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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 1

[도서] 토지 1

박경리 저

내용 평점 5점

구성 평점 5점

외모 결핍 사랑 결핍에도 불구하고 목공예의 일인자로 등극하다라는 제목으로 꼽추 조병수를 만납니다. 꼽추는 허리가 둥글게 굽어 등이 혹처럼 튀어나온 사람을 일컫습니다. 꼽추라는 멍에를 짊어지고 살아가는 병수를 통해 깨달은 바는, 인류가 이기적이어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타성을 버리지 못하고 지금까지 끌어안고 살아온 이유입니다.

 

꼽추 장애는 어찌하여 병수의 것이 되었으며, 또 어찌하여 파렴치한이 병수의 부모가 된 것일까요? 병수는 자신을 낳아준 부모, 조준구와 홍씨에게조차 업신여김을 당해야 했던 존재였습니다.

 

조병수를 일러 꼽추도령이요 천치 바보요 오줌도 가릴 줄 모른다는 사실과 억측 속에 인간 폐물로 추호의 동정 없는 낙인 찍힌 존재다.

 

외모로써 인간 본질을 파악하는 것이 얼마나 그릇된 오류일 수 있는지를 소설은 여지없이 펼쳐내 보여줍니다. 또 자식은 그 부모와 판이하게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을 가차없이 드러내기도 합니다.

 

기괴스런 병신이지만 얼굴은 천상의 동자같이 깨끗하다. 부모들과는 딴판으로 어떤 성령이 그의 속에 깃들어 있는 것처럼 정하고 귀하게 보인다.

 

귀녀는 자신이 당한 모욕을 잊지 않고 원한을 품고 복수를 단행했습니다. 그렇지만 꼽추 병수에게 모멸은 너무나 일상적이다보니 원한이 되지 못했을까요? 모멸의 언사는 허공에 흩어질 뿐 병수에게 스며들지 못합니다. 꼽추인 자신으로써 도저히 응징할 힘이 없기에 수모를 당하더라도 애써 모른 척했던 것일까요? 약자의 처세술로써 말입니다.

 

병수는 자신의 장애보다도 부모가 남의 재물을 갈취하는 악행이 수치였습니다. 간악한 부모가 먹여주고 입혀주고 재워주는 대로 도저히 살아갈 수가 없어 거리로 뛰쳐나옵니다. 양반 자제 병수가 거리에서 구걸하는 거지 신세를 자처하게 된 것입니다. 꼽추 장애에 걸맞은 자립은 거지가 되는 것이라고 여겼을 수 있습니다. 아무리 부모가 악행으로 재산을 모았다고 하더라도 그 덕분에 얻게 되는 안락한 의식주를 박차고 뛰쳐나오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절대 아닙니다. 거지 행세를 하는 병수를 아버지 조준구는 병신이라고 칭합니다.

 

그놈이 이 애비 얼굴에 똥칠을 하느라 유리걸식을 한다더구먼.”

조씨 어른께서 좀 거두면 그렇게 됐겄소?”

아니오. 그거는 그렇지가 않소. 거둔다고 그것 받을 놈이 아니오. 그놈은 애비가 망하고 무일푼 되기만을 고대하는 게요. , 병신이면 병신답게 엎드려 있지 못하고.”

어디서 들은 얘긴데 요즘엔 소목 일을 배우고 있다 하더마요.”

소목일, 그거 유리걸식보담은 낫구먼. 하하하 핫핫핫.”

 

꼽추라는 장애를 가진 병수가 자립한다는 것은 예사로운 일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부모가 마련해주는 의식주를 과감하게 포기합니다. 고생스럽게 떠돌다가 마침내 소목일을 만나게 되고, 그 일로 차츰 자립에 이르게 됩니다. 떳떳한 자립은 곧 병수에게 자기 구원이었을 수 있습니다. 악덕한 부모의 돈으로 목숨을 부지하지 않아도 되니 말입니다. 병수에게 소목일이 얼마나 보배로웠을지는 능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병수가 소목일의 일인자가 되는 것은 따 놓은 당상에 틀림없어 보입니다.

