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내가 뽑은 책 3위는 최근 문학동네 세계문학 시리즈로 출간된 존 밴빌의 [바다]라는 작품이다. 이 책은 2005년도 맨부커상 수상작이기도 하다. 개인적으로 좋은 작품은 읽는 당시보다 읽은 후에 깊은 여운과 감동이 남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바로 이 작품이 그렇다. 존 밴빌 아일랜드 작가이고, 아일랜드 작가 특유의 스토리보다는 의식의 흐름을 쫓아가는 형식으로 소설을 쓰고 있다. 이 책 역시 주인공의 의식의 흐름이 과거와 현재를 오가기에 결코 읽기가 쉽지 않다. 그럼에도 이 책을 읽고 난 후의 깊은 여운과 감동은 대단하다.
소설은 주인공 '맥스'가 노년이 되어서(정확한 나이는 알 수 없지만, 딸이 장성한 것으로 보아서 노년으로 추정된다) 고향의 바닷가의 별장인 시더빌로 오면서 시작된다. 시더빌은 맥스에게는 어린 시절의 추억이 담겨 있던 곳이다. 그곳에서 그는 그레이스 가족을 처음 만났다. 거친 아버지와 아버지와의 싸움으로 인해 삶에 찌들려 있던 어머니 밑에서 자란 맥스에게 도시에서 휴가차 내려온 그레이스 가족은 마치 신들과 같았다. 그러기에 소설에서 맥스는 당시의 기억을 신들의 세계에 들어간 것처럼 묘사한다.
맥스가 그레이스 가족 중에서 가장 먼저 동경한 것은 그레이스 부인이었다. 조금은 나른한 것 같고, 여유로운 것 같기도 한 그레이스 부인을 맥스는 동경한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레이스 부인을 향한 열정은 시들어지고, 이제는 딸인 클로이를 사랑하게 된다. 조금은 자기중심적이고, 당돌한 클로이를 통해 맥스는 마치 자신이 다른 세계에 들어간 것 같은 착각을 느낀다. 그러나 소설의 말미에서 클로이는 바닷속으로 사라지고, 소설의 전반부에 가지고 있던 모든 의문들이 풀린다.
이 책은 특히 인간의 개인의 기억이 무엇인지를 곰곰이 생각하게 해 준다. 프로이트나 라캉 같은 심리학자들은 인간이 어린 시절 따스한 기억을 품게 되고, 평생 그 기억을 좇아 살아간다고 말한다. 맥스에게는 그레이스 가족과의 만남이 가장 따스한 기억이었고, 클로이와의 교제가 가장 행복한 기억이었을 것이다. 그는 평생 그것을 좇아 살았고, 실제로 결혼한 부인 역시 클로이와의 못다 한 사랑을 이루기 위해서였음을 암시한다. 더 정확히 말하면 클로이가 주었던 그 풍요로움과 안정감을 다시 찾기 위해서였다. 그렇다고 맥스를 너무 나쁜 남자로 볼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인간에게는 한 가지 감정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니까. 아마 암으로 죽은 부인을 향해서도 그는 다른 감정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소설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구절은 고향에서 과거를 회상하는 맥스에게 그의 딸이 던진 한 마디를 통해 과거의 기억이 인간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생각하게 하는 부분이다.
“과거 속에 사시네요.” 클레어가 말했다. 나는 신랄하게 대꾸하려다가 말을 끊었다. 사실 아이 말이 옳았다. 진정한 삶이란 투쟁. 지칠 줄 모르는 행동과 긍정, 세상의 벽에 뭉툭한 머리를 들이대는 의지, 그런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돌아보면 내 에너지의 많은 부분은 늘 피난처, 위한, 또 그래, 솔직히 인정하거니와, 아늑함, 그런 것들을 찾는 단순한 일에 흘러들어가버렸다. 이것은 충격까지는 아니라 해도 놀랄 만한 깨달음이었다. 전에는 나 자신을 단검을 입에 물고 다가오는 모든 사람과 맞서는 해적 같은 사람으로 보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이 망상이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숨겨지고, 보호받는 것, 그것이 내가 진정으로 원하던 것이었다. 자궁처럼 따뜻한 곳으로 파고들어 거기에 웅크리는 것, 하늘의 무심한 눈길과 거친 바람의 파괴들로부터 숨는 것, 그래서 과거란 나에게 단지 그러한 은둔일 뿐이다. 나는 손을 비벼 차가운 현재와 더 차가운 미래를 털어내며 열심히 그곳으로 간다. 하지만 정말이지 그것이, 과거가 어떤 존재를 가지고 있을까? 결국 과거란 현재였던 것, 한때 그랬던 것, 지나간 현재일 뿐이다. 그 이상도 아니다. 그래도." (P 62)
깊은 여운이 남는 소설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강력히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무엇보다도 책 속의 아름다운 문장들이, 좋은 번역가를 만나 수려하게 번역된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