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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바나의 시민들

[도서] 아바나의 시민들

백민석 저

내용 평점 4점

구성 평점 4점

 

유명한 도시, 관광 명소에서 사진을 찍을 때마다 문득 드는 생각이 있다. ‘저 사람들과는 어떤 인연이 있어서 이런 모습으로 만나게 된 걸까.’

 

 

돌이켜보면 아무 상관 없는, 어쩌면 존재조차도 몰랐을 저 사람들이 하필이면 이 낯선 곳, 이 낯선 시간에 나와 마주치고, 그것도 모자라 우연히 내 사진 추억 속 한 조각으로 남게 된 걸까. 물론, 그들은 어디까지나 내 사진의 배경일 뿐, 중심은 아니다. 내 사진 프레임의 초점은 대부분 관광지의 건물, 조각상, 그리고 함께 여행한 일행들의 모습에 맞춰져 있다.

 

 

소설가가 쿠바의 수도 아바나를 여행하고 써내려간 이 여행 에세이에 수록된 사진은 우리가 흔히 ‘여행사진’ 하면 떠올릴 만한 것들이 아니다. 예쁜 풍경, 여행자들의 마음을 홀릴 만한 멋진 배경 같은 건 많지 않다. 일상에서 만났다면 그냥 지나칠 법한 순간을 정지 화면에 담아낸다. 이를테면 낚시꾼의 뒷모습, 파도에 벽이 심하게 깎여 패인 가정집, 그 곳에 널린 낡은 빨래, 배나온 아저씨, 공연을 하는 거리의 예술가, 공원에서 점심을 먹는 어린 학생들의 모습이 그것이다. 정작 여행자인 작가 본인은 아예 프레임 안에 없다. 철저히 관찰자의 입장에서 바라본 그 곳 사람들, 지금의 아바나를 만들어가는 이들, 이방인인 자신을 바라보는 그들의 눈빛을 담는다.

 

 

작가의 여행법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모범적 여행’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여행 책자, 블로그로 미리 공부한 여행지 정보를 확인하는 여행이 아니다. 여행을 주제로 한 책이지만 여기서 아바나 여행 정보를 얻을 거라 기대하면 안 된다. 아바나 지도는 책 맨 뒤에 가서야 겨우 한 장 정도 나올 뿐이다.

 

 

 

한 마디로 이 여행은 호흡이 굉장히 느리다. 느림의 극치다. 백팩을 메고 숙소를 나선 작가는 하루 종일 산책하듯 길을 걸으며 아바나의 뜨거운 태양을 온몸으로 느낀다.(책을 보면 버스 같은 탈 것도 잘 이용하지 않는 것 같다.) 여행 가이드북을 챙겨가진 했지만 별로 들춰보지는 않는다. 길을 걷다가 중요해 보이는 건물, 왠지 멋져 보이는 거리와 만나더라도 그 곳이 어떤 의미를 가진 장소인지 애써 찾아보거나 물어보지 않는다. 광장 근처 공연을 위해 설치된 상설 무대 옆면에 쓰인 글귀가 무슨 뜻인지조차 한참 후에야 알 정도다.

 

 

하지만 이렇게 느리게 여행하는 덕분에 시간대별로 바다의 색깔이 바뀌는 것을 관찰할 수 있다. 또 한가로이 길을 걷다(혹은 헤매다) 생각지도 않았던 미술품 시장을 찾게 되는 행운을 누릴 수도 있다. 비록 이렇게 우연히 가게 된 곳은 다시 가려면 찾을 수 없을 때가 많긴 하지만 말이다.

 

 

작가는 소설가답게 걷는 행위를 읽는 것에 비교한다. 읽는다는 것은 곧 이해하는 것. 마치 먹물을 머금는 붓, 물을 빨아들이는 스펀지처럼 아바나 곳곳을 직접 걸으며, 몸과 머리 속에 천천히 아바나를 스미게 하는 그런 방식으로 작가는 걷고 여행한다.

 

 

물론, 이런 느린 여행법은 그 곳이 다름 아닌 ‘아바나’였기에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외부인들에게 경계를 쉽게 허물고, 관대하게 자신의 모습을 내어주는 자유로운 곳, 숨가쁘게 일상을 살아내는 한국인들이 온몸을 던져 다소 지루해질 수도 있는 여유로운 곳. 많이 알려지지 않았기에 신비롭고, 그래서 언어만으로는 충분히 표현하기 어려운 그런 곳 말이다.

 

 

그래서 이 여행은 아바나의 역사나 명소, 맛집에 주목하지 않는다. 앞서 말했듯이 이 여행의 볼거리는 바로 아바나에 사는 사람들이다. 아바나에는 성난 파도, 뜨거운 태양, 이국적인 느낌의 거리, 사회주의 냄새 물씬 나는 광장도 있지만 아바나를 아바나답게 하는 것은 결국 그 곳의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다. 작가의 이러한 생각은 다음 구절을 보면 분명해진다.

 

 

 

당신은 공항에서 한국 사람들을 만났다. 중남미 패키지 여행을 온 이들로, 아바나를 떠난 멕시코 칸쿤으로 갈 참이었다. 아바나에는 3박 4일 있었다고 했다. 당신이 좋았냐고 묻자 아바나에는 뭐 볼만한 자연경관이 없잖아, 라고 했다.

 

물론 아바나에 맞추픽추, 이구아수 폭포, 팜파스 소 떼 같은 건 없다. 너무 짧게 다녀오셨네요, 당신은 말한다. 아바나의 진정한 볼거리는 자연경관이나 유적보다 길거리를 걸어 다니는, 아바나의 현재를 구성하는, 과거를 짊어지고 미래를 향해가는 시민들인데(136p)

 

 

 

아바나의 태양처럼 붉은 책 표지도 인상적이지만 본인을 ‘당신’으로 지칭하거나 카메라 대신 ‘기계 눈’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작가의 표현법도 그렇고, 차분하고 절제돼 있는 여행의 분위기가 읽는 이에게 느긋함과 평온함을 선사한다. 단순히 좋다, 싫다라는 말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독특한 느낌의 에세이다. 작가정신 출판사의 ‘슬로북’ 시리즈의 첫 번째 책이라고 하는데 어떤 콘셉트의 슬로북들이 이어질지 궁금해진다.

 

 

여행 가방에 넣어 가서 가는 길에 읽어도 좋고, 어디론가 떠나지 않더라도 그냥 편안한 쇼파에 기대 나른함을 즐기며 읽어도 좋다. 책 속 사진을 지금 자신만의 뷰파인더로 보고 있다고 생각해 보자. 작가와 함께 아바나의 골목길을 걷고 있노라면 저절로 힐링이 될 것만 같은, 그래서 지금같은 황금 휴가철에 손에 잡으면 딱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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