 밖에 몰래 나가서 했던 일들이란 게 대개의 경우 비행청소년스러운 행동들이었던 지라...(세종의 형님이었던 양녕대군이나, 사도세자를 한 번 생각해보면 답이 나오죠.)

 

 

3) 익위사

 

  무영을 가리켜 부르는 대사를 들을 때마다 ‘이기사’, ‘이기사님’인 줄 알고 처음엔 ‘이무영인가?’라는 무식한 오해를 했습니다. 느낌이 뭔가 아닌 것 같아서 찾아 보니 ‘익위사’이더군요. 정확한 명칭은 ‘세자익위사’이고, 태종 18년에 설치된 왕세자 호위 관청으로 정5~9품, 종5~6품의 직이 있었다고 합니다. 세자를 가까이에서 보좌하는 직위였던 만큼, 공신이나 재상의 자제 중에서 뽑았고, 소속 인원은 태종 때에는 총 16인이었다가 나중에 14명으로 바뀌었다네요. 궁수가 6명, 나머지는 검수(=칼잡이)였는데, 특히 ‘사복 4인’이라는 기록이 세종실록에 나오는 것으로 봐서는 어디를 가든 지근거리에서 지키는 무사가 4명이었다고 짐작됩니다. 그러니, (실제로는 거의 없었을) 잠행시에 눈에 띄지 않기 위해서라도 14인 전체를 데리고 나갈 수는 없었겠지만, 딱 한 명만 데리고 나가는 경우는 불가능했을 겁니다. 그리고 위급 상황에 대비하려면 아무래도 1인으로는 제아무리 천하제일검이라고 해도 좀 무리가 아닐까요?

  참고로 동궁전을 지키는 동궁전 별감도 따로 있었는데, 동궁전 별감은 금군, 즉 내금위 소속이고, 세자익위사는 병조관할 부대라는...

 

 

4) 내금위

 

  조선시대에 왕의 측근에서 호위를 맡은 군대입니다. 인원은 190명이었고 대장 격인 내금위장은 한 사람이 아니라 3명이었다고 하는군요. 엄격한 시험을 통해 선발되었는데, 기록상으로는 5품 이하의 읜관자제 중 무예와 지략이 뛰어나고 ‘용모가 단려하며 키가 큰 자’를 뽑아 조직하였다고 하네요...(헐, 조선시대에도 외모와 키를 봤어...)

 

 

5) 호패

 

  조선시대 16세 이상의 남자가 차고 다닌 패입니다. 소유자의 신분이나 지위를 비롯하여 거주지 등 기본적인 인적 사항을 담고 있어 오늘날의 주민등록증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신분에 따라 호패의 재질과 기재 내용이 다른데, 2품 이상 상아로 만든 아패를 사용했고, 그보다 낮은 신분의 경우에는 뿔로 만든 각패(3품 이하 잡과 입격자), 회양목으로 만든 황양목패(생원, 진사), 자작나무나 잡목으로 만든 소목방패(잡직, 서리, 향리, 서얼), 그 외 잡목으로 만든 대목방패(공노비, 사노비)를 패용했습니다. 그런데, 언뜻 생각하면 왜 노비의 호패에 ‘대(大)’자를 붙였을까 싶은데, 이는 노비의 호패가 일반인의 호패보다 컸기 때문입니다. 노비가 도망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노비의 호패에는 신체적인 특징까지 자세히 적어야 했기 때문이라네요.


 

  3화에서 세자가 동래부사에게 호패 비슷한 녹색 패를 던져 보였는데, 일반적인 호패라면 이름과 출생년도, 거주지, 직함 등이 기재되어 있어야겠지만 그 패에는 용의 그림만 보입니다. 상식적으로 따져보아도 세자가 호위무사나 시종들 없이 다니지는 않으니 굳이 신분 증명용 호패를 갖고 다니지는 않았을 듯한데요, 그런 점에서 그 녹색 패는 호패로 분류하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이네요. 그래도 그 상황에서는 신분 증명용 패 외에는 해석의 여지가 없기는 합니다. 또 하나 특이한 것은, 그 패가 녹색이었다는 건데, 아마 상아가 아니라 옥이나 비취로 만든 게 아닐까 감히 추측해봅니다.

