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한 계기로 나에게 온 책「일상의 낱말들」, 아마도 이 책은 나와 인연인가보다 하고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보들보들한 종이의 질감에서 따뜻함이 느껴지고, 표지의 라디오에서는 뭔가 휴식같은 음악이 흘러나올 것만 같다.
안수연 라디오 피디님의 제안으로 각자 다른 일상을 버티고 누리며 살던 네 분의 작가님이 일상을 이해하고 성찰 할 계기를 가지며 이 책을 집필하게 되셨다고 하는데 각 낱말마다 김원영, 김소영, 이길보라, 최태규 작가님 순으로 글이 수록되어 있다. 16개의 일상의 단어들에 대한 작가님들의 닮은 듯 다른 이야기들을 읽으며 나의 일상의 단상들도 함께 떠올리며 읽었다.
첫번째 일상의 낱말은 <커피>. 공연을 하고 글을 쓰며 변호사로 일하고 계신다는 김원영 작가님은 휠체어를 타시는데 대학생 시절 두 손의 자유를 가질 수 없어 캔커피를 고집하셨으나 까다롭고 예민하기로 유명한 법대 도서관에서 공부하던 시절, 문 앞에 붙은 포스트 잇 " 캔 좀 조용히 따세요. " 문구에 흠칫하셨다는 커피에 대한 일화를 소개하신다.
어린이와 함께 책을 읽는다는 김소영 작가님, 독서 교실에 처음 온 어린이들에게 일부러 수동 커피 그라인더로 커피콩을 드드득 갈며 커피 내리기 시연을 하신다고. 그리고 자신만의 '복잡해서 좋은 것'을 말해주신다고 한다.
글을 쓰고 영화를 만드신다는 이길보라 작가님, 어떤 단어나 문장, 표현을 만나면 얼굴 표정과 손을 움직여 생각하시는데 본인은 수화언어, 수어를 모어로 하는 코다(Children Of Deaf Adults)라고 하시며 수어로 커피는 비슷하게 생긴 단어인 '코피'를 소환하여 '코피'와 '차'라는 단어가 합쳐진 수어는 어쩐지 코피를 저어 마시는 것 같아 으스스 하다고.
동물복지를 공부하는 수의사 최태규 작가님, 서울 도심에서 동물원이 되어 버린 야생동물 카페에 혐오감 외에 다른 감정을 느끼기 어려운 장소라며 서로가 안녕한 세상에서 커피는 더 향긋할 것 같다며 동물이 살 만한 카페는 없다고 말씀하신다.
20년차 회사원인 나에게 '커피'는 각성제이자 사랑의 표현이다. 업무로 한참 정신없이 돌아가는 사무실, 직장 동료가 자그마한 수동 커피 그라인더를 손에 들고 천천히 손잡이를 돌리며 드르륵 드르륵 갈면서 스몰톡을 건넨다. 회사에 자동 커피 머신이 있는데도 수동 커피 그라인더를 사용할 생각을 한 그 친구의 발상이 상당히 신선하게 다가온다. 정신없이 바쁜 회사 생활이지만 잠시나마 찰라의 여유를 가지고 싶어 그랬을까? 사실 커피 맛을 잘 모르는 나는 커피를 마시지 않았었다가 지난 10년간 온갖 프로젝트와 업무의 고단함에 찌들게되면서 어느새 커피를 숭늉처럼 마시고 있다. 업무을 해야해서 각성이 필요할 때면 에너지 드링크도 찾아서 먹을 정도로 나의 음료 취향은 완전히 바뀌었다. 커피나 에너지 드링크를 즐겨서라기 보다는 내 몸을 각성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했다는 편이 맞겠다.
