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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쓴 것

[도서] 우리가 쓴 것

조남주 저

내용 평점 5점

구성 평점 4점

『82년생 김지영』의 작가가 쓴 단편 모음집 『우리가 쓴 것』은 10대부터 80대를 아우르는 여성들의 서사가 담겨 있다. 무엇 때문인지 무거운 분위기를 예상하고 있었던 나는 따뜻함, 통쾌함, 흐뭇함, 말랑함 등 다양한 감정을 느끼면서 한 번씩 미소 짓고 고개를 끄덕이고 살짝 울컥하기도 했다.

 

 


"근데 승훈아, 나라면 싫을 것 같아. 아무것도 못하고 저렇게 누워만 있는 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어?"

교차로의 신호등이 주황색으로 바뀌었고 차는 서서히 속도를 줄여 횡단보도 정지선 앞에 섰다. 승훈이가 물었다.

"어떻게 사는 게 의미가 있는 걸까요?"


- 『우리가 쓴 것』 中 p.42


 

연명치료를 고집하는 큰 언니의 손주 승훈이를 설득하려던 동주는 승훈이의 질문에 자신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아들과 어떻게든 살려 달라고 의사에게 매달리던 그때의 자신의 모습을 떠올린다. 더불어 죽음을 향해 하루하루 다가가는 지금 자신의 삶은 의미가 있는가를 생각한다. 나는 승훈, 승훈의 엄마인 원숙, 그리고 동주까지 모두의 마음이 다 와닿아서 첫 단편 「매화나무 아래」부터 마음이 좀 아릿했다.

가부장적 가장의 전형이었던 아버지의 뜻밖의 가출로 가족들의 달라진 삶, 일상을 그려낸 「가출」은 심각하게 흐를 수 있는 사건의 일면을 오히려 담백하고 담담하고 다루어서 인상적이었다. 아버지의 가출, 가장의 부재라는 소재로 이렇게 이야기를 구성할 수도 있구나라는 생각이 제일 먼저 났던 거 같다. 엄마만 있는 집에 자주 들르게 된 삼 남매가 서로를 더 깊이 알아가는 모습이 재미있었다.

 


오빠가 아이를 낳아 키우는 삶이 너무 당연하다는 듯 말해서 그동안 말하지 못했습니다. 오빠의 질문은 "아이를 낳는 게 좋다고 생각해?"가 아니라 "아이를 몇 명이나 낳는 게 좋다고 생각해?"였고, "네가 아이를 키울 수 있을까?"가 아니라 "네가 아이를 몇 년쯤 직접 키울 수 있을까?"였으니까요. 저는 아직 생각해 본 적 없다고 대답을 피하곤 했고 오빠는 왜 그렇게 계획 없이 사느냐고 저를 한심해했습니다. 하지만 오빠, 오빠가 아이를 직접 낳을 것도 키울 것도 아니면서 무슨 자격으로 그런 계획을 혼자 세우죠? 한심한 건 제가 아니라 오빠예요.


- 『우리가 쓴 것』 中 p.185


 

모 연예인 때문에 크게 화제가 되었던 가스라이팅, 연인 관계에서의 가스라이팅을 다룬 「현남 오빠에게」를 읽으면서 정말 답답했는데 이야기가 후반으로 흐르면서, 특히 마지막 네 글자 덕분에 좀 시원해졌다. 자신의 의지대로 화자의 삶을 완벽하게 조종해낸 현남 오빠는 일종의 소시오패스라고 느껴졌다. 더 빨랐으면 좋았겠지만, 중요한 건 이제라도 벗어났다는 게 아니겠는가.

과부인 시어머니와 역시 과부인 며느리의 오로라 여행을 그린 「오로라의 밤」에서는 두 사람의 소원 때문에 좀 많이 웃었는데 오로라를 보고 빌기에 한 사람의 소원은 어쩌면 너무 소박하기도 하고 적나라한 게 아닌가 싶고, 다른 한 사람의 소원은 너무 보편적(?)이랄까... 오로라 여행을 다녀오면 인생이 달라질 거라고 생각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화자의 말에 공감이 되어서 웃기도 했다. 나 역시 처음 한 달이 조금 넘는 나름 긴 여행을 떠날 때 돌아와도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은 하면서도 내심 무언가 달라지기를 바랐으니까 말이다.

「여자아이는 자라서」와 「첫사랑 2020」에서는 10대 아이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여자아이는 자라서」에서는 아이가 겪는 사건에 엄마의 유년 시절과 엄마의 엄마, 할머니의 젊은 시절까지 얽혀서 3대의 서사가 같이 진행되고, 「첫사랑 2020」은 풋풋한 첫사랑마저 녹록지 않은 코로나 시대 초등학생들의 어려움(?)을 읽어낼 수 있다.

 

수록된 총 8편의 소설에는 작가의 경험뿐 아니라 다른 책, 영상, 기사, 유튜브, 다큐멘터리 등이 참고 자료로 활용되었다고 한다. 갈등이나 대립이 없는 이야기도 아닌데 쭈욱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나가는 게 신기해서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봤다. 아마 어떤 괴로움이나 고민 속에서도 등장인물들의 마음이, 다소 흔들림이 있더라도 서로, 또 스스로를 포용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기 때문인 거 같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어려움이나 괴로움 속에서도 다른 길을 모색할 수 있는 거라고 느껴졌다.

 

 

★ 출판사로부터 책을 지원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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