 

병수는 거리의 걸인으로 나서기 전에 굶고 싶지만 먹게 되었고, 죽고 싶지만 살게 되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죽은 것도 산 것도 아닌 그 중간지대에는 꼽추인 자신에게 시집을 온 아내가 있었고 두 아이들이 있었습니다. 최참판댁 마당에서 술래잡기를 하고 나비를 쫓아다니는 두 아이조차 거리로 나서고자 하는 병수의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했습니다. 병수 내면에서 일렁이는 파도를 가족이라고해서 잠재울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병수는 이타성을 발휘하기 위해 먼저 이기적이어야 했습니다. 가족을 떳떳하게 건사하기 위해서라도 자립이 다급했던 것입니다. 꼽추인 몸으로라도 밝게 자라는 아이들을 더 밝게, 찌푸려져 있는 아내의 얼굴을 화사하게 펴주기 위해서라도 거리로 나서야 했습니다.

 

꼽추 도령 병수가 장가든 그때는 쌀밥이요 고기반찬이었을 테지만 울면서 밥을 먹어야 했던 병수였다. 일종의 희생물로 바쳐진 병수의 아내 되는 사람은 더더구나 삶에 대한 무의지가 질병처럼 스며들어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시초부터 상전 되기를 거부해왔고 먹는 것을 거부해 왔으며 사는 것을 거부해온 병수는, 그러나 상전이기도 했고 자신을 저주하면서도 밥을 먹었으며 죽지도 못했다. 먹고 마시고 사는 일은 무의미했지만, 먹고 굶는 중간지대에서, 죽고 사는 중간지대에서, 엉거주춤한 생각은 퇴화해 갈밖에 없었다.

병수는 죽음으로 줄달음치고자 하는 발작이 일 때마다 죽지 않으려는 비명, 죽으려는 몸부림의 파도가 일었다. 언제나 조용하고 무시무시하게 조용한 집안은 썩은 물이 고인 웅덩이요 나태와 오수의 온상이었다. 다만 두 아이들이 봄풀을 뜯고 술래잡기를 하고 나비를 잡고 햇볕을 쬐며 자라고 있는 것이다. 찌푸린 것이 아니라 항상 찌푸려져 있는 얼굴의 아내는 막대기처럼 무표정, 무신경, 처참했다. 찌푸려진 얼굴에는 인간적인 느낌이라곤 한 오라기 찾아볼 수 없다. 벽돌짝처럼 말뚝처럼 굳어진 모습이다.

 

사실 병수는 자신처럼 몸이 온전하지 못한 사람과 혼인을 하고 싶어 했습니다. 장애를 가진 사람끼리 다정다감하게 지내는 혼인을 상상하면서 얼굴을 붉히고 혼자 슬몃 웃었던 적이 있습니다.

 

내가 어찌 서희한테 장가를 든단 말이냐? 나같이 병신 계집애가 있다면 내 색시 삼아서, 눈물도 닦아주고 신발도 신겨주고 맛난 복숭아도 따다 주고 또오 또오...... ’

 

하지만 병수의 그 바람은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두려워하는 엄마 홍씨가 병수를 서희와 혼인시키려고 다그쳤던 적이 있습니다. 재물에 대한 욕망을 채우는데 유리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병수는 그때 유순하지 않았습니다. 서희와의 혼인 추진에 죽기살기로 반대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병수가 서희를 어여삐 여기지 않았던 것은 아닙니다. 병수는 서희가 보고 싶어서 대숲쪽 담장에 난 조그만 구멍을 통해 별당 뜰을 몰래 들여다본 적도 있습니다.

 

병수는 대숲을 걷다가 걸음을 멈춘다. 담장 가까이로 행복해진 얼굴을 가져간다. 조그마한 구멍에 한쪽 눈을 바싹 갖다 댄다. 한쪽 눈이 비친 곳은 별당 뜨락이다. 서희 모습이 나타났다. 병수 눈빛이 환해진다.

가엾은 서희......하늘의 선녀라고 저렇게 어여쁘게 생겼을까.’

병수 눈에 눈물이 글썽인다.

내 이 병신만 아니더면...... 이 세상 끝까지 너를 따라가겠다! 내 이 병신만 아니더면 너도 나를 싫어하지는 않았을 거야. 가엾은 서희, 너를 위해 나는 무엇을 하리. 부끄럽다! 부끄러워. 이 집도 살림도 땅도 모두 서희네 건데...... 우린 비렁뱅인데, 네 말대로 비렁뱅인데 말이야!’