주말이면 우리 가족은 산으로 바다로 캠핑이나 여행을 떠난다. 주말 아침이면 아이가 엄마를 사랑하는 마음을 담아 수동 커피 그라인더로 커피콩을 갈아주고 남편이 커피를 내려준다. 모두 남편의 제안으로 시작된 일인데 남편도 고된 회사생활에서 잠시 벗어나 커피콩을 가는 낭만을 즐기고 싶어한 것이 아닌가 짐작해본다. 오늘 아침에도 나를 사랑하는 마음이 가득 담긴 아이와 남편표 라떼가 배달되었다. 김소영 작가님 말씀대로 어떤 때는 복잡할수록 재미가 있는 법이다. 처음에 언뜻 생각했을때는 '그걸 뭐 하러 그렇게 하느냐' 하고 타박을 한 적도 있는데 지금은 신통치 않은 솜씨이지만 엄마를 사랑하는 마음을 담아 커피콩을 갈고, 아내를 사랑하는 마음을 담아 커피를 내려주는 그들의 마음이 담긴 커피를 마시면서 잔잔한 행복을 느낀다. 무엇이든 좋아하는 게 있으면 번거로운 과정도 즐겁게 느껴진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서라는 김소영 작가님의 말씀이 마음에 와 닿았다.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들었던 낱말은 <아침>이었다. 출퇴근이 없는 한겨울의 어느 주말 아침, 함박눈이 펑펑 내려 눈꽃이 장관인 강원도의 한적한 오솔길을 홀로 걸었다. 사방이 눈꽃으로 둘러싸인 아무도 밟지 않은 시골길을 걸으며 혼자만의 아침 산책을 즐겼다. 뽀도독 뽀도독 내가 눈 밟는 소리 밖에 들리지 않는 조용한 가운데 오늘 아침의 하루치 좋은 기운을 나혼자 모두 마신 기분이었다. 최태규 작가님의 말씀을 빌자면, 해가 뜰 무렵 태연하게 일어나 무언가에 늦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갖지 않아도 되는 날, 언제든 자고 싶을 때 잘 수 있는 그런 날, 일찍 일어나 일을 해야하는 평일 아침과는 달리 조용히 나만의 아침 산책을 즐길 수 있는 이런 일없는 주말 아침이 주어짐에 그저 감사했다. 문득 내가 중학생이던 시절에 인상깊게 봤던 영화 <바라과 함께 사라지다>의 주인공 스칼렛 오하라의 말이 떠오른다.
Tomorrow is another day.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떠오른다.
김원영 작가님이 말씀하신 아침을 기다리라는 드워킨의 이야기와 맞닿아 있는 느낌의 말이다. 우울하고, 슬프고 아무리 애를 써도 삶이라는 거대한 무의미 앞에서 감당하기 어렵다는 생각에 사로잡히더라도 아침을 기다리면 된다는 이야기. 아무리 노력해도 때로는 거대한 허무와 절망, 슬픔에 빠지지만, 무려 매일 찾아오는 아침이 있으니 오늘도 힘내라고 말해주는 것 같다.
연말이면 회사에서 법정 의무교육이라고 해서 다양성과 포용을 강조하며 교육을 실시한다. 열린 마음으로 주변을 바라보자는 좋은 취지와 다름을 받아들이는 따뜻한 시선을 가지자는 취지로 이루어지는 교육으로 알고 있는데 거의 형식적인 느낌이라 좀 더 의미있는 시간이 되려면 다름에 대한 이해가 쌍방향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네 분의 작가님들의 경험과 함께했던 열여섯 가지「일상의 낱말들」을 다 읽은 지금, 편안한 일상의 단어들이 누군가에게는 결코 편하지 않을 수 있음을 공감하며 뭔가 묵직함이 느껴진다. 유쾌하지 않지만 일상에서 일어나는 차별과 불편함들이 씁쓸하기도 하다. 이 책을 읽으며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사회적 약자들이 느끼는 불편함에 관한 이야기들이 너무나 많음에 반성의 마음을 가지게 되었고, 무엇보다 사람들의 인식을 바꾸기 위해 더 많이 노력해야겠다 싶었다. '다른 각도의 삶'을 탐색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면, 버티는 삶을 살면서 세계를 조금 더 높이서 조망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그리고 편견과 차별없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다양성을 받아들이고 포용하는 사회를 만들고자 하는 마음을 함께 나누고 싶은 사람이라면 이 책을 한 번 읽어 볼 것을 추천한다.
일본 문화와 한국문화가 다른 것처럼 농인과 청인의 문화 역시 다른 것이겠지요. 다름 속에 몸을 맡기는 일은 때로는 황당하고 민망하지만 아주 유쾌하고 웃기기도 합니다. 다름이 주는 새롭고 놀라운 관점을 더 많이 발견하고 싶습니다.
식물이나 동물은 물론이고 사람들과의 관계도 오직 '쓸모'에만 초점을 맞춘 채 살아가고 있다면, 특별한 용도 없이 태어난 물건을 소중히 다루던 어린 시절의 마음도 필요할 때가 있지않은가 생각합니다.
* YES24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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