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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 파이 이야기

[도서] 일러스트 파이 이야기

얀 마텔 저/토미슬라프 토르야나크 그림/공경희 역

내용 평점 5점

구성 평점 4점

 

#얀 마텔 #작가정신 #북리뷰 #일러스트파이이야기 #라이프오브파이 #신간 #추천도서 #서평 #열여섯 인도소년의 227일간 태평양표류기 #벵갈호랑이와함께 #LIFE OF PI

 

 

여기, 참으로 대단한 열여섯 소년이 있다. 이름은 피신 몰리토 파텔.(줄여서 파이 파텔) 배 난파 사고로 가족을 다 잃고 망망대해에 홀로 남아 227일간을 버티다 극적으로 뭍에 닿은 소년. 그냥 표류한 것도 아니고 맹수 중의 맹수인 벵갈 호랑이 한 마리와 함께 생활했단다.

 

 

인도 폰디체리에서 동물원을 운영하던 아버지가 경영난으로 캐나다 이민을 결정하면서, 파이네 가족들은 동물들과 함께 화물선 침춤호를 타고 인도를 떠난다. 하지만 항해 도중 거센 폭풍우를 만나 침춤호가 침몰되고 가련한 소년 파이는 구명보트에 홀로 남게 된다. 아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벵갈 호랑이 ‘리처드 파커’도 동행한다.(함께 타고 있던 하이에나는 얼룩말과 오랑우탄을 연이어 잡아먹다 결국 리처드 파커에게 먹혔다.)

 

 

주인공 파이가 처한 상황은 실로 절망적이다. 사고로 온 가족을 다 잃고 ‘살아서 뭐하나’ 싶을 만큼 슬픔에 잠겨 있다가도, 이 슬픔을 제대로 추스를 겨를도 없다. 당장 사나운 벵갈 호랑이와 함께 어떻게 구명보트를 공유해야 할지를 떠올려야 하는 위급한 처지다. 어디로 가야 육지가 보일지, 언제 구조될 수 있을지, 그때까지 저 호랑이는 날 먹어치우지 않을지, 아무 기약도 할 수 없다. 게다가 바다 날씨는 왜 이렇게 사납고 변덕스러운가. 모든 것이 예측 불가능하고 위험하고, 고통스럽다.

 

 

 

 

 

 

파이는 절망을 어떻게 희망으로 바꿨을까. 우선 삶에 대한 의지가 매우 강했다. 그리고 그의 의지를 다지는 데에는 신앙의 힘이 컸다. 파이는 힌두교 집안에서 자랐지만 성당에도 다니며, 빵장수 아저씨를 따라 이슬람교에도 발을 들였다. 이도저도 아닌 짬뽕 교인이라며 손가락질도 받지만 ‘그저 신을 사랑할 뿐’이라는 이 인도 소년은 표류 중에도 매일 기도를 멈추지 않았고 신이 함께 계신다는 것을 믿었다.

 

 

아이러니하지만 리처드 파커도 파이가 삶에 대한 의지를 불태우게 한 존재다. 처음엔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 고민했지만 나중에 호랑이와 공존하기로 택한 파이는 그를 먹여 살리기 위해 사냥을 하고, 조련하고 길들이기 위해 영역 표시, 위계서열 세우기 등을 해나간다. 그를 위해 분주하게 움직인 덕분에 227일을 바다에서 버틸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포기하고 있었다. 마음 속에서 울리는 목소리가 없었다면 완전히 포기했을 것이다. 그 목소리는 말했다.

 

“난 죽지 않아. 죽음을 거부할 거야. 이 악몽을 헤쳐나갈 거야. 아무리 큰 난관이라도 물리칠 거야. 지금까지 기적처럼 살아났어. 이제 기적을 당연한 일로 만들 테야. 매일 놀라운 일이 일어날 거야. 아무리 힘들어도 필요하다면 뭐든 할 테야. 그래, 신이 나와 함께 하는 한 난 죽지 않아. 아멘.”(227p)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강하게 사로잡힌 장면은 크게 세 가지였다.

 

 

첫 번째는 동물원 우리 속 동물에 대한 새로운 시선이었다. 사람들은 흔히 우리 안에 ‘갇힌’ 동물이 행복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약육강식의 위협에서 벗어나 안전함과 풍요로움이 보장되는 동물원 생활을 굳이 나쁘게만 볼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일단 동물원에 익숙해지고 나면 야생은 ‘미지의 세계’가 된다는 발상이 신선하게 느껴졌다.

 

 

두 번째는 느리게 지나쳐야만 비로소 볼 수 있었던 바다의 매력이었다. 온갖 바다생물이 오가는 바다, 오묘한 빛으로 가득찬 밤의 바다를 러시 아워의 도시로 묘사하는 장면이 꽤 인상적이었다. 화물선을 타고 갈 때는 보이지 않다가 구명보트로 천천히 걷듯 지나가니 전혀 다른 것을 볼 수 있었다며 표류를 마치 행운처럼 묘사하는 부분은 해학이 넘친다.

