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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4월 19일,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민주주의 혁명으로, 1960년 3 · 15 부정 선거를 통하여 영구 집권을 획책하던 이승만과 자유당 정권의 12년간에 걸친 장기 집권을 종식시키고, 제2공화국을 출범시킨 역사적 사건이다. 혁명의 발단은 이승만 정권의 지속되는 부패와 독재 속에서 경제가 침체되는 와중인 1960년 3월 15일에 실시된 정 · 부통령 선거가 부정과 타락으로 치루어지면서이다. 부정 선거를 규탄하는 마산 시위에서 실종된 김주열 군이 마산 앞바다에서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시체로 발견되었고, 이에 흥분하여 전국적인 시위가 일어났다. 4월 18일, 고려 대학교 학생들의 시위가 반공 청년단에게 습격받는 사건이 일어나자 다음날 약 3만 명의 대학생과 고등학생들이 시위를 벌였고, 이에 대응하여 경찰이 발포하여 130여 명이 사망하였다. 4월 25일에는 대학 교수 시위가 있었으며, 4월 26일 드디어 이승만이 대통령직을 포기하는 하야 성명을 발표하였다. 4 · 19 혁명이 성공하자 내각제를 기반으로 한 민주당 정권이 들어섰고, 어느 정도 정치적 자유가 허용되었으며, 혁신 정당의 활동과 통일 논의가 활성화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민주당의 내분과 5 · 16 군사 정변으로 미완의 혁명에 그치고 말았다.

6·25 전쟁을 치른 뒤, 이승만 정부는 강력한 반공 정책을 추진하면서 독재 정치를 강화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어. 이승만이 총재로 있던 자유당은 각종 부정을 저질렀을 뿐만 아니라 이승만의 장기 집권을 위하여 무리하게 헌법을 개정하고 부정 선거를 실시하였지. 1956년에 치러진 제3대 대통령 선거는 이승만이 대통령 후보로 나오면 안 되는 선거였어. 당시 우리나라 헌법에 의하면 대통령은 4년 임기에 1차에 한하여 중임할 수 있었지. 따라서 8년에 걸쳐 1, 2대 대통령을 한 이승만은 법적으로 제3대 대통령을 뽑는 선거에 나올 수 없었어. 그러나 자유당은 이승만의 장기 집권을 위하여 3선 금지 조항을 폐지하는 법안을 국회에 올렸고, 야당의 극심한 반발을 애써 무시하며 이 법안을 통과시키려 했어(1954.11.27). 자유당은 서울대 수학과 교수의 의견을 얻어 수학의 ‘4사 5입론’을 적용했어. 203명의 2/3인 135.33명은 논리적으로 성립되지 않으며, 0.33이란 자연인으로 존재할 수 없으므로, 반(半)도 안 되는 소수점 이하는 삭제하는 것이 이론상 옳다고 주장하며 법안이 통과되었다고 공표해 버렸지(4사5입 개헌). 이러한 우여곡절을 거치며 이승만은 3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어. 하지만 국민들의 마음은 이미 이승만을 떠나 있었어. 당시 야당인 민주당은 대통령 후보로 신익희를, 부통령 후보로 장면을 내세웠지. 국민들은 이번에는 야당으로 정권을 교체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어. 그러나 선거 유세 도중에 민주당 대통령 후보 신익희가 갑자기 죽어 민주당은 후보를 내지 못하였고, 선거 결과는 1위 이승만, 2위 조봉암이 되고 말았어. 한편, 부통령 선거에서는 민주당 후보인 장면이 자유당 후보인 이기붕을 누르고 당선되어 여당 출신 대통령에 야당 출신 부통령이 한 정부에서 일해야 하는 불편한 동거가 시작되었지. . 조봉암은 대통령 선거 기간 내내 ‘평화 통일’을 주장했지만, 이승만은 조봉암을 자신의 라이벌로 간주하여 결국 간첩으로 몰아 사형시켜 버리기까지 했어. 6·25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라, 북한에서 보낸 간첩이라 하면 국민들이 적개심을 가지고 대한다는 사실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자신의 정치적 반대자를 숙청시켜 버린 거지. 이 사건 이후로도 정부는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정권 시대까지 자신들의 정권을 유지하기 위하여 간첩 사건을 자주 조작하였으며, 자기들 맘에 들지 않는 사람은 빨갱이로 몰아 감옥에 가두거나 입에 자물쇠를 채워 정권에 대한 비판을 하지 못하도록 만들었어. 한 민족이 이념 때문에 남과북으로 갈라져서 서로 대립하다 보니 생기게 된 코미디 같은 비극이었지. 자유당 정권의 부정 선거는 1960년 3월 15일에 치러진 정·부통령 선거 때 더욱 심해졌어. 자유당은 대통령으로 이승만을, 부통령으로 이기붕을 당선시키고자 대대적인 부정 선거를 자행했어. 부정 선거의 방법은 매우 다양했지. 막걸리나 고무신을 사주고 자유당을 찍게 한 것은 부정의 축에도 끼지 못할 정도로 부패가 심한 선거였어. 3명이나 9명을 한 조로 묶어 서로 감시하면서 자유당을 찍게 하였고, 투표를 하러 오지 못한 사람의 투표 용지를 자유당 사람들이 임의로 도장을 찍어 투표함에 넣었으며, 개표장으로 이동하는 도중에 투표함을 바꿔치는 등, 도저히 선거라고 할 수 없을 정도의 부정이 전국에서 이루어졌어. 자유당의 이러한 부정 선거에 국민들은 가만있지 않았어. 자유당 정권 퇴진을 외치며 전국 각지에서 항의 시위가 벌어졌어. 그런데 경상남도 마산에서 경찰이 시위대 해산을 위해 쏜 최루탄에 고등학생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어. 경찰은 학생의 죽음을 감추기 위하여 시체를 마산 앞바다에 버렸지만, 며칠이 지나 시체가 떠오르면서 사람들은 경악했지. 시위는 더욱 격렬해져서 ‘이승만은 물러 가라.’를 외치며 더욱 강하게 시위를 벌였어. 정권 퇴진 시위는 4월 19일에 절정에 달하였고, 이승만 정부는 확산되는 시위를 진압하기 위하여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대까지 동원했지만 정권의 운명은 벼랑 끝에 서 있는 상황으로 몰리게 되었어. 결국 이승만은 더 버티지 못하고 4월 26일에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겠다.” 라는 하야1) 성명을 발표하고 하와이로 망명을 떠나야 했어. 3·15 부정 선거에 반발하여 전국 각지에서 일어난 국민들의 항의 시위가 4·19 혁명을 만들어 내었고 그 결과 국민들은 독재 정권을 무너뜨리고 민주주의의 새 역사를 열 수 있게 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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