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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버지 박지원

[도서] 나의 아버지 박지원

박종채 저/박희병 역

내용 평점 4점

구성 평점 4점

아들이 울며 삼가 쓴 아버지의 이야기

 

연암의 둘째 아들 박희병은 4년여 동안 심혈을 기울여 <과정록>의 초고를 집필했으며, 그 후 몇 년에 걸쳐 수정에 수정을 거듭하여 이 책을 완성하였다. 그 책을 서울대 국문학과 교수인 박희병이 번역과 주석작업을 하였다. 박희병은 "영국에 셰익스피어가, 독일에 괴테가, 중국에 소동파가 있다면 우리나라에는 박지원이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우리나라 중세기만이 아니라 근대문학까지 포함시켜 박지원을 최고의 대문호라고도 한다. 나는 68권째로 읽은 인문실용소설인 <연암에게 글쓰기를 배우다>를 아주 인상깊게 읽었고, 그 후 연암에 대한 책을 찾아 읽으려 애쓰는 과정에서 이 책 <나의 아버지 박지원>을  알게 되었다. 

 

<과정록>이라 함은, 자식이 아버지의 언행과 가르침을 기록한 글이라는 뜻이다. 연암의 아들 박종채의  "병자년(1816) 초가을에 불초자 종채가 울며 삼가 쓴다."는 문장이 가슴을 깊게 훑었다. 아버지의 문장들에서 살아 생전 아버지의 흔적과 숨결이 얼마나 울컥울컥 전해져 왔으며 부친을 향한 그리움이 얼마나 사무쳤으랴! 그래서인지 청소년기에 아버지를 여읜 내게 이 문장이 덜컥, 마음의 고리에 걸리었나 보다. 아버지의 발자취를 제 손과 마음으로 어루만지며 정리하는 동안 박종채는 분명 행복에 겨웠으리라. 자식이 정리하였으니 버리고 선택하는 데 있어 사사로운 감정이 얼마나 들어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연암 박지원의 면모에 대해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임에는 틀림이 없을 것이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생각했다. 첫째는 연암의 '인간 됨됨이'로서 그가 바라보는 삶에 대한 태도나 인품등에 관한 것이고 둘째는 그의 정서로서 '풍류'에 대한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세번째는 그의 '문장'에 대한 것이다.

 

 

 

 

박지원의 손자 박주수가 그린 초상화를 보면 그림 전체에 대장부의 호방한 기운이 흘러 넘친다. 장군과도 같이 골격이 장대하고 마음 씀씀이 또한 그에 못지 않게 거칠 것이 없어 보인다. 인품 또한 아주 큰 그릇의 인물로 비춰진다.  

 

아버지는 타고난 성이 호방하고 고매했으며, 명예와 이익이 몸을 더럽힐까봐 극도로 경계하고 삼가하셨다. 중년에 과거시험을 단념하자 사귀는 벗 또한 많지 않아 오직 담헌 홍대용, 석치 정철조, 강산 이서구가 수시로 서로 왕래하였으며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이 늘 따라 어울리며 배웠다.(34쪽)

 

그는 과거장에 들어가 시험을 보고도 답지를 내지 않는 경우도 많았고, 제출한다 해도 이름을 쓰지 않았다. 그 만큼 그는 명예나 권세나 물욕을 멀리하였다. 자식들에게도 "너희들이 장차 벼슬하여 녹봉을 받는다 할지라도 넉넉하게 살 생각은 하지 말아라. 우리 집안은 대대로 청빈하였으니, 청빈이 곧 본분이니라."라고 가르쳤다. 그래서 평생 가난을 친구로 삼았으니 자손들의 고생이 어떠했을지 짐작이 간다. 연암에게 가르침을 받았던 이현겸이라는 자가 이렇게 말했다.

 

"하루는 선생님께서 우리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자네들이 책을 읽는 데에 부지런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글의 뜻과 이치에 깊이 파고들지 못하는 건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닐세. 평소 과거시험의 글을 익히던 버릇이 종이와 입에서 떠나지 않고 있어, 그것을 벗어나 사색하지 않기 때문이지. 자네들이 진실로 나를 따라 배우고자 한다면 마땅히 하나의 과정을 정하도록 하게. 그리하여 매일 경서 한 장과 주자의 '강목' 한 단을 빨리 읽거나 외우려 하지 말고, 자세히 음미하고 정밀하게 생각하여 토론, 분변함이 좋겠어.' 이때부터 여러 사람들이 선생님의 가르침을 좇아 배운 지 수년 만에 비로소 학문의 즐거움을 알게 되었지요."(41~41쪽)