 

 

6) 사조룡(四爪龍)

  3화에서 세자가 신분 증명용으로 던진 녹색의 패를 받아 본 동래 부사는 놀라 더듬거리며 ‘사조룡’이라고 하죠. 이는 발톱이 4개인 용을 가리킵니다.

 

  조선에서 용은 왕의 상징이며, 왕의 경우 발톱이 5개인 오조룡, 세자는 발톱이 1개 적은 4개짜리 사조룡, 세손은 삼조룡을 옷에 수놓아 신분을 표시했습니다. 그래서 왕이 입는 옷을 오조룡의(五爪龍衣), 세자의 옷은 사조룡의(四爪龍衣)라고 했는데요, 당연히 오조룡이나 사조룡의 그림을 민간에서 쓰는 것은 일종의 반역에 해당되는 중죄였으니, 동래 부사가 사조룡을 보자마자 세자의 신분을 깨달을 수밖에 없었겠죠.

 

 

7) 신체발부수지부모(身體髮膚受之父母)

  3화에서 역병 괴물로 변한 일가족의 안전한 뒤처리를 양반 생존자들이 극렬히 반대할 때 들었던 이유가 바로 이 ‘신체발부수지부모’였습니다. 한자를 풀이해보면 ‘신체와 털과 살갗(=신체발부)’은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다(=수지부모)’라는 말인데요,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몸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 효도의 시작'이라는 공자님의 가르침이죠. 그래서 조선시대에는 참수형, 거열형, 궁형 같이 신체에 손상을 주는 형벌을 가장 치욕적인 형벌로 여겼다고 합니다.(제 생각에는 치욕은 둘째치고 너무 끔찍하고 고통스러워서도 사라져야할 형벌 같습니다만...) 어쨌든, 그래서 머리카락도 자르지 않고 길러서 상투를 틀거나(남자), 비녀를 꽂아(여자) 유지하고, 심지어는 손발톱을 깎는 경우에도 뒤처리를 몹시 조심스럽게 해야 해서 불에 태우거나 변소에 버렸다더군요. 우리나라 전래동화 중에 손톱을 깎고 아무데나 버렸다가 그걸 먹은 쥐가 손톱 주인으로 둔갑해 그 사람을 쫓아내는 얘기가 있는 것도 이것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8) 조운선(漕運船)

 

  고려/조선 시대에 조운(조세로 거둬들인 곡물을 물길로 중앙의 세곡 저장 창고로 옮기는 것)에 사용되던 선박입니다. 깊이가 얕은 강을 따라 내륙으로 이동 가능하면서 연안 해변도 항해할 수 있어야 했기에 바닥이 평평한 평저선일 것으로 추측된다고 하네요. 배의 크기와 규모의 차이는 있었겠지만 기본적으로 전투선과 운송선을 겸할 수 있는 형태였을 것이므로 임진왜란 때의 전투선인 판옥선의 구조와 비슷할 거라고 합니다.

 

 

9) 착호군

 

  호랑이를 사냥하기 위해 결성되었던 조선의 실존 부대로, 부대원은 '착호갑사'로 불렀습니다. 조선 건국 초부터 19세기까지 명맥을 이어온 정예 부대인데요,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때에도 활약했으며, 일제강점기에는 대다수가 만주로 이동해 의병 활동에 가담했다고 하네요. 청산리 전투에서 전과를 올린 홍범도 장군도 착호군 출신이라는...

 

 

10) 수망촌

 

  이 나환자촌의 명칭은 실존이라기보다 드라마에서 붙인 애처러운 이름(‘수망(壽望)’이 ‘목숨(壽)을 바라다(望)’라는 뜻...)이긴 한데요, 흔히 나병이라 불리는 한센병의 경우 외관에서부터 환자임이 드러나기 때문에 전 세계 어디에서나 집단 격리 생활을 해야했습니다. 구약성서 레위기에도 한센병 환자에 대해서는 격리 조치를 하는 걸 볼 수 있는데, 기원전 1,500년 경에도 그리했으니 조선시대야 말할 것도 없겠죠. 『조선왕조실록』에 세종과 문종 때 한센병 환자를 격리 치료 및 수용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고 하니 촌락의 이름이야 어찌되었든 수망촌과 같은 거주지는 전국에 산재해 있었을 듯합니다.

 
취소

댓글쓰기

저장
덧글 작성
0/1,000

댓글 수 0

댓글쓰기
첫 댓글을 작성해주세요.

PRIDE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