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민들레 곁에 냉이꽃
냉이꽃 곁에 제비꽃
제비꽃 곁에 산새콩
산새콩 곁에 꽃다지
꽃다지 곁에 바람꽃
소년 하나 언덕에 엎드려 시를 쓰네
천지사방 꽃향기 가득해라
걷다가 시 쓰고
걷다가 밤이 오고
밤은 무지개를 보지 못해
아침과 비를 보내는 것인데
무지개 뜬 초원의 간이역
이슬밭에 엎드려 한 노인이 시를 쓰네
(곽재구의 ‘세월’ 전문)
대학에서 시 창작을 가르치던 시인은 금년 2월 정년을 맞았다.
간혹 캠퍼스와 인근 식당에서 만나던 그의 모습을 앞으로는 좀처럼 볼 수 없게 되었다.
정년을 앞두고 새로이 펴낸 시집에 수록된 시들을 읽다가, 문득 시인의 자화상을 보는 듯한 작품을 발견했다.
오랜 '세월' 시를 쓰면서 살았던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보면서 쓴 것이라고 짐작된다.
처음 시를 쓰면서 주변의 '하얀 민들레'를 비롯한 모든 것에 시선을 던지다가, 문득 꽃이 핀 '언덕에 엎드려 시를 쓰'던 소년은 아마도 처음 시를 쓰던 시인 자신을 가리키는 것이리라.
그리고 '천지사방 꽃향기 가득'한 세상을 '걷다가 시 쓰고', 시간의 흐름과 함께 밤을 맞은 시인이 아침과 무지개를 그려봤을 것이라고 여겨진다.
그리고 이제는 '무지개 뜬 초원의 간이역 / 이슬밭에 엎드려' 시를 쓰는 '한 노인'은 지금의 시인을 형상화한 것이리라.
자신의 시처럼 늘 넉넉한 마음을 사람들과 세상을 맞는 시인의 일상에 행복이 깃들기를 빌어본다.(차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