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내가 뽑은 올해의 책 16권 중 2위는 일본 작가 마쓰이에 마사시의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이다. 내 마음대로의 올해의 책 선정이지만, 올해 읽은 200여권의 책 중 이 책을 2위로 뽑은 이유는 3위인 존 밴빌의 [바다]와 같은 이유이다. 개인적으로 좋은 책이란 읽을 때보다 읽은 후에 더 길고 깊게 감동이 남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이 기준으로만 보았을 때는 올해 읽은 책 중에서 이 책이 가장 기억에 남고 감동적이었다.
물론 책을 읽었을 때는 그 책을 읽는 독자의 주관적인 상황도 무시를 하지 못한다. 아무리 좋은 책이라도 정신없는 상황에서 쫓기면서 지하철이나 오가는 도중에 틈틈이 읽게 되면 그 감동을 온전히 느낄 수가 없다. 반면 마음의 여유와 시간의 여유를 가지고 읽게 되면, 책에 담겨 있는 그 나름대로의 감동을 최대한 느낄 수 있다.
이 책이 그랬다. 이 책은 여름의 끝 무렵 추석 연휴 기간에 고향집에서 1주일간 쉬면서 읽은 책이다. 마침 고향집이 이 책이 배경처럼 시골에 지어진 통나무집이기에 더 이 책의 배경과 스토리에 집중할 수가 있었다.
소설은 1980년도 초에 주인공 사카니시가 당대의 유명한 건축가인 무라이 건축 사무소에 입사하면서 시작된다. 무라이는 외형적이거나 모던한 현대 건축과는 달리 자연과 사람의 조화를 이루는 건축을 지향하는 노건축가이다. 그러기에 무라이는 여름만 되면 아소산 근처의 아우쿠리 마을의 별장으로 사무실을 옮긴다. 그곳에서는 모든 것이 느리게 흘러간다. 소설은 주인공이 무라리의 별장 사무실에서 자연과 벗하며 동료들과 보내었던 한 여름을 이야기한다. 그 여름에 그는 무라리의 조카인 마리코와 사무실 동료인 유키코와의 관계를 맺어간다. 소설은 이 과정을 느리면서도 매우 아름답게 묘사하고 있다.
“날이 저물었을 때쯤, 월요일 아침에 돌아올 예정이었던 마리코가 까만 르노 5를 타고 돌아왔다. 물색 마 원피스, 조용했던 여름 별장 마루에 밝은 색 공이 굴러 온 것 같았다. (P203)
“그 풀 수 없는 의문과 별개로, 마리코하고는 새로운 관계가 시작되고 있었다. 나는 마리코에게 저항할 수 없이 이끌리고 있었다. 귀에 살그머니 들어와 그대로 머무는 목소리 톤, 가볍고 부드러운 손가락과 손의 감촉, 목과 어깨 움직임을 따라 물결치는 머리카락, 자유로운 다리의 움직임, 강인한 성격이 반전되어 모든 것을 용납하고 받아들이는 듯한 몸짓. (P275-6)
“18번 국도를 달리는 차 안에 마리코가 치는 피아노 소나타가 흐르기 시작했다. 터치는 부드럽고 막히는 곳이 없었다. 교양이라고 할 레벨이 전혀 아닌 것에 대한 놀라움은 이내 사라지고 그저 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자기가 살고 있는 시대와 맞서는 것도 아니고 친한 친구에게 보내는 것도 아닌, 하물며 애인에게 들려주는 것도 아니고 혼자 자기하고 대화하고 있는 것 같은 선율이었다. 슈베르트는 남겨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일까? 백미러에는 유키코가 비춰지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고개를 숙이면 눈물이 떨어질까 봐 고개를 숙이지 않고 앞을 보고 있는 표정이었다.” (P 381-2)
소설의 반전은 후반부에 나타난다. 오랜 시간이 흘러 중년의 사카니시가 무라리 건축사무소에 돌아왔을 때, 그 옆에 있던 사람은 마리코가 아니라 유키코였다. 소설을 읽는 내내 사카니시와 마리코를 응원했던 나로서는 조금 당황스러운 결말이었다. 그럼에도 자연과 느림, 그리고 만남이 주는 소설의 감동이 계속해서 떠나지 않았던 작품이었다. 2017년도에는 작가의 다른 작품도 번역되어 출판되기를 소망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