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블로그 전체검색
빗살무늬토기의 추억

[eBook] 빗살무늬토기의 추억

김훈 저

내용 평점 4점

구성 평점 4점

불은 인간이전부터 있었다. 인류의 기원이 시작된 홍적세(洪積世)부터 불은 환경을 지배해 왔다. 따라서 모든 불은 새롭게 태어난 낯선 종족이 되어 불가해한 춤으로 화세(火勢)를 확장한다. 수만 년의 인간의 역사가 진행되는 동안 기술을 전수 받지 못한 진화를 멈춘 유인원처럼 불을 끄는 행위는 무모하기 짝이 없으며, 방열복을 입은 소방관은 직립이각보행을 처음 배운 유인원의 형상인 것이다. 따라서 홍적세의 영장류부터 발전 해온 인간의 인식기능은 불과 사투를 벌일 때만큼은 멈추어 버린다. 불은 인간에게 이기(利器)를 가져다준 축복인 동시에 일거에 파괴하는 악마로 지금까지 존재해왔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칠천 년 전에 만들어진 빗살무늬토기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돌칼과 돌도끼 등 진화된 도구로 신석기혁명을 이룬 풍요의 산물이다. 손을 보고 만들었다는 돌칼은 손이 할 일을 대신하며, 결국 마음이 할 일을 대신하는 정신의 지배로까지 이어진다. ‘마셜 살린스󰡔신석기 시대의 경제󰡕에서 도구는 인간 신체의 인위적인 확장이며, 지금 노동자의 노동이 기계를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기계의 공정을 보충한다고 했다. 오히려 기계의 공정이 노동자를 이용하는 시대라는 것이다. 빗살무늬토기의 시대 이후부터 촉발된 인간의 풍요가 현재는 어떻게 타락해 가는가를 소설은 말하려 하는 듯하다.

빗살무늬토기는 불의 산물이다. 신석기인들은 불을 다루면서 정주하게 되고, 잉여의 생산물을 토기에 보관하여 나름의 자본을 형성하게 되었다. 그때그때 일용할 양식만큼 수렵과 채집하던 단순 경제활동이 자본이 축적되면서 무자비한 약탈이 시작되었고, 정주하면서부터 부족과 다른 부족 간의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돌칼과 돌도끼에서 시작된 인간의 문명은 스스로 주인이 되지 못하고 소외와 종속으로 매몰되었다. 작가는 이 모든 것이 불에서 시작되었다고 판단한 것 같다.

군 제대 후 삼년 동안 포클레인과 불도저를 운전한 경력이 있는 초임 소방관인 장철민의 죽음은 불과 연관이 되어 있다. 손 모양을 보고 만든 돌칼이 신석기인에게 발전의 축이었다면, 장철민은 손처럼 생긴 포클레인을 노련하게 다룬 변화와 발전의 선봉장이었다. 자의든 타의든 중기운전을 그만둔 장철민이 소방관으로 채용되어 화재현장 최일선에 특공조로 배치된다. 그는 화재현장에 투입될 때마다 최성기의 화재와 맞닥뜨리며 불의 진원지를 파괴하여 화인(火因)을 깡그리 없애는 행위를 반복한다. 결국 소방 소장과 화재 방면책임자의 진입금지 명령을 어기고 홀로 화점(火點)에 접근하여 화재의 원인이 될 만한 증거들을 모조리 인멸한다. 장철민의 이해할 수 없는 행위는 여러 가지 의문이 남는다. 포클레인을 운전한 장철민은 무한궤도의 중기의 힘을 지탱하지 못했다. 그것은 세상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는 청맹과니의 힘이었고, 그것을 통해 밥으로 치환시키는 세상의 질서 속에서 설 자리를 잃어버렸거나 노동이 노임으로 대체되는 질서를 수락할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수렵과 천렵으로 시작한 신성한 노동은 이제 노임이라는 화폐로 매매되는 상품이다. 노동은 치열한 삶의 방편이라면 노임은 얍삽한 규칙으로 인간을 모멸한다. 장철민이 화재를 진압하다가 죽은 임해공단 태평양중공업의 관태루(觀太樓)는 임금체불로 노사분규가 있었던 곳이다. 아마도 관태루는 자본이 집적된 장소성이 다분한 곳이다. 장철민이 발화점을 물로 지워버린 이후라서 화재원인은 진상조차 모르는 상황이지만, 노동자들에게 관태루는 탁 트인 전경을 조망하는 곳이 아니라 모든 것을 차폐(遮蔽)하고 지켜야 하는 마지막 보루였으며 종국에는 불로 항거했는지 모른다.

