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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 고양이의 비밀

[도서] 장수 고양이의 비밀

무라카미 하루키 저/안자이 미즈마루 그림/홍은주 역

내용 평점 5점

구성 평점 5점



좋은 글이 반드시 갖춰야 할 조건은 무엇일까. 사람에 따라 생각하는 바가 저마다 다르겠지만, 나의 경우 그것은 '유머'라고 생각한다. 슬픔을 자아내는 글이나 분노를 불러일으키는 글이 좋은 글인 경우도 적지 않지만, 적어도 나는 읽는 동안 피식피식 웃게 되고 다 읽고 나서도 한참동안 입가에서 웃음이 떠나지 않는 글이 좋다. 소설도 수필도 마찬가지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나의 최애 작가인 까닭도 그래서이다. 하루키의 글은 언제 어디서 읽어도 웃음이 난다. 배를 잡고 웃을 정도는 아니어도 적어도 피식 피식 정도로는 웃게 된다. <장수 고양이의 비밀>을 읽는 동안에도 여러 번 그렇게 피식 피식 웃었다. 


작가로서 이름도 어느 정도 알려지고 그럭저럭 고정 수입도 있을 때, 은행에 대출을 받으러 갔다가 은행 직원한테 퇴짜를 맞았다는 이야기부터 나를 웃겼다. 놀라서 "대체 왜 안 되는데요?"라고 물었더니 그 직원이 "그게 말이죠, 지난 번에 000(모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보는데 000(모 작가)가 나와서 '무라카미 하루키는 이제 틀렸다. 그놈은 앞으로 아무것도 못 쓸 거다."라고 했다는 것이다. 하루키가 '아무리 온화하기로서니(과연 그럴까)' 그 말을 듣고서는 하도 어이가 없어서 그 길로 당장 예금을 모조리 빼버리고 그뒤로 그 은행과는 일절 거래하지 않았다는 후일담까지 나를 시종 웃겼다 ㅋㅋㅋ


이름 때문에 생긴 에피소드도 웃겼다. '무라카미 하루키'란 이름은 필명이 아니라 본명이다. '무라카미'는 일본에서 아주 흔한 성씨 중 하나지만 '하루키'라는 이름은 하루키 연배의 남성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이름이 아닌데, 그러다보니 데뷔 후 여기저기서 '아무리 필명이지만 좀 과하지 않느냐'라는 말도 종종 들었던 모양이다. 필명을 쓰지 않아서 제일 곤란한 때는 뭐니뭐니해도 각종 공공장소에서 큰 소리로 이름을 불릴 때다. 이를테면 병원에서 "무라카미 씨이~ '무라카미 하루키' 씨이~'"라고 이름이 불리는 상황. 몇 년 전 여름, 저자는 피부과와 성병과를 겸하는 병원에 갔다가 이 때도 마찬가지로 "무라카미 씨이~ '무라카미 하루키' 씨이~'"라고 큰 소리로 이름이 불리는 바람에 크게 당황한 나머지 급기야 발이 걸려 넘어지기까지 했다고 한다 ㅋㅋㅋ


그렇다고 하루키의 글이 마냥 웃기기만 한 건 아니다. 이를테면 이 책에는 이런 글이 있다. 하루키는 열일곱 살까지 자신이 사는 곳 근처에 피차별 부락이란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러던 어느 날 누군가가 어떤 여자아이에 대해 뭔지 모를 말을 입에 올렸고, 하루키는 그게 옛 별명이라도 되는가 싶어 칠판에 적었다. 그러자 그 여자애가 울음을 터트리며 교실을 뛰쳐나갔고, 같은 반 여자애들 대다수가 하루키와 말을 섞지 않게 되었다. 이후 하루키는 피차별 부락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고, 그 여자애한테 잘못했다고 사과했다. 하루키는 그 여자애한테 공감해 자신과 말을 섞지 않았던 같은 반 여자애들을 생각하면 자신이 속한 단카이 세대가 아주 형편없지만은 않다는 생각이 든다는 말로 글을 마친다. 


이 글은 여러모로 놀라운데, 일단 이렇게 자신의 무지와 과오를 드러내는 글을 공개적으로 발표했다는 사실이 놀랍고, 양식 있는 일본인들도 웬만해선 입에 올리지 않는 부락민 문제를 거론했다는 사실이 놀랍다. 자신의 실수나 실패는 일절 인정하지 않고, 자신이 속한 조직이나 사회의 문제에는 전혀 무관심한 채로 오로지 돈을 벌고 명예를 얻기 위해 글을 쓰는 작가가 얼마나 많은가. 그런 작가들의 글을 읽을 때마다 웃기지도 않았던 걸 생각하면 하루키의 글은 아무 기탄 없이 시원하게 웃을 수 있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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