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어와 베이징을 진짜 좋아했다. 처음에는 너무 오랜만에 학생이 되어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것이니 그런가 보다 했지만 그 정도로는 애정의 지속성을 보장하기 힘들다. 중국어 특유의 발음, 은유의 미학이 좋았다. 5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중국어를 가까이한다. 베이징이라는 도시도 마찬가지다. 백수가 되어 처음 노는데 어떤 도시든 안 좋고 배겨!라고 생각했는데 딱히 그렇지는 않았다. 넌 아프리카에 있었어도 사랑에 빠졌을 것이라는 친구의 핀잔을 아예 부인하지는 못하겠지만 역사가 깃든 공간들, 화려하지 않은 멋들이 묻어 있는 베이징이라 더 좋았다. (지금 베이징에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애정도가 감소했을까? 상해라면 확실히... -_-)
매일 베이징을 헤매던 당시 나는 베이징이라는 도시와 사랑에 빠진 기분이었다. 이 지저분하고, 때로 무모한 도시와 사랑에 빠지다니! 중국과 베이징을 향한 알 수 없는 반감을 가진 사람들이 종종 있었던 데다, 조국의 도시가 아니기에 나는 나의 사랑을 들키지 않으려 몸을 사렸다. 그것은 부모님 반대에 부딪힌 연인과 비슷하게 가끔 슬픈 감정을 안겨줬다.
이런 나를 완벽하게 이해할 동지를 태평양 건너에서 찾아냈으니 바로 <나이 들어 외국어라니>의 저자 윌리엄 알렉산더다. 윌리엄은 스물두 살 때 배낭과 유레일패스만을 달랑 든 채 프랑스에 다녀온 후 그 도시와 사랑에 빠지고 이런 문장을 썼다.
-마치 프랑스에서 사랑 벌레에 물리고 집에 돌아와 열병을 앓는 듯한 기분이었다.
맞아, 나는 무릎을 쳤다. 나의 몽롱한 상태를 설명해 줄 수 있는 단어는 ‘사랑 벌레’다. 나는 부지불식간에 그 벌레에 물려버린 것이다. 사랑 벌레는 약도 없다. 저자 소개는 더 나아간다.
-프랑스를 미치도록 사랑하는 남자가 있다. 심지어 꿈도 프랑스 꿈을 꾼다. 꿈속에서 그는 파리 어느 카페에 긴 스카프를 두르고 앉아 있다.
저도요, 저도요. 저도 베이징을 미치도록 사랑해요. 심지어 꿈도 중국어로 꾸고, 가끔 꿈속에서 중국인이 되기도 하지요.
이런 고백은 베이징을 너무 사랑해서 베이징 택시 기사 아저씨마저 부러워하는 S 언니와 윌리엄에게만 할 수 있었다. 프랑스어를 향한 윌의 열망은 실로 대단하다. 나는 서른다섯에 늦었다고 징징댔는데 그가 프랑스어를 제대로 배워보고 싶다고 생각한 때는 무려 오십일곱이었다. 게다가 그는 프랑스어 스트레스로 심방잔떨림과 심실빈맥 증상까지 앓는다.(고 스스로 믿고 있다, 물론 의사는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
수많은 난관을 물리치고 어렵게 프랑스어에 매진하고 있던 그에게 누군가 충고한다.
-프랑스 문화 자체를 염두에 둬야 해요.
어학당 선생님이 성적 장학금을 연달아 받으며 고시생 향수를 뿌리고 다니던 내게 어느 날 아는 중국인 이름을 대보라고 물었던 것과 비슷한 상황이다. 나는 제대로 대답을 하지 못했다. 순간 중국을 알고 싶어서 중국어를 시작했는데, 희한한 매력의 중국어에 빠져 정작 ‘중국’은 모르고 있다는 깨달음이 내 머리를 강하게 내려쳤다. 그 물음을 계기로 나도 중국어에 더 이상 머물지 않고, 중국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그도 나처럼 반성한다. 프랑스어를 8개월이나 공부했지만 프랑스 문화와 정신은 물론 프랑스산 치즈에 대한 토막 지식조차 배운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후 그는 마음속에 프랑스인을 키우기로 결심한다. 마음속 프랑스인이 시키는 대로 프로방스 특유의 밝은 노란색과 파란색으로 부엌에 페인트를 새로 칠한다. 나도 내 마음속 중국인이 시키는 대로 매일 훠궈와 마라탕을 먹고 마작을 뒀다. 중국 지리와 역사에 무지한 것을 한탄하며 각 지역별 성도와 도시 특징, 왕조별 수도를 리스트업하는 막노동을 진행해 보았다. 세 시간 동안 중국 지도를 보며 각 성의 수도와 특징 리스트를 완성했을 때는 스스로가 생각해도 어이가 없었다.
학습 측면에서 보자면 윌의 프랑스어 여정은 성공보다는 실패에 가깝다. 프랑스에서 만난 펜팔 친구와 제대로 된 대화를 단 한 마디도 하지 못하고 헤어지기 때문이다. 그는 심장 수술을 앞둔 새벽 이런 생각을 한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같은 프랑스어 공부 말고 골프나 배울걸! 하지만 인생의 전반적인 측면에서 보면 결코 실패가 아니다. 프랑스어 공부 1년 뒤 fMRI 촬영 결과 독해력에 영향을 미치는 브로카와 이해를 관장하는 베르니케 영역의 신경이 엄청나게 활성화됐으며 인지 능력 점수가 로켓처럼 치솟았다. 그는 책을 이렇게 마무리했다.
원하는 만큼 프랑스어를 익히지 못했지만 그것만으로도 내 인생은 가늠할 수 없을 만큼 풍요로워졌다. 지난 몇 년 프랑스어를 배우면서 깨달은 교훈 중 이게 가장 중요하다. 그 어떤 것도 사랑할 뿐 소유할 수는 없다. 프랑스어가 나를 피해 다녀도 이 언어에 대한 나의 흠모는 커져만 간다. 나는 프랑스어를 사랑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것이 나를 사랑하든 아니든, 이 사랑을 막을 도리가 없다.
나는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아.
그의 고백처럼 '그것'이 우리를 사랑할 확률은 매우 낮을 것이다. 하지만 이 언어에 대한 우리의 흠모와 저절로 풍요로워지는 삶은 막을 도리가 없다. 그러니 우리는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