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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고 마시는 것들의 자연사

[도서] 먹고 마시는 것들의 자연사

조너선 실버타운 저/노승영 역

내용 평점 5점

구성 평점 5점

동물이든 식물이든 인간이든 세균이든 지구 위에 머물고 있는 개체들은 다들 똑같은 목적으로 똑같은 운명으로 제 삶을 이어가려고 하는 것일까. 오로지 살아남기. 내가 아니라면 나의 유전체를 남김으로써. 고스란히 남기는 게 어렵다면 변화를 통해서라도, 그게 진화라면 더더욱, 그리하여 살아남기만 한다면. 

 

먹고 마시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유쾌한 기분으로 읽으려고 했는데, 지극히 가벼운 마음으로 펼쳤는데, 읽는 동안에는 내내 가벼운 마음이었으나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점점 더 숙연해졌다. 지구 밖에서, 지구에 생명체가 생기기 시작하던 즈음부터 지금까지의 모든 역사를 지켜보는 심정이었다. 이러려고 하지 않는데도 저절로 이런 마음이 들도록 붙잡아 끄는 힘은 작가의 것이겠지. 거대한 시각이라는 게 아마도 이런 통찰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싶다.    

 

책의 부제로 나와 있는 말-'맛, 요리, 음식, 사피엔스, 그리고 진화'-을 다 읽고 보니 온전히 이해가 된다. 맛도 요리도 음식까지도 사람이 사람을 위한 것에만 해당되는 게 아니라는 것. 우리 인간이 알고 있는 바의 의지라는 걸 갖지 않은 식물이라도 그들대로는 살아남을 유전자를 지키거나 바꾸거나 해야 했다는 것. 그 과정에서 인간을 위한 음식 재료가 되어서라도. 식물이 이러할진대 동물은 더 말해 무엇하랴 싶고. 이래서야 밥 한 끼, 차 한 잔 먹고 마실 때마다 진화의 속성을 헤아리게 되는 게 아닐지. 그때 내 기분은 좋을까, 성가실까, 설렐까, 멍해질까. 아무려면 어때, 지금 이렇게 신나는데.   

 

내가 조금 알고 있던 과학과 역사의 지식에 엄청나게 거대한 내용을 덮어야 했던 탓에 읽었다고 다 알게 된 아니다. 어쩌면 내가 품은 지식의 양은 이 책으로 얻어서 늘린 것보다 기억했던 것마저 잊어버리면서 잃은 것이 더 많아졌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도 풍성한 느낌이다. 배도 부르고 머리속도 그득해진 듯한, 좋은 책은 나를 홀로 착각하게 만들어준다. 끝도 없이 펼쳐 보이는 자료와 증거들에 가끔 지루한 느낌을 받기도 했지만, 그래서 엉성한 시각으로 이들을 훌훌 넘기기도 했지만, 맥락만큼은 놓치지 않으려고 했다. 우리는 모두 진화 과정에 놓여 있다는 것을.    

 

마지막 장에서 작가가 GMO에 대해 말하고 있는 대목은 새로웠다. 내가 생각을 바꿔야 하나 보다, 마음먹을 정도로. 

 

59

아프리카 바깥에 사는 6억 인구는 모두 약 7만2000년 전 어느 화창한 날 아프리카의 뿔(에티오피아, 소말리아, 지부티가 자리 잡고 있는 아프리카 북동부)에서 홍해를 가로질러 아라비아반도로 건나간 소규모 무리의 후손이다. 이 사실을 아는 것은 우리의 유전자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프리카의 인구는 유전적으로 매우 다양하며 민족 간에 다른 점이 많다. 이에 비해 나머지 인구는 유전적으로 획일적이어서, 아프리카 인구의 다양한 유전자 중에서 대탈주를 감행한 수백 명의 유전자만을 모두가 공유한다. 아프리카에서 멀수록 타고난 유전적 다양성은 감소한다. 이것을 보면 이주의 단계마다 소규모 무리가 떨어져 나와 이동하고 보금자리를 마련하고 정착지를 건설하고 정착민 수가 많아지면 다시 일부가 떨어져 나왔음을 알 수 있다. 

