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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을 부수는 문학들

[도서] 문학을 부수는 문학들

권보드래 등저

내용 평점 5점

구성 평점 5점



<문학을 부수는 문학들>은 2017년 2월 총 10회에 걸쳐 진행된 '페미니스트 시각으로 읽는 한국 현대문학사'라는 제목의 강연을 글로 엮은 책이다. 권보드래, 심진경, 이혜령, 이진경, 김미정, 류진희, 김은하, 허윤, 조서연, 오혜진, 장영은, 강지윤, 정미지 등 열세 명의 학자, 연구자, 평론가 등이 참여했다. 논문 수준의 어려운 글도 다수 포함되어 있고 그만큼 내용이 전문적이고 깊이가 있다.


장영은은 '배운 여자의 탄생과 존재 증명의 글쓰기'라는 제목의 글을 통해 근대 여성지식인의 자기서사와 그 정치적 가능성을 논한다. 버틀러에 따르면 '자기 자신'이라는 존재는 '고정된 것'이 아니고 자기 자신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근대 여성지식인들은 극소수의 여성들만이 누릴 수 있었던 학습의 기회와 자기 표현의 장을 이용해 자기 자신의 삶을 반추하며 그 때까지 한국 사회에 존재하지 않았던 독특한 여성상, 인간상을 확립했다. 이는 남성 작가들이 글쓰기를 통해 자신의 자아상을 확립하고 존재를 증명한 것과 다르지 않은 과정이지만, 남성 작가는 그들이 그저 남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인정받고 더러는 칭송받은 반면, 여성 작가는 그들이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비난 받거나 대개는 무시되었다.


한국전쟁 직후인 1950년대는 혼란스러운 상황을 틈타 젠더 교란이 나타났던 시기다. 전쟁에 나갔던 많은 남성들이 신체적, 정신적으로 큰 상해를 입었고, 여성들이 아버지와 남편, 아들을 대신해 생계를 위해 거리로 나서며 남성과 여성의 사회적 역할이 바뀌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러한 젠더 규범의 흔들림은 여성국극, 여장남자와 같은 현상에서도 볼 수 있다. 특히 1950년대에 전성기를 맞았던 여성국극단은 여성들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남성상을 연기해 많은 여성팬들을 사로잡았다(이는 여성만으로 이루어진 일본의 타카라즈카 극단이 현재까지 인기를 얻고 있는 비결과 같다).


당시의 분위기는 염상섭과 손창섭의 소설에 잘 나타난다. 염상섭이 결혼을 지연시키거나 거부하는 인물을 등장시킴으로써 젠더 교란이 벌어지는 사회상을 보여줬다면, 손창섭은 남성과 여성이라는 이분법적 젠더관과 이성애 중심주의를 무너뜨리는 상황을 제시함으로써 달라진 사회상을 드러냈다. 1950년대에 남성 우월주의, 이성애 중심주의, 가부장제에 의문을 던지는 문학 작품(그것도 한국 남성 작가가 쓴)이 있었다니 매우 놀랍다.


오늘날의 한국 현대문학을 이끄는 세 여성 작가에 관한 글도 실려 있다. 정유정 작가는 작품을 발표할 때마다 '여성 작가의 문체 같지 않은 힘', '여성작가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다.', '여성적 수다를 찾아보기 어렵다.' 같은 평을 듣는데 대체 이는 칭찬인가 비난인가. 이런 말들은 여성 작가가 범접하기 힘든 남성 작가의 문체, 남성 작가의 문학이 따로 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암시하기에 부당하고 불편하다. 정유정은 정유정 자신의 문체로 정유정 자신의 문학 세계를 만들고 있을 뿐이므로, 남성이나 여성이라는 카테고리로 재단하는 것은 옳지 않다. <82년생 김지영>으로 한국 페미니즘 열풍에 불을 지핀 조남주 작가와 <쇼코의 미소>, <내게 무해한 사람> 등으로 남녀 불문하고 많은 독자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는 최은영 작가에 관한 글도 있다. 


떠날 사람 다 떠난 한국문학의 가장 충실한 독자로 남아 있는 20~30대 여성들에 대한 분석도 흥미롭다. 이들은 동시대 일본 문학과 서구 문학의 주 독자층이며, 책 외에도 영화, 연극, 뮤지컬 등을 열정적으로 소비한다. 팬픽, 웹툰, 웹소설 같은 비주류 서사 양식도 적극적으로 소비한다. 아이돌 팬픽 등으로 남성 동성애 문화를 접한 이들에게 성소수자 문화는 낯설지 않으며, 소수자 인권 문제의 연장 선상에서 페미니즘 또한 빠른 속도로 퍼지고 있다. 이들이 열심히 부수고 있는 한국 문학이 과연 어떤 모습으로 재탄생할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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