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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경사 바틀비

[도서] 필경사 바틀비

허먼 멜빌 저/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기획/김세미 역

내용 평점 5점

구성 평점 5점

제목만 알고 있던 글을 또 한 편 읽었다. 이런 글이었구나, 이런 내용이었구나, 이런 지독함이 담겨 있었구나. 영영 모르고 살았다면 좀더 평온할 수도 있었겠지만 이렇게 알게 되어 앞으로의 삶이 덜 행복해진다 싶어도 그 불행의 한자락을 끝내 모른 채로 살지 않아서 다행이기만 하다는 마음이다. 오늘은 어째 내 마음이 여유로워진 듯하다. 바틀비 덕분일 것이다. 

 

불행한 시대, 불행한 사람. 누군가는 행복과 행운에 겨워 하면서 살아가고 있을 테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 반대쪽에는 전혀 그런 은혜를 입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어느 시대든, 어느 공간이든. 내가 어느 쪽에 속할 것인가, 어느 쪽으로 넘어갈 것인가를 따지는 일은 그래서 많이 서글퍼진다. 아무래도 안도보다는 염려하는 마음이 크게 마련이니. 혹시라도 바틀비처럼 되면 어쩌나, 바틀비처럼 되고 싶지는 않은데, 바틀비라고 해서 그렇게 되고 싶어 했던 것은 아니지 않았겠는가, 바틀비, 바틀비......

 

책의 크기는 작은 편, 두께도 얇은 편이다. 한달음에 읽을 수 있는 책이다. 한 장 한 장, 한 장면 한 장면이 던지는 삶의 지독한 무게를 고려하지 않는다면. '보르헤스 세계문학 컬렉션 바벨의 도서관' 시리즈의 하나인데 이런 이름을 알게 되어 기분이 좋다. 내 의식이 한층 높아진 듯하다.    

 

'광기'라는 말은 얼마 전까지 내 정신 안에 없던 것이었다. 보드 게임을 하던 중 '아컴 호러'나 '광기의 저택'과 같은 게임을 하면서 러브 크래프트라는 작가의 이름을 통해 서서히 친숙해진 낱말인데. 1800년대 후반부터 1900년대 초반, 미국 사회의 어느 영역에 널리 퍼졌다는 이 '광기'의 분위기가 당시 미국 소설과 어떤 연관성이 있었던 것인지 이제야 조금씩 잡히는 느낌이다. 나로서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되던, 그 시대 미국과 미국인들의 속성 일부를. 독립 전쟁과 남북 전쟁과 대공황과 자본주의 성장과 두 차례의 세계대전 등등. 그리고 그 혼탁한 시대를 살아야 했던, 살아남아야 했던 이들의 절박한 의지를. 미치지 않고서야 버틸 수 없었으리라 싶은 광기의 시대, 그 분위기를. 

 

마음은 약하고 섬세하고, 그럼에도 의지의 어떤 부분은 지독히도 강하고, 올곧아서 타협하기 힘들어하는 성격을 가진 이들은, 어쩌면 이 세상을 살아내기가 참 힘들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세상의 모습이라는 게 어떠하든. 본인이 원해서 얻은 게 아닌 천성으로 갖고 태어난 사람들일 경우 더더욱. 바틀비처럼 '하고 싶지 않습니다'라는 말을 속으로만 하는 게 아니라 겉으로 표현하는 사람, 바틀비와 같이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지 않는 것을 용기라고 할 수 있을까. 용기라면, 이 용기는 이 말을 하는 사람의 삶을 더 나은 것으로 이끌어주는 매개체가 되어 줄까. 글쎄, 답은 함부로 말할 수가 없겠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는 말하는 바틀비와 말 못하는 바틀비가 같이 살고 있을 것이니.    

 

앞서 읽은 잡지인 뉴필로소퍼에서 소개 받은 책이다. '나는 누구인가'를 묻는 과정과 이어지는 책으로. 사는 일은 참 쉬워 보이다가도 짬짬이 이런 어려운 문제를 만나 헷갈린다. 이 문제 앞에서 단순해지지 않아 다행이다. 바틀비의 고집이 내내 애잔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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