눈물에 흐려 서희 모습이 물감처럼 번져난다.

 

도련님. 거기서 뭘하시오?”

노기에 찬 길상의 눈이 쏘아보고 있었다. 병수의 얼굴은 사색이다. 평소 준수했던 길상이 무시무시한 살기를 뿜어낸다. 다음은 웃었다. 살기보다 무서운 모멸의 웃음이다.

병신 육갑한다 카더니마는 흥! 그 말이 조금도 그르잖구마. 꿈도 꾸지 마시오. 하늘을 우러러보고 땅을 굽어보고 물어보시오. 될 법이나 한 일이오? 천지개벽이 있어도 우리 애기씨는 안 될 기요!” 하는데 길상의 얼굴은 입술빛까지 하얗게 질린다.

, 꿈에도, , 그런 생각은. , 나는 서희가 불쌍했을 뿐이야. , 꿈에도, 아 아버님이 굳이 혼인하라신다면 나, 나는 죽어버릴 테야.”

도련님? 정말로 그리 생각하시오? 정녕 그렇소?”

정말이야. 정녕! 죽어버릴 테야. 맹세하겠어. 나는 죽어버릴 테야. 아무도 용서할 수 없는 일이야. 난 그걸 알어. 어째 길상이는 그걸 몰라주니?”

그러믄 와 이런 짓을 하시오?”

, 너무 이뻐서. , 나 난 말이야. 누이동생이 예, 예뻐서 말이야. 길상아. 내 이 수치스런 짓 아, 아무에게도 말 안 하겠지?”

, 입 밖에 내지 않겄십니다.”

병수는 흐느껴 운다. 울음은 격렬해져서 경기들린 아이처럼 전신을 떤다. 길상은 병수를 번쩍 안아 올리더니 대숲을 빠져나간다.

 

병수가 서희를 지켜봤던 적은 또 있습니다. 봉순이와 서희가 별당 연못가에 앉아 울음을 터뜨릴 때도 바라봤습니다. 봉순이가 죽은 엄마가 보고 싶다며 먼저 울기 시작했습니다. 울면 무슨 소용이 있냐고 의젓하게 달래던 서희에게, 봉순이는 온 집안이 떠들썩하도록 엄마 데려오라는 떼를 썼던 서희의 어린 시절을 들먹입니다. 그랬더니 서희는 꾸욱 잠재웠던 엄마에 대한 그리움을 폭발시키고 맙니다. 억눌러있었을 뿐 욕망은 사라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서희는 발딱 일어섰다. “너만 엄마가 죽었니! 너만 엄마가 죽었냔 말이야!”

서희는 땅바닥에 주질러 앉아 울음을 터뜨렸다. 울부짖고 새파랗게 질리고 눈을 까집으며 까무라칠 지경이다. 어릴 적 그대로의 패악이었다. 봉순이도 함께 울음을 터뜨린다.

 

꼽추 도령 병수가 신기한 듯이 얼굴을 기웃이 내밀고 있었다. 투명하고 창백한 얼굴에 커다란 눈이 울부짖는 서희 모습을 지켜본다. 기괴스런 병신이지만 얼굴은 천상의 동자같이 깨끗하다. 달밤에 이슬만 먹고 자란 풀잎처럼 가냘프다. 조준구의 모습이 없는 것은 아니나 부모들과는 딴판으로 어떤 성령이 그의 속에 깃들어 있는 것처럼 정하고 귀하게 보인다.

 

별안간 서희는 울음을 그쳤다. 병수를 보았던 것이다. 눈을 부릅뜨고 병수 가까이 걸어간다. 병수 얼굴에 손가락을 겨누며

비렁뱅이 병신! 네가 내 신랑이 되겠다 그 말이냐?”

홍당무가 된 병수는 어떻게 해야 좋을지를 모른다.

가아! 다시, 두 번 다시 별당에 얼씬거렸다간 당산나무에 매달아서 때려죽일 테야!”

