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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노사이드

[도서] 제노사이드

다카노 가즈아키 저/김수영 역

내용 평점 5점

구성 평점 4점

1
'압도적인 걸작!!'이라는 평가에 동의하지 않을 사람들도 많겠지만, 그렇더라도 터무니없는 찬사라는 말은 듣지 않을 만한 작품.

2
책을 읽기 전에는 내용에 대한 이야기만 들었지, 작가에 대한 정보는 사전에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런데 이 책을 다 읽고 난 뒤 작가의 약력에 대해 알아보니 입에서 절로 감탄이 나왔다. 책을 읽는 동안에는 작가가 분명 화학 전공이리라 확신했다. 그랬다가 책의 뒷부분에 나와 있는 취재에 도움을 준 과학자와 의사들의 명단을 보면서 "아~ 기자였나 보군. 역시 자료 조사가 꼼꼼하더라니"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런데 작가 ‘다카노 가즈아키’는 기자도 아니었고, 과학을 전공한 학자 출신도 아니었다. 영화 연출을 공부하다 영화, TV 각본으로 글을 쓰며 공력을 쌓아온 순수한 글쟁이였다. 그런 작가가 이러한 책을 써내려갔다니. 나는 깊은 부끄러움을 느꼈다.

3
이 책에는 생물학, 화학, 의학, 약학 등의 과학 분야를 축으로 해서 국제정치, 인류학, 아프리카 지역학, 역사학, 군사학 등의 온갖 학문들이 녹아져 있다. 소설에서 전문적인 분야들을 다루는 경우 대개 관련 정보들이 이야기 주머니의 바깥으로 툭 튀어나오는 경우가 많은데, 이 소설에서는 그러한 것들이 전혀 없이 이야기 속으로 완벽하게 녹아들어가 있다.

특히 국제정치부터 군사학이야 어찌어찌 공부를 통해 정보를 축적한다 해도, 과학 분야에 대한 설명과 묘사는 나 같은 문과 절름발이에게는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작가가 관련 분야 전공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듣고서는 마치 넘을 수 없는 벽에 부딪친 것처럼 약간의 우울함이 생겼다. 그만큼 작가의 취재는 방대하고, 꼼꼼하다.

소설을 읽고 나니 관련 공부가 무척이나 하고 싶어졌다. 나는 제레드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와 '문명의 붕괴'를 곧바로 주문했다.

4
이 소설의 주제인 제노사이드(특정 인종이나 민족의 계획적, 조직적인 대량살육, 집단 학살)에 대한 고찰의 깊이는 인문서로서도 손색이 없다. 일본인인 작가는 특히나 한국에 대해 굉장히 긍정적인 이야기들을 풀어내고 있는데, 그것이 다름 아닌 관동 대지진에서의 조선인 학살에 대한 반성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한국인으로서 숙연해지는 부분이었다. 작가는 이 때문에 일본 내에서 많은 비판에 휩싸였다고 한다. 우리의 베트남전 논란이 떠오르는 지점이다.

5
그렇지만 무엇보다 소설과 영화의 미덕이라면 재미일 것이다. 잘 팔리지가 않아서 그렇지 교훈적인 내용과 가치 있는 정보들을 가지고 있는 인문사회서적은 넘쳐 나기 때문에, 출판 시장에서 상대적으로 판매 강자인 소설이 가져야 할 미덕은 역시나 재미일 것이다.

이 소설. 재미있다. 무려 700p에 가까운 분량이지만, 책을 여는 순간 폭발적으로 읽혀 나간다. 계속 계속 뒷부분이 궁금해지게 만드는 구성과 연출이야말로, 작가의 전공 분야인 듯싶다.

다만 서술과 심리 묘사에서 약간씩 거칠게 지나가는 부분이 없지는 않았는데, 작가의 경력을 보고 나니 이해가 되었다. 책을 읽는 내내 마치 화면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는데, 아마 연출을 하고 각본을 쓰면서 만들어진 특징이 아닐까. 그게 장점이면서도 동시에 단점이 되는 부분이기도 하겠지만,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내용들과 표현하고자 하는 장면들을 서술하는 데는 문제가 없으니 그건 문체의 스타일로 보아도 무방할 것 같다.