 

 

 

마지막은 열린 결말에 대한 것이다. 천신만고 끝에 멕시코에 도착한 파이가 배의 침몰 원인을 규명하기 위해 방문한 해운회사 직원에게 두 가지 버전의 표류기를 들려주고 나서 ‘어떤 이야기가 마음에 드는지’ 묻는 대목에서는 잠시 의아해진다. 지금까지 손에 땀을 쥐며 봤던 이야기가 정말 맞는 건지 되묻고 싶은 심정이 된다.

 

 

결국 진실은 알 수 없고, 각자 믿고 싶은 내용을 믿게 된다는 것, 믿음의 근거는 그저 자신의 기준이라는 점을 떠올리면서 역설적으로 ‘이야기’라는 것이 가진 힘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됐다.

 

 

 

슬쩍 내려다보고서도 나는 바다가 ’도시‘임을 알아차렸다.

 

내 바로 아래에, 사방에 상상도 못했던 고속도로, 대로, 좁은 도로, 교차로가 있었다. 해저 통행객이 우글우글했다. 복잡한 바다에는 얼룩 반점이 있는 번들거리는 플랑크톤 수백만 개가 점점이 박혀 있었다. 트럭, 버스, 승용차, 자전거, 보행자처럼 정신없이 내달리는 물고기 떼는 경적을 울리고 소리를 질러댔다...  나는 열기구에서 도시를 내려다보는 사람처럼 도심의 혼잡을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놀랍고 경외심을 일으키는 광경이었다...

 

화물선 침춤호에서는 돌고래 떼만 보였다. 화물선이 물고기 떼를 보지 못할 만큼 빨리 달렸기 때문이라는 것을 그 후에 알았다. 큰 배에서 바다를 보는 것은, 차를 타고 도로를 달리면서 숲에 사는 야생동물을 보는 것과 마찬가지임을...

 

야생동물을 보고 싶으면 걸어야 한다. 조용히 걸어서 숲을 탐사해야 한다. 바다도 마찬가지다. 태평양에 사는 풍요로운 바다생물을 구경하려면, 걷는 속도로 천천히 노닐어야 한다.(266~268p)

 

 

 

‘파이 이야기’가 호랑이와 소년의 공존, 혹은 우정에 대한 이야기로 보이진 않는다. 맹수는 어디까지나 맹수일 뿐이고, 소년이 호랑이를 길들이는 데 성공했다고 어렵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파이의 표류, 험난한 구조 이야기에 초점을 두고 있지도 않다. 소년의 모험을 담은 판타지이기도 하고, 자연의 신비를 들려주기도 하며, 신앙의 힘을 이야기할 때는 경건한 철학서 같아 보이기도 한다. 마치 먹음직스런 각종 사탕이 가득 들어있는 사탕 바구니 같다고나 할까. 이렇게 다채로운 스토리들이 영화화되었으니 영화가 상업적으로 흥행한 것은 물론이고 아카데미상을 휩쓴 건 어쩌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마침 이번에는 일러스트가 포함된 개정판으로 출간되어 새로운 느낌으로 읽었다. 2005년 파이이야기 일러스트 국제 공모전에서 수상한 크로아티아 작가 토미슬라프 토르야나크의 작품이라고 한다. 중간 중간에 수록돼 있는 총 40여장의 일러스트는 비록 사실적 묘사가 뛰어나다거나 하진 않지만 매우 강렬한 색감이 인상적이다.

 

 

덕분에 파이가 겪은 일들, 사실인지 환상인지, 혹은 그 경계에 있는지 모호한 모든 것들을 효과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시각적인 즐거움을 선사한다. 소설가 얀 마텔도 ‘그림의 구도가 모두 파이의 시선으로 바라본 일인칭적 묘사여서 좋다’며 아주 마음에 들어 했다고 한다.

 

 

 

파이의 길고 고단한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고독, 극한의 굶주림과 갈증 속에서 인간은 어디까지 긍정할 수 있는가 생각해보게 된다. 나에게는 과연 저런 종류의 괴로움과 공포를 잠재울 용기, 의지가 있을까.

 

 

 

 

또 하나. 우리가 본 대로, 들은 대로 믿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는 대로 믿는 세상에서 ‘진실을 믿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하나의 진실만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쩌면 ‘왜곡’이라는 것도 함부로 말해선 안되는 것 아닐까. 여러 생각을 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세상은 있는 모습 그대로가 아니에요. 우리가 이해하는 대로죠. 안 그래요? 그리고 뭔가를 이해한다고 할 때, 우리는 뭔가를 갖다 붙이지요. 아닌가요? 그게 인생을 이야기로 만드는 게 아닌가요?”(459~46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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