광태며 파격의 행동이다. 열한 살이면 행세하는 집안의 규수로서 그런 언동은 상상키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병수 눈에는 엄마를 보고싶어 하는 서희의 애처로움만 보일 뿐, 양반 규수로서의 허물은 보이지 않습니다. 서희에게 병신이라는 욕을 들은 이후에도 여전히 서희를 가여워하고 아름답게 여기며 살았으니 말입니다. 그나저나 어미가 보고 싶어서 울어대는 서희와 봉순이를 바라보는 병수의 심사는 어떠했을까요? 서희와 봉순이가 간직하고 있는 어미에 대한 정을 병수로서는 도무지 경험한 바가 없었으니 서희와 봉순이가 신기하게 보였을 법합니다. 병수 의식 속에는 어미에 대한 두려움과 혐오감이 깊이 박혀 있을 뿐입니다. 찢긴 작은 눈에 흰자위가 가득한 무서운 얼굴을 가진 어미 홍씨는 공포의 대상일 따름입니다. 병수는 서울 골방에 갇혀 살던 그 시절의 무서운 어미의 모습을 떠올립니다.

 

언제였던지 뚜렷이는 기억할 수 없다. 서울 있을 때의 일이다. 빈집에 낯선 손님이 찾아왔었다. 병수는 햇빛을 따라 골방에서 마루까지 기어 나왔다. 따스한 초봄 햇빛을 받고 앉았는데 졸음이 왔다.

아이구 이게 누구야? 우리 병수도련님이구먼. 어릴 때 내가 안아 주곤 했었는데, 관옥 같은 얼굴에........가엾은 병수.”

중년의 점잖은 여인은 슬픈 눈이 되었다가 눈에 눈물이 핑 돌았다. 등 뒤에서 병수를 노려보던 어머니는 여인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여인은 주머니 속에서 은전 한 닢을 꺼내어 병수 손에 쥐여 주었다. 문간까지 바래다주고 돌아온 어머니는 병수를 쥐어박았다.

하필이면 손님이 와 있는데 마루까지 나올 건 뭐람? , 창피스러워서.”

 

심심했던 병수는 은전 한 닢이 신기하여 골방 속에서 이틀을 가지고 놀았다. 은전이 큰 궤짝 밑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그러다가 병수는 은전 잃은 것을 잊었다. 다음 날 어머니가 나타났다.

너 아주머님한테 받은 은전 내놔.”

병수는 두려운 생각 때문에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몇 번인가 쥐어박힌 뒤 궤짝 밑에 들어갔노라 했다. 궤짝을 들어내어 은전을 찾은 뒤에는 뺨을 두 차롄가 맞았다. 그런 일이 있은 후 병수는 어머니 장롱 속에 은전이 가득 들어 있는 것을 보았다.

 

홍씨는 은전을 욕망하는데 온 힘을 쏟느라 자식은 안중에 없습니다. 에너지가 고갈되어 재물 이외에는 마음이 가지지 않습니다. 게다가 홍씨에게 꼽추 병수는 사랑스러운 아들이 아니었습니다. 홍씨는 자신의 자랑스러운 깃발이 되어주지 못하는 자식과 남편에 대한 결핍을 재물에 대한 욕망으로 대신했을 수 있습니다. 홍씨는 재물의 화신이 되면서 어머니도 되지 못하고 아내도 되지 못하는 길로 들어서게 된 것입니다. 재물 소유에 집착하고 중독되면서 사람의 도리는 망각되어 갔을 듯합니다.

 

골방에서 지냈던 병수가 최참판댁으로 내려왔을 때는 열두 살이었습니다. 당시 서희는 열 살이었습니다. 최치수는 죽고 윤씨부인은 아직 살아있을 적입니다. 그렇지만 병수는 윤씨부인께 자기 존재를 알리지 못했습니다. 조준구와 홍씨가 창피스러운 마음에 인사를 시켜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조준구가 나귀에서 내리고 뒤따르던 가마 두 틀이 멎는다. 놀라운 광경이 벌어졌다. 홍씨가 타고 온 가마 뒤켠에 마치 짐짝같이 내버려져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았던 가마 속에서 뭔지 모르는 이상한 것이 엉금엉금 기어나왔던 것이다. 그것은 아이였었다. 분명 사내아이임에 틀림이 없다. 얼굴을 봐서는 여남은 살쯤 된 것 같았고 평생 햇빛이라곤 받아본 일이 없었던지 종잇장처럼 창백한 얼굴이었다. 꼽추였었다. 아이는 어머니를 두려워하는 듯 계집종 곁에 가서 치마폭 속에 몸을 숨기듯 하며 눈만 내밀고 사방의 형편을 경이에 찬 표정으로 살펴보는 것이었다. 길상이는 움직일 줄 모르고 처참한 광경을 지켜보고 서 있었다. 해맑은 눈동자에는 어떤 의문의 빛도 없었으며 얼굴은 아름다웠다. 계집아이같이 입술은 빨그레했다.