해수관음상의 조형을 본떠 만든 관태루는 소방 소장이 유년시절 보았던 소방망루와 확연히 다른 장소이다. 소방망루 꼭대기에서 불을 살피던 한 점으로 수렴되는 소방관의 모습을 보면서 설명되지 않는 적의(敵意)와 맞서는 가녀린 힘과 두려움에 몸서리치던 유년의 가위눌림을 떨치며 위안을 얻었다. 적의의 장소인 관태루와 위안의 장소인 소방망루의 대치는 너는 왜 소방관이 되었는가?”라는 질문에 온당한 해답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평생 불을 끄면서 먹고 사는 소방 소장은 서른 살에 소방관이 되어 서른두 살에 죽은 장철민의 무모한 죽음을 세 가지의 소회로 드러낸다. 확연히 드러나는 것은 조직 내부적으로는 항명에 의한 독직이고, 외부적으로는 숭고한 희생의 순직이다. 마지막으로 장철민의 죽음을 요절보다는 자연사의 관점으로 바라보는데, 발화점 너머에서 펼쳐지는 중첩된 적대관계 속으로 건너갈 수 없었던 원시인의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일 것이다. 장철민이 포클레인이나 불도저를 몰고 흙에서 노임으로 건너갈 수 없었듯이, 관창을 겨누면서 불에서 발화점으로 건너갈 수 없는 한계에 봉착한다. 아마도 장철민은 인간의 노동을 노임으로 대체한 근원을 불에서 찾은 듯하다. 발화점을 향하여 무모하게 공격성을 보인 것도 그런 이유로 보인다. 원시인은 마지막까지 자신과 가족의 생계에 전념하다가 죽어갔을 것이다. 그것은 적대관계에 의한 죽음이 아니라 신성한 노동의 현장에서의 죽음이다. 따라서 당시 죽음은 노임관계에서 일어나는 순직(殉職)이 아니라 끝까지 삶을 놓지 않은 자연사인 것이다. 서툰 직립이각보행을 하는 장철민은 그렇게 죽었다.

장철민이 화재현장에서 직접 구조한 맹인 안마사 김복희에게 집착을 보인 행위를 보면 또 다른 해답을 찾을 수 있다. 장철민과 김복희는 소방 소장이 아이들과 신석기 박물관의 디오라마(diorama)에서 보았던 직립보행이 서툰 신석기 시대의 남녀인 것이다. 남자가 사냥물을 들고 돌아오면 여자는 불을 피워 고기를 굽고 아이들은 입바람을 불어 불씨를 돋우는 삶은 인간의 진화되지 않은 유전 형질인지 모른다. 장철민이 알함브라호텔 화재현장에서 습득한 돈을 김복희에게 주택 구입대금으로 지불하도록 한 점은 움집살이를 하는 원시인의 꿈에서 비롯됐을 것으로 짐작된다. 도배까지 의뢰한 집은 장철민이 죽은 사실을 안 김복희의 투신자살로 입주하지 못하지만, 원시의 신성한 삶을 지탱하는 움집이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깨달았기 때문에 뒤따라갔을 것이다.

장철민과 김복희의 소박한 꿈은 남자는 수렵을 위해 밖으로 나가고, 거수(巨獸)에 취약한 여자는 움집에서 빗살무늬토기에 밥을 담아 내놓는 유순한 삶을 그렸는지 모른다.

 

 

 
취소

댓글쓰기

저장
덧글 작성
0/1,000

댓글 수 0

댓글쓰기
첫 댓글을 작성해주세요.

PRIDE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