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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세상의 기쁜 말

[도서] 슬픈 세상의 기쁜 말

정혜윤 저

내용 평점 5점

구성 평점 5점


 

이야기는 힘이 세다. 우리는 학교에서 배운 수학 공식이나 영어 단어 같은 건 잊어버려도, 어릴 때 부모님이 들려준 옛날이야기나 친구가 말해준 비밀 이야기 같은 건 웬만해선 잊어버리지 않는다. 그러니 평소에 어떤 이야기를 듣고 읽고 말하는지가 중요하다. 그중에 가장 중요한 건 나 자신의 이야기이다. 내가 나를 어떤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말하는지가 그 사람의 인상을 만들고 인생을 결정한다.

 

정혜윤의 책 <슬픈 세상의 기쁜 말>은 가난, 질병, 사고, 재난 같은 슬픈 일을 겪은 후 인생의 이야기를 새롭게 쓴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라디오 PD인 저자는 다양한 상황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일이 많다. 하루는 남도의 외딴 항구에서 어부를 만나 인생 이야기를 듣기도 하고, 하루는 뒤늦게 글자를 깨친 할머니를 만나기도 하고, 하루는 시장에서 야채를 파는 아주머니에게 인생의 교훈을 배우기도 한다.  

 

저자가 만나는 사람들 중에는 돈이 많거나 유명한 사람이 거의 없다. 오히려 태어나서 부모의 얼굴을 한 번도 본 적이 없거나, 평생 가난에 시달리며 노동을 해왔거나, 뜻하지 않은 사고로 자식을 잃는 등 결코 유복하다고 하기 힘든 삶을 산 사람들이 더 많다. 대구 지하철 참사, 세월호 사고, 컬럼바인 총기사건, 9.11 테러 등으로 하루아침에 삶이 뒤집힌 사람들도 있다. 시간이 흐르면 사람들은 이들을 잊지만, 고통은 이들을 잊지 않고 계속해서 괴롭힌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의 삶을 불행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불행에 침잠하는 대신 불행으로부터 의미를 찾고 더는 불행하지 않으려고 애쓴다. 외로운 어부는 편지를 쓰고, 까막눈이었던 할머니는 글을 배운다. 야채 장수 아주머니는 일기를 쓰고 동화를 읽는다. 대구 지하철 참사로 딸을 잃은 엄마는 해바라기를 수놓으며 딸이 당한 일을 세상에 알린다. 이들은 입을 모아 말한다. "내가 겪은 슬픔을 당신은 겪지 않기를 바랍니다." 혐오와 복수가 환영받는 시대에, 참 귀한 마음이다.  

 

이들이 불행에도 불구하고 이야기를 했다는 사실이 아니라, 불행해서 이야기를 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들은 결코 불행과 그로 인한 슬픔이 자신의 삶을 대신 쓰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컬럼바인 총기사건의 가해자 딜런의 어머니 수 클리볼드는 자신의 아들이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상황에서도 이야기를 멈추지 않았다. 덕분에 우리는 알게 되었었다. "사랑만으론 부족합니다.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의 내면에서 벌어지는 일을."

 

이야기가 이토록 넘치는 시대에, 이 책에서 읽은 이야기들만큼 좋은 이야기를 찾기 힘들다는 것이 아이러니하다. 그만큼 좋은 이야기가 될 만한 삶을 사는 사람이 많지 않은 걸까. 아니면 그만큼 좋은 이야기를 알아보는 눈을 가진 사람이 많지 않은 걸까. 어느 쪽이든 나의 죄인 것 같아 마음이 괴롭다. 이 괴로움을 원동력 삼아 계속해서 이야기를 쓰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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