 

어두운 골방에 갇혀 살던 십대 소년 병수에게 최참판댁과 평사리는 심신을 고양시켜 주는 밝은 무대가 됩니다. 비록 부모가 재물 갈취를 도모하고자 결정한 평사리행이었지만 자식 병수에게는 골방에서는 도저히 맛볼 수 없었던 풍부한 빛과 넓디넓은 공간을 선사했던 것입니다. 부모의 나쁜 의도가 자식에게 좋은 기회로 작용되어질 수 있다니 세상사 오묘할 따름입니다.

 

서울에서의 골방살이에 비한다면 평사리는 넓고 넓은 천지였다. 그는 시시로 뒷산에 올라 하늘과 강물과 숲과 들판을, 철 따라 다양하게 변모하는 자연을 볼 수 있었고 날짐승 들짐승 뭇벌레들, 사철의 식물들을 볼 수 있었고, 먼발치로 들일 하는 농부들의 생태도 볼 수 있었다. 가두어진 생활에서 일시에 밀어닥친 외계의 상황은 그런 만큼 신선하고 강렬했을 것이다. 목마른 나무가 물을 빨아올리듯이 새로운 환경은 그에게 숱한 지혜를 주었고 생각을 풍부하게 해주었으며 사물을 판단하는 능력을 길러주었다.

 

불타 없어진 누각 빈터에 쭈그리고 앉아서 마을을 내려다보며 병수는 생각한다. 산에 오르면 늘 하는 생각이다.

생각할수록 모르겠어. 어째서 세월을 간다 하는고? 사람들을 한 해가 가고 한 해가 온다고 말들 한단 말이야. 아니야. 끝이 없을 건데, 시작도 없을 건데 어째 시간이 있단 말이야? 세월이 어디 있다고 금을 긋고 길이를 재느냐 말이야? 날마다 해는 동쪽에서 서쪽으로 가고, 그게 세월이란 말일까? 그래서 사람들은 늙어가고 죽고 또 아이가 태어나고 자라는 걸까? 세월, 시간, 그게 뭐길래? 알 수 없군. 세월은 바람일까? 바람이 사람들을, 이 세상에 있는 것을 어디로 자꾸 몰고 가는 걸까?’

 

병수는 무슨 다른 재미나는 생각이 없을까 하고 눈을 멀리 보낸다. 눈에 비치는 것은 모두가 새롭고 신기하다. 말없는 자연과 마주하고 있으면 샘처럼 온갖 공상이 솟아나 그를 즐겁게 해준다. 슬픈 일을 생각할 때도 슬프지 않다.

 

와아, 병수는 자연의 품에서 결핍을 승화시킵니다. 상처를 치유합니다. 결핍과 상처를 운과 복으로 전환시키고 있습니다. 어머니 홍씨가 결핍을 재물로 채웠다면 병수는 자연과의 관계 맺기로 결핍을 날려버립니다. 결핍이 흩어진 그 자리는 고독할 수 있는 여유로 채워집니다. 고독은 자연과의 충분하고도 각별한 관계 맺기를 선물합니다. 누구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는 꼽추이기에 오롯이 자신의 주인이 되어 자연을 만납니다.

자연과 친구 되니 자연을 철저하게 이해하게 되고, 그 통찰 속에서 병수는 자기 자신을 불쌍하고 부끄러운 병신이 아니라 온전한 꼽추 인간이라는 자연의 일부로 받아들였음 직합니다. 보호받아야 할 미숙한 존재가 아니라, 비난받아야 할 기이한 병신이 아니라, 꼽추도 숱한 인간 자연중의 하나임을 깨닫고 꼽추답고도 인간다운 자신의 삶을 기획했을지 모릅니다. 자연과의 우정이 도타워질수록 꼽추라는 자신의 외모와, 사악한 부모를 만난 인연을 자연의 섭리로 납득하고 수긍했으리라 싶습니다.

