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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릉 산책

[도서] 선릉 산책

정용준 저

내용 평점 4점

구성 평점 5점

총 7편의 단편 모음집인 이 책의 기본적인 감성은 홍보 문구에 적혀있는 대로 슬픔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다 읽고 나면 슬프기보다는 쓸쓸하다. 슬픔을 야기하는 상황, 사건 등이 -우리가 현실에서 거의 매번 겪는 것처럼- 후련하게 정리되는 거 없이 다소 애매모호하게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여운을 남기는 느낌이라 마치 삶의 애달픔, 고단함, 부조리함을 알지만 그래서 슬프지만 혼자만 그런 거 아닌 거 알지라는 작은 토닥거림을 건네는 거 같다. 그게 위로가 된다기보다는, 같이 있어도 가족이어도 그게 결국에는 혼자 감당해야 되는 부분이라는 걸 깨닫게 만들어 삶이 얼마나 쓸쓸한지 새삼 마음 시리게 느끼도록 만든다.

 


힘들어서 그러는 거 아니야. 아파서도 아니고 죽고 싶어서도 아니야. 생각이라는 걸 해봤는데 그동안 고단했고 앞으로도 애쓰면 그럭저럭 버티겠지만 이제 그럴 명분도 이유도 없다는 결론을 내렸어. 멀쩡한 정신으로 두 번이고 세 번이고 생각해봤단다. 그리고 결심했어. 나는 이제 그만 살고 싶어. 내가 굳이 너에게 이렇게 말하는 건 쓸데없이 탓할까봐서야. 네 잘못도 아니고 진수 잘못도 아니야. 

- 「사라지는 것들」中 p.30


 

삶은 그냥 내가 멈추고 싶을 때 멈출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래서 잔인한 부분도 있고... 「사라지는 것들」의 엄마의 마음이 이해가 되면서도 화자에게는 엄마까지 이러는 게 정말 가혹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마음이 아팠다. 각자의 아픔은 아무리 가까워도 짐작만 하지 결국 대신 아파줄 수도, 정확히 헤아릴 수도 없는 부분이기에 내 나름의 위로와 관심을 쏟는 게 그저 최선일 수밖에 없다. 

 


엄마는 마음을 바꾸지 않겠지. 안다. 마음먹은 사람에게 그런 마음을 먹지 말라고 하는 게 얼마나 의미가 없는지. 처음부터 그런 마음을 못 먹게 했어야지. 먹은 마음을 사라지게 할 수는 없다.

- 「사라지는 것들」 中 p.58


 

결국 화자는 엄마를 말릴 수 없지만 자신도 엄마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내비친다. 자신이 생각하는 최선이 그것이니까... 이건 어떤 결말로 향하든 누구도 이길 수도 질 수도 없는 그런 싸움이 아닐까.

 

 

 


"당신 말은 맞지만, 때로는 옳지만, 너무 차가워. 가족끼리는 심판이 필요한 게 아니라 온기가 필요해."

- 「미스터 심플」 中 p.225


 

어릴 때 같은 반 친구 싸움에 엉뚱하게 휘말려서 정말 서러웠던 적이 있었다. 집에 와서 하소연하는 나를 앞에 두고 엄마는 '이만큼은 걔가 잘못했고 이런 부분은 네가 잘못한 거야. 그러니까 둘 다 잘한 거 없어'라는 마치 솔로몬 같은 판결을 내리셨다. 나는 그때 이후로 아무리 속상해도 엄마한테 구구절절 얘기하지 않게 되었다. 엄마는 나를 사랑하기는 하지만 무조건 내 편은 아닌 사람, 그게 그때 어린 마음의 내가 내린 결론이었으니까... 맞다. 그날 내가 필요한 건 솔로몬의 지혜가 아니라 가족이라서 기대할 수 있는 따뜻한 위로였다. 나를 판단하려는 사람은 많다. 나와 관계 맺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내가 어떤 사람인지 나의 작은 행동, 말 등등을 통해 수시로 판단한다. 내가 엄마한테 기대한 건, 우리가 가족이라는 집단에게 기대하는 건 나에 대한 객관적인 판단이 아니라 「미스터 심플」의 아내가 말한 온기, 조건 없는 지지 같은 걸 거다. 그렇지 않다면 가족이라는 존재를 타인과 다르게 포지셔닝 하는 게 대체 뭘까? DNA?

구치소에서 나온 화자를 다룬 「두번째 삶」이 다소 좀 다른 느낌을 준다. 비슷한 결로 생각했을 때의 결말이 아니어서 약간 놀랍기도 하고 의외의 재미가 있었다.

단편이지만 작품마다 일상과 감정을 다루는 작가의 섬세함이 남다르게 느껴졌는데 선물해 주신 분이 정용준 작가의 다른 작품도 좋았다고 말씀해 주셔서 이렇게 또 괜찮은 작가를 알게 되는구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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