6
번역. 괜찮다 싶었고, 다른 곳에서의 번역 평을 찾아봐도 혹평은 없었다. 앞으로도 '김수영'의 일본어 번역이라면 믿고 봐도 괜찮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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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251
사회에서 볼 수 있는 모든 경쟁의 원동력은 단 두 가지 욕망으로 환원되는 듯했다. 식욕과 성욕. 인간은 타인보다 많이 먹거나 혹은 저장하고, 보다 매력적인 이성을 획득하기 위해 타인을 깎아내리고 발로 차서 떨어뜨리려 했다. 짐승의 본성을 유지한 인간일수록 공갈이나 협박 같은 수단을 쓰며 ‘조직’이란 무리의 보스로 올라가려 안달했다. 자본주의가 보장하는 자유경쟁이야말로 이러한 폭력성을 경제활동의 에너지로 전환하는 교묘한 시스템이었다. 법으로 규제하고 복지국가를 지향하지 않는 한, 자본주의가 내포하는 짐승의 욕망을 억누르기는 불가능했다. 어찌되었건 인간이라는 동물은 원시적인 욕구를 지성으로 장식해서 은폐하고 자기 정당화를 꾀하려는 거짓으로 가득한 존재였다.

p.253
“심리적 거리와 물리적 거리.” …… 적이 인종적으로 다르며, 언어도 종교도 이데올로기도 다르게 되면 심리적 거리가 멀어지며 그만큼 죽이기 쉬워진다. 평소에도 다른 민족과 심리적인 거리를 가지고 있는 사람, 즉 스스로가 소속된 민족 집단의 우위성을 믿으며 다른 민족을 열등하다고 느끼는 인간이 전쟁에서 손쉽게 변모하는 모습을 보인다. …… 전투 최전선에 서면 발포를 망설이게 되는 병사도 적을 직접 볼 수 없는 원거리에 있으면 보다 파괴력이 있는 공격 수단(박격포 발사나 함포 사격, 항공기 폭격 등)을 주저 없이 사용할 수 있게 된다. 눈앞에 있는 적을 사살한 병사가 평생 치유되지 않는 마음의 상처를 안는 것에 비해, 공중 폭력에 참가하여 100명이나 되는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폭격수는 아무런 아픔도 느끼지 않는 것이다.

p.255
현재 일어나는 전쟁에는 공통된 구조가 있다. …… 전쟁 당사자 중에서 가장 잔인한 의사(意思)를 가진 인간, 즉 전쟁 개시를 결정하는 최고 권력자만큼 적으로부터 심리적, 물리적 거리가 멀리 떨어진 위치에 있는 사람은 없다.

p.258
국가의 인격이란 의사 결정권자의 인격, 바로 그 자체였다.

p.276
반대 의견의 문제점은 꼬치꼬치 따지면서 배제하고, 찬성하는 사람들만 주위에 가득하게 채워 가는 것. 민주적인 결정으로 보이는 독재였다.

p.294
조너선 예거가 이 세상의 것이 아닌 지성(知性)과 조우했다. / 누스를 본 것이다.

p.415
“무서운 것은 지력이 아니고, 하물며 무력도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그것을 사용하는 이의 인격입니다.”

p.470
무엇보다도 자유를 중시했던 나라는 이제 사라졌다. 그건 그렇다 하더라도 자유 민주주의라는 체제를 지키려고 하면 할수록 위정자가 전체주의에 빠져들게 되는 이유는 뭘가. 국가라는 조직에서 자유는 환상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p.475
“선행이라는 것은 인간의 본성에 위배되는 행위이기에 미덕이라고 하는 걸세. 그것이 생물학적으로 당연한 행동이라면 칭찬 받을 일도 아니지 않은가.”

p.503
네오나치나 백인 지상주의자 등 자신의 폭력 행동을 정치사상으로 탈바꿈하는 가짜 우익에는 공통적인 심성이 있었다. 비뚤어진 자존심의 발로였다. 그들은 자란 환경 등의 문제로 자신을 직접 긍정하는 일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소속된 집단을 무턱대고 긍정하며 그 집단의 구성원인 스스로가 훌륭하다는 논법을 취했다.

p.508
과거 20만 년에 걸쳐 서로 죽이는 것을 되풀이해 온 인류는 항상 다른 집단의 침략에 떨었고 그 공포심이 더 큰 두려움을 초래하여 피해망상 직전의 상태를 유지하다가 국가라는 방위 체제를 만들어 현재에 이르렀다. 이 이상한 심리 상태는 인류 전체가 보편적으로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이상이 아니라 정상이라고 여겨지고 있었다. 이것이 ‘인간이라는 상태’였다. 그리고 완전한 평화가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는, 다른 사람이 위험하다는 확고한 증거를 서로가 이미 자신의 내면에서 보았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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