 

병수는 자신을 꼽추로 태어나게 한 부모를 향해 원망하지 않습니다. 꼽추인 자신의 몸에 적응하면서 그냥 살아갑니다. 남과 비교하지 않으니 장애인 자신의 몸에 불만을 가지지도 않습니다. 꼽추와 하나되어 살아가니 장애가 장애로 여겨지지도 않습니다. 꼽추인 자신의 몸이 해낼 수 있는 활동을 찾아 자신의 존재를 만들어갑니다. 꼽추여도 자연과 놀고 책과 놀 수 있으니 병수는 그것들을 실컷 누립니다.

 

병수는 최참판댁 별채에서 글선생 이초시와 함께 생활합니다. 채마밭이 앞에 펼쳐진 별채는 예전에 윤씨부인 측근 김서방 부부가 살았었고, 서울에서 내려온 홍씨가 잠시 기거했고, 윤씨부인이 죽은 후 홍씨가 안채로 건너가자 별채는 병수 차지가 되었습니다. 병수는 별채에서 이어진 숲길을 오르내리고 책을 읽기도 하면서 별채 공간을 한껏 만끽합니다. 부모조차 잠시라도 들르지 않는 별채는 소외감을 자연과 책이 주는 사유로 가득 채울 수 있는 안성맞춤 공간이 됩니다.

 

게을러 빠진 것과 낮잠을 즐기는 버릇 이외 이렇다 할 특징이라곤 없는 이초시는 병수의 글 선생이다. 조준구와 홍씨가 얼씬거린 일이 없었으므로 누가 가타부타 할 사람도 없다. 애초부터 병신 아들, 면무식이나 하게 하자고 데려다 놓은 사람인 만큼 두 내외는 이초시에 대해서도 도통 관심이 없는 것이다. 시원찮은 선생이었으나 이초시한테 소학을 배우고 통감을 떼고 사서를 배우면서 도덕률에 의한 가치를, 인간 행위의 존엄성을 헤아리는 의지를, 지각하게 된다. 실로 병수는 옛날 성현의 글, 그 행간행간에 배어난 위대한 사상을 흡수하고 깨달으며 비약하고 상승해갔다.

 

병수의 공부는 신나고도 재미난 고군분투가 되었을 성싶습니다. 병수는 홀로 공부하는 속에서 더 부지런히 더 풍부하게 깨쳐나갔을 것입니다. 자칫 혼자하는 공부는 자기 고집을 더 공고히 하기 십상이라지만 병수는 우주 만물과 책의 행간들과 관계 맺고 사귀는 데에 바빠질수록 유연해져 갑니다.

항상 변하면서도 늘 그대로인, 자연을 향해 질문하고 소통하면서 병수만의 삶을 창조해 나갑니다. 대자연이라는 실제 현장과 이론적인 책이 다 함께 벗이 되어 주니 통찰과 안목은 일취월장하게 됩니다. 이는 글만 가르치고 게으른 이초시가 결코 당도할 수 없는 경지입니다.

 

가르치는 이초시는 게으름을 피워도 배우는 병수는 게으르지 않았습니다. 이초시가 게으른 것은 꼽추 장애를 가진 자신을 도외시하는 처사라는 것을 병수는 간파합니다. 자신에게 글을 가르쳐주는 선생에게서 무시를 당해야 하니 얼마나 마음이 허했을까요? 이초시는 직접 글을 가르치면서도 왜 병수의 성품과 능력을 인지할 수 없었을까요? 어쩌면 충분히 느꼈지만 그 느낌을 거부하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병수의 실력에 주눅이 들어 그의 장애를 무시할 수 없게 될까 봐, 그러면 마음놓고 게으름을 피울 수 없게 될까 봐 인정하기 싫었을 수 있습니다. 옹색한 이초시로서는 병수의 능력을 인정해 주는 순간부터 자신의 입지가 좁아질 것을 우려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서울서 열두 살까지 불구 자식을 수치로 아는 홍씨에 의해 세상 구경을 못하고 어두침침한 골방에서 자란 병수가 최참판댁에 내려와 자라지 않은 채 열다섯이 되었다. 자라지 않는 신체, 그 신체와는 반대로 정신의 성장은 이상하게 빨랐다.

