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가 활성화 되지 않았던 시절, 나는 스스로 쓴 글이 활자화 되어 있는 것을 보면서 신기해 했던 기억이 있다. 교지에서였다. 늘 연필로 쓴 글만 보다가 정말 그것은 기이한 체험이었다. 그것이 언어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고, 좋은 표현을 늘 마음을 지니게 된 배경이 된 듯하다. 작가는 인터넷 공간에 웹툰을 올리다가 출판사의 권고로 이와 같은 책을 내게 되었다고 한다. 기성작가가 아닌 창작하는 사람들에게 도전이 되는 이야기다. 꾸준하게 무엇을 추구하고, 그것이 가치를 얻어간다는 것은 분명 신이 나는 일이다. 작가는 이 책을 통해 스스로 진한 행복감을 느꼈을 듯하다.
서울 남산에 오른 한 사람이 사진을 찍는 한 여성을 만나면서 이루어지는 이야기다. 그들은 영화 시나리오 작가를 꿈꾸는 은희수와 친구 제이를 만나러 서울에 온 사진을 좋아하는 호시노 미키다. 희수는 서울 시내를 내려다보기 위해 남산에 오른다. 그 희수가 미키의 눈에 여린 모습으로 비춰지고, 미키가 사진을 찍자는 주문을 하면서 둘의 관계가 형성된다. 어느 시인의 ‘꽃’이라는 작품의 한 구절이 생각난다.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서 몸짓이었다가 이름을 불러주면서 꽃이 되었다’는 내용이다. 만나 이름을 불러줌으로 서로의 관계가 형성된 것이다. 둘은 그렇게 우연히 만나 같이 길을 이야기한다. 길을 걸으면서 길을 이야기하고 삶을 이야기하고 사랑을 이야기한다.
글이 그림과 더불어 있어 그렇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내용만으로도 한 폭의 수채화를 떠올리게 한다. 잔잔한 생각이 들어있고 느긋한 성찰이 들어 있다. 글이 전혀 분주하지 않다. 길거리에 피어있는 코스모스를 느낄 수 있게 만들고, 담쟁이 넝쿨을 떠올리게 만든다. 계단을 올라가도 힘겨운 것이 아니라, 기뻐하면서 올라가는 듯한 모습으로 다가온다. 그렇게 둘은 서로 다른 상황에서 만나 길을 공유하고, 생각을 공유해 나가면서 서울을 걷는다. 서울의 골목길을 누빈다.
둘은 길을 거닐면서 말하길 힘들어하는 화수에게 미키가 가볍게 말문을 터는 이야기로 이끌기도 한다. 그러다 ‘좋아 싫어 게임’도 하고 대화를 나누면서 서로의 줄을 연결시키는 관계를 형성한다. 서로에게 조금씩 자신을 내어놓는 시간을 가지면서 서로 가깝게 되어간다. 그러면서 화수는 자신의 시나리오 얘기를 하고, 미키는 제이 얘기를 한다. 하루 동안 그렇게 골목길을 나누면서 둘은 서로를 의지한다.
제이 얘기가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그것은 미키가 서울에 온 이유를 밝혀야 하기 때문이다. 무작정, 무목적으로 서울에 오고 남산에 왔어 희수를 만난다면 이야기의 흐름상 문제가 될 것이다. 그것을 보완하기 위해 제이 이야기가 필요하다. 그의 이야기는 일본에서부터 시작하고 있다. 미키가 도서관에 있을 때 제이는 그곳에서 특별하게 책을 읽는 사람이었다. 그것에 눈에 띄어 미키와 제이는 만나게 되고 서로를 인식하게 된다. 그런 제이가 사랑에 실패하고 한국으로 돌아간다. 그 후 시간이 흐르고 그림을 그리는 제이는 엽서를 통해 미키가 서울의 길들을 촬영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한다. 서울의 거리를 같이 그림으로 그리고 사진을 찍고 동행하자는 제안을 한다. 그래서 미키는 서울행을 결정하게 되고 남산에서 은희수를 만나는 것이다.
이 글의 흐름은 이처럼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면서 이루어진다. 과거의 인물들과 관계, 그리고 현재 만나는 인물들의 관계 그들 사이에 생성되는 이야기가 본류를 이루고 있다. 그것이 책갈피에 든 낙엽처럼 그려진 그림들을 통해서 훨씬 선명하게 복원되어 우리들에게 다가온다. 잘 읽히고 감미롭게 들리는 내용이다. 책을 가까이 하고 있다 보면 마음에 평안이 인다. 격정하고는 거리가 멀다. 의지하고도 거리가 있다. 안온하고 따뜻한 그림을 마음에 그려본다면 이 책의 이미지가 아닐까 여겨진다. 골목길들이 옛 기억을 떠오르게 하면서 가까이 머문다. 미키와 화수, 그들과 함께 걷는 길은 기쁨의 연속이다.
이야기는 희수와 관계있는 배우 강예나도 그려진다. 인기배우 예나가 배우로 힘들어할 때 조연출을 맡았던 희수가 도와줘 어려움을 벗어났던 일이 둘의 인연을 만들었다. 그리고 희수의 작품을 통해 예나는 스타가 된다. 이런 상황에서 희수가 쓴 시나리오를 영화화시키는 영화사의의 제안이 들어오고 예나를 주인공으로 선정할 것을 요구한다. 영화사 관계자들이 희수의 부탁이라면 예나가 거절하지 않을 것을 알기에 그런 요구를 하는 것이다. 예나도 조건을 단다. 희수가 감독을 맡아 해야 출연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희수가 감독이 되어 영화를 찍는 일이 벌어진다. 이야기들이 자잘하고 따뜻한 느낌으로 포근하게 마음에 머문다.
이처럼 희수, 미키를 중심으로 서울거리를 스케치해 나가고, 그 가운데 예나, 제이 등의 인물을 등장시켜 이야기의 폭을 넓혀 나가는 글이다. 전반적으로 힘을 준 그림들이 내용의 의미를 잘 전달하고 있고, 읽어나가는 독자의 마음을 흡족하게 한다. 쉽게 읽혀지면서 삶의 문제들을 통찰해볼 수 있게도 한다. 참 가볍게 읽으면서 깊은 성찰을 해볼 수 있게 만드는 책이란 생각을 했다. 앞으로 얼마나 더 나올지 모르겠으나 1권으로 이름 지어진 책을 읽으면서 행복했다. 이미지를 동반하면 더욱 이해하기에 좋을 듯하나 이 리뷰에서는 그것을 생략하겠다. 많은 상상력을 동원해 나름의 글을 연상해 보도록 만들기 위해서다. 책이 내용은 도외시하고 느낌으로 감미롭게 다가든다. 그러면서 서울의 골목길에 대해서 음미를 하도록 만들고 있다. 나들이를 할 때, 서울 거리를 돌아볼 때 옆에 두고 있으면 좋을 책이라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