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펜에서는 다시 신랄한 독설이 새어 나온다. 이 신랄함은 얼마나 아둔하고 생기 없는 것인가. 할 수만 있다면 나도 사랑의 마음으로 글을 쓰겠다. 그러나 내가 사랑의 마음으로 글을 쓸 수 있다면 나는 나 아닌 다른 사람이 될 것이다. 사랑을 잃어버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나는 문득 반들거리는 타일을 입힌 탁자 표면 너머의 그에게서 뭔가를 느꼈다. 그것은 사랑 같은 심각한 감정과는 거리가 먼, 아마도 불행을 함께 나누는 동지애 정도일 듯싶은 감정이었다. 내가 헨리에게 말했다. "자넨 자신이 불행하다고 여기는 건가?"
- 그레이엄 그린 <사랑의 종말>
제2차 세계대전 무렵의 런던을 배경으로 소설가 모리스 벤드릭스와 세라 그리고 그녀의 남편 헨리 마일스 세 사람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철저한 모리스의 시점으로 진행되는 소설로 모리스와 세라의 사랑, 헨리의 사랑, 이별, 죽음, 회상을 마주하는 감정을 '모리스'의 목소리로 들려주고 있다.
모리스는 헨리의 위치에 있는 사람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을 쓰기 위해 그와 가장 가까운 사람인 그의 아내 세라를 만난다. 세라는 그 이유를 알면서도, 모리스 역시 그 이유로 시작한 관계임을 알면서도 둘은 사랑이라고 믿는 순간을 경험한다. 담담하게 그들의 관계가 탄로 날 위기를 넘기거나 사랑에 대한 굳은 의지를 보이는 세라에게 모리스는 불안을 느끼고 자신이 사랑받는지 계속해서 의심한다. 그가 알게 된 그녀의 감정은 이미 그녀가 죽어가고 있을 때였다. 그녀가 죽은 이후가 되어서야 그가 발견한 그녀의 행적에서 그는 그녀가 끊임없이 '신'을 향해 질문을 하고 대답을 들으려 했음을 알게 된다.
나는 과거의 그때를 그냥 내버려 두고 싶었다. 왜냐하면 1939년의 일을 쓸 때면 나의 모든 증오가 되살아나는 것을 느끼기 때문이다. 증오는 사랑이 작동시키는 분비샘과 동일한 분비샘을 작동시키는 것 같다. 심지어 사랑이 초래하는 행동과 동일한 행동을 초래한다.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의 수난 이야기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배우지 않았다면 과연 우리는 그리스도를 사랑한 사람이 질투 많은 유다였는지 아니면 비겁한 베드로였는지 그들의 행동만으로 알 수 있겠는가?
- 그레이엄 그린 <사랑의 종말> 47~48p
그는 말한다. "그러므로 이것은 사랑의 기록이라기보다는 증오의 기록에 더 가까울 것이다"라고. 사랑이 끝나고 절망, 후회, 슬픔이 아닌 증오와 종말을 이야기한다. 왜 그는 종말을 말하는 것일까. 세라가 왜 불편한 몸을 이끌고 교회로 갔고, 그녀가 죽고 나서 신부님이 찾아와 세라는 세례를 받길 원했고, 화장이 아닌 땅에 묻히기를 원했다고 끊임없이 남은 이들을 설득하려 했을까. 그녀의 사랑을 뒤늦게 확신하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남자는 상실 앞에 목놓아 울지 않는다. 이제는 중년이기에 그 상실을 받아들이는 한편 세라의 남편이었던 헨리가 무너지지 않게 그 곁을 지킨다. 이상한 관계라고 생각할지 모르고, 더군다나 모리스가 흔쾌히 한다는 느낌은 아니겠지만 어쨌든 그들은 상실을 함께 경험해 낸다. 그러니 이것은 애도의 기록이고 상실을 경험하는 모든 이에게 전해지길 바라는 마음이 새겨져 있다고 생각한다. 증오이자 사랑의 감정인 이 기록(글)이 다시 여러 질문을 명쾌하게 만들어내지 않더라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