 

대체로 신체적 불구자는 성한 사람들보다 감각이 예민하다고 한다. 병수는 감수성이 빨랐다. 직감은 정확했고 본능적으로 상대방의 특질을 파악한다. 단순히 선악의 기준에서 파악한다기보다 사람들 성격의 빛깔이랄까 분위기랄까, 느낌 같은 것이라 할까.

 

병수는 내심 이초시를 좋아하지 않고 길상이를 좋아합니다. 길상이는 티내지 않고 아무렇지 않은 듯 슬쩍 병수를 거들어주고 도와줍니다. 길상이는 이초시가 감지하지 못한 병수의 자질과 지성을 감지하고 있습니다. 꼽추 장애를 가졌지만 맑고 선량한 병수를 존중합니다.

 

꼽추 장애에 가려 병수의 자질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병수의 남다른 점을 감지하고 있는 길상은 많은 장님 속에서 눈뜬 사람의 하나라고나 할까. 한번은 높은 마루에 오르질 못하여 병수가 버둥거리고 있을 때 뒤에서 누가 안아 올려준 일이 있었다. 길상이었다. 그때 그의 눈에는 슬프고 따스한 것 같은 빛이 서려 있었지만 그 후 다시 무뚝뚝해지고 말았다. 그러나 병수는 길상이 좋았다.

 

대자연과 옛 성현의 책이 타인을 이해하고 배려하는 이타성을 함양시켰을까요? 꼽추 병수의 이타적인 감수성은 정말 남달랐습니다. 철 지나도록 울고 있는 매미를 안쓰러워하고 학대와 폭행을 일상적으로 겪고 있는 삼월이를 위로합니다. 자신이 더 가련할 수도 있는 꼽추 장애를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잊어버리고서 말입니다.

어쩌면 자신의 멍에나 고통을 잊게 하는 것이 이타적인 마음일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대안이 이타성일 수도 있음을 병수를 통해 배웁니다. 이타성에는 상처를 지우는 힘이 있는 듯합니다. 병수는 자신의 장애를 괴로워할 여가가 없을 뿐만 아니라 모욕을 당해도 가여워해 달라고 징징대지도 않습니다. 이타성을 발휘하느라 자신의 고통과 상처를 돌아본다든지 아파할 틈이 없습니다. 이기적이어야만 생존할 수 있었던 인류가 그 긴긴 역사 속에서 여전히 이타성을 부여잡고 있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을까요?

고통을 덜어내는 데는 이타성만한 것도 없을 것 같습니다. 고통을 덜어내지 않으면 살 수가 없고, 살려면 고통을 덜어내야 할 경우가 있습니다. 인류는 생존하기 위해 이기적이어야 했겠지만 생존하려면 또 이타적이기도 해야 했을 것입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남은 가족이나 다음 세대에 대한 이타성을 발휘할 때만이 덜어질 수 있으리라 싶습니다.

 

별채에서 병수는 글을 읽다가 고개를 들어 매미를 연민합니다. 안채와 별당 사이에 있는 팽나무 속에서 찢어지게 울어대는 매미를 말입니다.

 

여름도 다 가는데 여태 매미가 우네? 저러다가 찬 바람이 불면 어디로 갈까? 아마 죽어버릴 거야

병수는 늘 생각하는데, 귀청이 윙윙 울리도록 시끄럽게 울어대는 매미 소리가 싫지 않은 것이 이상했다. 어머니 홍씨의 악쓰는 목청을 들으면 전신이 오그라들 듯 무섭고 괴로웠는데 그보다 시끄러운 매미 소리는 왜 싫지 않을까 하고.

이슬만 먹고 사는 죄 없는 벌레니까, 사람들처럼 욕심부리고 싸우지도 않지. 그리고 여름이 가면 죽는 슬픈 신세니까 말이야.’

