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흐름>이라는 신생 출판사의 인지도를 단숨에 올려 준 <말들의 흐름> 시리즈 중 한 권이다. 산책과 연애라니 어울리는 조합이지만, 작가는 태어나서 주기적으로 산책을 한 적은 단 한번도 없다는 고백으로 글을 시작하고, 주제와는 어울리지 않는 죽음에 관한 문장들을 잔뜩 적어두었다. 시인이 쓴 에세이라 문장들이 매우 시적이다. 처음에 남자일 것이라 착각을 일으켰던 이름, 진목. 그가 아니라 그녀였고, 얼마 전 부산 여행 중에 들린 아름다운 서점 ‘손목서가’의 주인이었으며 궁금했던 서점 이름의 탄생 배경은 남편 이름에서 ‘손’, 자신의 이름에서 ‘목’을 가져온 것이었다.
‘나는 연애를 할 때마다 그들을 죽이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걸었다’는 작가의 고백은 푸핫하는 웃음을 끌어냈지만 곧 머리를 끄덕이게 된다. 그래, 산책에는 그런 힘이 있지. 내 안의 화를 다스리는 힘. 다른 이가 아니라 나에게 집중하게 하는 힘. 엄청난 것처럼 보였던 무언가를 아무것도 아니게 하는 힘.
나는 연애를 할 때마다 그들을 죽이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걸었다. 현관을 박차고 나가는 순간부터 골목을 따라 이리저리 방향을 틀고 신호가 바뀌지 않는 횡단보도를 비껴 어느 방향으로나 내처 걸었다. 그러다 여기가 대체 어딘지 몰라 어리둥절해하던 그 순간들이야말로 나와 연애한 사람들이 지금까지 무탈히 살아 있는 여러 이유들 중에 하나쯤은 될 수 있을 것이다. 9p
하지만 스스로 죽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살면서 늘 실패하는 일도 내 삶을 멈추는 일이었다. 57p
사는 일은 싫은 일 없이 살아지지 않는다. 싫은 일을 쓰는 것은 싫은 일이다. 싫은 일을 읽는 것도 싫을 것이다. 하지만 사는 일은 싫은 일 없이 살아지지 않는다. 싫은 일은 흔하고 좋은 일은 드물다. 하지만 사는 일은 좋은 일 없이 살아진다. 60p
사는 동안에 단 한번도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런가 하면 매일 죽음을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는 매일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사람이다. 나는 행복하게 죽고 싶다. 행복하게 죽고 싶어서 매일 죽음에 대해 생각한다. 91p
그러니 삶은 우선 살아가는 것이다. 그 전에 제발 좀 그만 깨달았으면. 가만 보고 있으면 그들은 무엇이든 깨닫느라 정작 자기 삶을 살 시간이 없어 보인다. 96p
어떤 도리는 항상 묻어두고 싶다. 어떤 일은 도리 없이 살고 싶다. 그래서 나는 남이 내게 주는 것보다 내가 스스로 갖는 것이 좋다. 지금껏 도리를 모른다고 책망하던 사람과는 단 한 명도 빠짐없이 관계를 끊었다. 어쩌면 부모와도 그래서. 98p
사랑하며 사는 사람들은 모두가 사랑하며 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깜빡 잊는다. 그러다 모두가 사랑하며 살지 않는다는 사실을 맞닥뜨릴 때 어째서 감쪽같이 잊어버린 것인지 상심한다. 그러니 희망을 가져야지. 세상이 바뀐다는, 절망하는 사람은 세상을 바꾸기에 너무 절망한다. 105p
'사랑하며 사는 사람들은 모두가 사랑하며 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깜빡 잊는다.' 이 문장을 꽤 오래 바라보고 있었는데 나도 가끔 그랬었기 때문이다. 모두가 나와 같지 않다는 사실을 느슨하게 기억하면 나도 모르는 새 상처를 주게 된다.
사랑하지 않으면 편리할 수 있다. 사랑하지 않으면 간단히 무시할 수 있다. 사랑하지 않으면 모른 척 할 수 있다. 사랑하지 않으면 회피할 수 있다. 사랑하지 않으면 무책임할 수 있다. 사랑하지 않으면 변명할 수 있다. 사랑하지 않으면 거짓말 할 수 있다. 사랑하지 않으면 금세 말을 바꿀 수 있다. 사랑하지 않으면 재빨리 모습을 바꿀 수 있다. 사랑하지 않으면 더 빨리 갈 수 있다. 사랑하지 않으면 더 많이 가질 수 있다. 사랑하지 않으면 버릴 수 있다. 사랑하지 않으면 모를 수 있다. 107
사랑에 대한 문장들을 읽다가 ‘사랑하지 않으면’이라는 부분을 ‘엄마가 아니라면’으로 모두 치환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엄마가 아니라면 편리할 수 있다. 엄마가 아니라면 간단히 무시할 수 있다. 엄마가 아니라면 모른 척 할 수 있다. 어떤가? 정말 그렇지 않나? 엄마라서, 내 아이를 사랑해서 무시할 수 없고 모른 척 할 수 없고, 용기를 내서 알아야 하는 일들이 내게 너무 많아져서 그렇다. 육아와 연애는 공통점이 굉장히 많고, 엄마라는 역할은 확실히 무시무시하다.
고작 책상에 앉아 있지만 현실에 대해 거짓말을 하지 말고. 고작 나 자신을 정당화하는 데 정신을 쏟지 말고. 내가 아닌 다른 것을 향해 생각을 나아가게 하고. 내가 아닌 다른 것에서 용기를 찾고. 내가 아닌 다른 것에 용기를 사용하고. 누구나 비겁하다는 것을 잊지 말고. 내 것이 아닌 것은 쓰지 말고. 나인 것과 내가 아닌 것을 분별하고. 내가 아닌 것으로 불행하지 말고. 나인 것으로 행복하고. 131p
그래, 고작 나 자신을 정당화하는 데 정신을 쏟지 말고, 나인 것과 내가 아닌 것을 분별하고, 나인 것으로 행복하자. 그런데 이 책 산책과 연애가 주제 맞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