 

이것이 과연 18세기에 한 말이라니, 현재 우리 청소년기의 학생들에게 아주 정확하게 들어맞는 말이 아니런가. 대학입시 위주의 학업이나 취업하기 위해 도서관에서 고군분투하는 젊은이들의 얄팍한 공부,  스펙을 쌓기 위한 유학 등 진정한 학문의 즐거움과 사색과는 거리가 아주 먼 우리 현사회의 젊은이들에게 말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술을 좋아했던 연암은 풍류 또한 좋아했다. 벗들과 악기를 연주하며 흥취를 돋아 달빛을 즐길 줄 아는 인물이었다. 누군가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장대한 기골과는 어울리지 않게 그가 얼마나 섬세하고 부드러운 정서를 가졌는지도 알 수 있다. "사흘 간이나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바라에 어여쁘던 살구꽃이 죄다 떨어져 땅을 분홍빛으로 물들였구려. 긴 봄날 우두커니 앉아 혼자 썅륙놀이를 하고 있사외다."(260쪽) 그의 만년, 연꽃이 필 무렵 아들 종채에게 벗들을 불러 반지(독립문 북쪽에 있던 반송지라는 못)에 나가 밤에 핀 연꽃을 구경하게 했는데, 연암은 함께 가겠다는 말이 없었다. 다음 날 새벽 달이 밝고 이슬이 내려 시원할 때 연암은 지계공과 함께 걸어서 서쪽 성곽으로 나가서 달빛 속에 연꽃을 감상하였다. 그는 그날 종일 소요하다가 돌아왔다. 아들 종채는 이를 두고 아버지가 깨끗하고 드넓은 마음을 지녔다고 말한다.

 

뛰어난 문장을 구사했던 박지원의 문장론에 대해서 쓰자하면 지면이 부족할 정도이다. 그 가운데 내 맘에 드는 것을 몇 가지만 소개하려고 한다.  글은 그 사람의 인품이 묻어난다. 연암은 "남을 아프게 하지도 가렵게 하지도 못하고, 구절마다 범범하고 데면데면하여 우유뷰단만 하다면 이런 글을 대체 얻다 쓰겠는가."(186쪽)라고 했다. 호방하고 기개있는 연암의 기질이 그대로 드러난 말이다. 평소 의론이 곧고 바른 그의 성품도 알 수 있다. 또한 연암은 옛 것과 새로운 것을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도록 하는 글쓰기, 한 쪽에 치우침이 없이 적절한 균형을 이루는 글쓰기를 강조하기도 한다. 옛것과 새로운 것을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도록 하는 글쓰기, 한 쪽에 치우침이 없이 적절한 균형을 이루는 글쓰기를 강조하는 있는 대목이다.

 

옛을 본뜨는 사람은 그 자취(겉모습이나 형식)에 구애됨이  병폐이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사람은 법도가 없음이 폐단이다. 진실로 옛것을 본받으면서도 변통할 줄 알고 새로운 것을 만드어내면서도 법도가 있다면 지금의 문장은 옛 문장과 같을 수 있을 것이다.(180쪽)

 

역자 박희병이 말하는 연암의 글쓰기에 대한 다음 내용은 글을 쓰고자 하는 사람이 깊이 새겨 둘 내용이다. 나는 이 내용을 보면서 작가 김훈을 떠올렸다. 마치 김훈의 글쓰기를 두고 말하고 있는 듯 하다.

 

연암은 어떤 글자가 가리키는 대상(=사물)의 생생한 움직임과 그 미묘한 내적 본질을 꿰뚫어 볼 때 비로소 그 글자를 아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며 대상에 대한 창조적, 예술적 인식이 수반될 때에만 가능한 일이다. 연암은 사물과 문자의 인식주체간의 이러한 긴장과 통일을 대단히 중시하는 입장이었으므로, 단순히 한자의 음과 훈을 아는 것만으로는 그 글자를 진정으로 아는 것이라고 할 수 없다고 여겼다.(55쪽 주석)

 

창작의 기쁨을 누릴 줄 아는 사람,

뜻이 맞는 이들과 조금술잔을 기울이다가 글 잘 읽는 의젓한 젊은이의 낭랑한 소리로 시를 읊게 하고서는 

길게 누워 글에 대한 감상을 듣는 연암의 여유로운 미소가 눈에 선하다.

 

이제는 그와 같은 멋진 풍류객을 어디서 다시 만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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