 

병수는 채마밭에 쭈그리고 있는 삼월이를 본다. 여전히 피멍이 든 얼굴이다. 어머니의 소행이거니, 병수는 언젠가 삼월에게 모진 매질을 가했던 어머니의 무서운 형상을 생각한다. 병수는 삼월의 멍든 얼굴이 자기 등에 짊어진 혹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한다. 눈으로 볼 수 없는 등의 혹에도 저와 같은 피멍이 있고 손톱으로 할퀸 핏자국이 있으리라 생각을 한다. 왜 그런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마당에 내려간 병수는

삼월아! 배출 뭘 할려고 그래?”

머하기는요? 김치 담을라고요.”

배추 다듬는 손을 멈추지 않고 대답한다. 뻔한 일이다. 뻔한 일을 물어보는 것은 삼월에게 말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날씨가 추워졌지?”

.”

병수는 빙긋이 웃는다. 무슨 말을 할까. 적당한 말이 없다. 가까이서 보는 멍은 자줏빛에 가깝다. 별안간 멍든 삼월의 얼굴을 쓸어주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울컥 치미는 애정, 정다운 마음.

밥 많이 먹었니?”

?”

삼월이 의아해하며 쳐다본다. 바보 도련님이 하는 소리거니 하고 다시 배추 진잎을 뜯어내고 다듬는다.

삼월아. 옛날에 말이야. 장화홍련 있잖어? 계모 땜에 죽은 형제 말이야.”

삼월이는 도통 관심이 없다. 병수 역시 들어주기를 바라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무심히 한 말은 아니다.

삼월아, 니가 그 장화 같단 말이야.”

.” 덮어놓고 삼월이는 대답한다.

그러면 나는 홍련이란 말이지?’

병수는 제깐에도 우스워서 하하핫 하고 웃다가 생각이 별안간 비약한다. 은전 한 닢.

나한테 은전이 있다면 첫째로 삼월이한테 주고 싶어. 그러면 삼월이는 애길 데리고 도망칠 수 있을 거야. 그러면 얼굴에 멍도 안 들고 목에 피딱지도 앉지 않을 거야. 왜 어머니는 삼월이를 노상 때릴까? 이젠 아기 낳은 어머닌데 말이야.’

 

윤보가 자신의 곰보 얼굴과 친하게 지냈다면 병수는 자신의 굽은 등에 적응하며 살았습니다.

윤보가 목조주택을 짓는 대목의 전문가였다면 병수는 가구나 문방구 등 목공예품을 만드는 소목의 일인자입니다. 윤보가 노총각으로 생을 마감했다면 병수는 아내와 두 아이를 둔 가장입니다. 게다가 온갖 악행을 저지르는 아비가 되어 병수에게 수모를 안겼던 조준구의 말년을 보살피기까지 합니다.

 

돌이켜보면 병수가 부모 때문에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지만 그의 삶에 부모의 노고가 영 없지는 않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꼽추 병수의 자립에 부모가 나름대로 기여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니 말입니다. 우선 병수에게 사람이라는 생명을 부여했습니다. 부모는 꼽추 장애를 가진 자식을 버리지 않았고, 골방에서 키웠지만 먹여주고 입혀주고 재워주었습니다. 생명을 지켜주었던 것입니다. 또 짐짝 취급이었지만 어쨌든 가마에 태워 평사리까지 데리고 왔습니다. 풍부한 햇빛과 호젓하게 오를 수 있는 뒷산을 선사해 주었던 것입니다. 별채라는 병수만의 아지트에서는 개인 글선생으로부터 글을 배우게도 해주었습니다. 자연과 책을 가까이 할 수 있게 해 주었으니 그것만으로도 부모의 큰 은혜를 입은 것이라 여겨집니다. 뿐만 아니라 꼽추 자식을 혼인까지 시켜주었으니 부모 노릇은 거의 한듯싶습니다. 아니 보통 수준은 능가한 부모 노릇에서 재력과 계층의 위력을 실감하게 됩니다.

 

이 시점에 이르고보니 누가 누구를 연민하고 누가 누구를 선망할 수 있단 말인가, 하는 질문을 품게 됩니다. 또 하나 더 던지게 되는 질문은 과연 온전한 인간, 정상적인 인간이란 어느 누구를 이르는 말인가,하는 것입니다. 양반가의 병수가 거리의 걸인에서부터 자립을 시작하는 용기와 꼽추 장애를 가진 그의 지고지순한 인간적 풍모를 보니 말입니다.


PRIDE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