 

87

우리는 빵이 주식이라는 사실을 당연하게 여기지만, 여기에는 우리를 상상 가능한 모든 방식으로 변화시킨 1만2000년의 역사가 숨겨져 있다. 이 변화는 동식물의 진화를 우리의 목적에 맞게 좌우하는 법을 배운 신석기 혁명에서 주춧돌 역할을 했다. 농업 덕에 인류가 식량을 얻고 인구가 증가할 수 있었으며, 잉여 농산물 덕에 산 자를 위해 도시를 건설하고 죽은 자를 위해 거대한 무덤을 지을 수 있었다. 농업 덕에 생긴 여가 시간에 우리는 자연을 관찰하고 자연법칙을 발견했다. 다윈은 길들이기가 동식물에 미친 영향을 관찰해, 이 생물을 우리 입맛에 맞게 빚은 인위적 선택이 우리와 모든 생물을 형성한 자연선택과 비슷하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빵은 우리를 길들였으며, 이제 지구 길들이기는 막바지에 이르렀다.

 

98

사람들은 진화를 마치 후진 기어가 없는 자동차 같은 일방향적 과정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진화는 그런 식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자연선택은 쓸모 있는 것과 쓸모없는 것의 무작위 조합에서 형질을 골라내지만 이 형질이 쓰임새를 잃으면 버리기도 한다. 진화 과정에서 기능을 잃은 형질의 유전자는 돌연변이가 누적되어 허깨비 같은 ‘위유전자’가 되는 경향이 있다. 위유전자는 한때 유용했던 유전자의 흐릿한 그림자에 불과하다. 

 

108

우리의 미각 수용체는 필수 영양소를 입안에 넣었을 때 뇌에 신호를 보낸다. 단백질은 감칠맛, 탄수화물은 단맛, 지질은 기름진 맛을 느끼게 한다. 물론 미각 수용체는 진화가 우리에게 선사한 감각 기관 중 일부에 불과하다. 

 

183-184

식물이 만드는 수만 가지 화합물의 목적은 주로 - 아니면 오로지 - 천적으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하는 것이다. 이 화합물은 허브와 양념의 활성 성분일 뿐 아니라 퀴닌과 아스피린 같은 약재, 아편과 대마 같은 마약, 커피와 차 같은 기호식품으로 쓰이기도 한다. 적은 수단으로 많은 결실을 낳는 진화는 몇 가지 성분을 변화시키는 것만으로 이 화학적 다양성을 만들어냈다.   

 

274

운동 경기에서 숭배와 전쟁에 이르는 모든 집단 활동, 공동체나 국가나 평등을 토대로 한 모든 숭고한 정치 이념, 이를 떠받치는 민주주의 제도와 법의 지배는 궁극적으로 맛있는 스테이크에서 공정한 몫을 얻으려는 고대의 욕망에서 비롯한다. 

 

290

GM을 비롯한 모든 형태의 동식물 육종에서는 의도하지 않은 결과가 생길 수 있다. 이것은 GM이 여느 육종 기술보다 본질적으로 더 위험하기 때문이 아니라 새로운 것에는 언제나 위험이 따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새로운 것 중에서 건강과 환경에 가장 심각한 위험이 된 것은 GM 작물이나 길들여진 종이 아니라 아르헨티나개미, 얼룩말홍합, 칡 같은 야생 외래종이다. 각각의 종은 천연 서식처에서 다른 곳으로 이동했을 때 막대한 피해를 초래했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 또는 하지 못하든 위험을 피할 수는 없다. 그러니 모든 위험의 경중을 따져야 한다. 현재 GMO의 위험은 터무니없이 과장되어 있는 데 반해 GMO를 이용한 지속 가능한 식량 생산의 가능성은 너무 과소평가되어 있다.  

 

291

식단을 연구하면, 여러 문화의 다양한 식단을 비교해 얻을 수 있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그것은 건강하고 균형 잡힌 식단에 이르는 길은 여러 가지가 있으며 고기를 과식하거나 동물성 단백질을 아예 끊는 극단적 식단만이 문제라는 것이다. 이 극단 사이에 있는 식단에서 건강의 최대 위협은 지나친 열량 섭취라는 현대적 현상이다. 

먹고 마시는 것들의 자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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