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꽃보다 청춘> 1화 재방송을 봤다. 안 그래도 <꽃보다 할배>, <꽃보다 누나> 시리즈를 재미있게 봤는데, 이번엔 유희열, 윤상, 이적 등 좋아하는 뮤지션들이 떼로 나온다고 해서 방송 전부터 어찌나 기대했던지. 뚜껑을 열어보니 역시나 재미있었다. 좋아하는 사람들이 한 화면에 나오는 것만으로도 팬에게는 즐거운 일인데, 전부터 친하기로 소문난 사람들이 처음으로 같이 여행을 하면서 부대끼는 모습을 보니 팬이 아닌 일개 시청자, 여행자로서 공감되었다. 없으면 불안했던 지갑 없이도 잘 지내고, 평소 입지 않는 스타일의 속옷에도 적응하는 내 모습을 발견하는 건 여행에서가 아니라면 하기 힘든 경험이다.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사람을 생전 처음 보는 사람처럼 느끼는 일은 또 어떤가. 당장은 불편하겠지만 그 사람을 더 깊게 이해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그래서 여행이 좋은 것이다. 평소라면 억만금을 들여도 알 수 없었을 것들을 알게 해주는 귀한 경험이 되기 때문에.
마스다 미리의 여행 에세이집 <잠깐 저기까지만>에도 그런 순간들을 잘 담고 있다. 저자가 2010년부터 2013년에 걸쳐 일본 국내를 비롯해 핀란드, 스웨덴 등 북유럽 국가들을 여행한 기록을 담은 이 책에는 여행지에서 있을 법한 사건들과 느낄 법한 단상들이 저자 특유의 필체로 소소하고 재미있게 그려져 있다. <꽃보다 청춘>과 다른 건 남자친구나 어머니, 친구 등 남과 함께 하는 여행이 아니라 혼자서 하는 여행에 대해서도 담고 있다는 점이다. 혼자서 하는 여행. 나는 아직 해본 적이 없지만 로망은 있다. 이따금 여행자의 기분으로 서울 곳곳을 누비기도 하지만, 저자처럼 국내의 다른 지역이나 외국을 혼자서 여행해 보지는 못했다. 남과 하는 여행이 타인의 다른 면을 발견할 수 있는 여행이라면, 혼자서 하는 여행은 자기 자신의 다른 면을 발견할 수 있는 여행이리라. 복잡한 도시에서 수많은 남들과 부대끼며 내 진짜 얼굴을 찾기가 힘들다는 생각이 들 때면 혼자서 훌쩍 여행을 떠나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저자가 자주 하듯, 나를 위한 선물로.
대체로 편안하고 유쾌하지만, 중간 중간 울컥하게 만드는 대목들이 있었다. 이를테면 2010년 당시 예순여덟 살이던 어머니와 단둘이 간 이시카와, 가나자와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열차 안에서 있었던 일. '엄마는 이웃 사람들에게 나눠줄 선물을 많이 사서 만족스러운 것 같았다. 그러다 문득 진지한 얼굴로, "이제 가나자와에 올 일도 없을지 모르겠네"하고 중얼거렸다. 무심결에 나온 말이어서 갑자기 울 뻔했다. 엄마는 올해 예순여덟 살이다. 그런 대사를 읊을 때가 되었다. 그럴 때 나는 내가 한참 어린아이처럼 느껴진다." (p.15) 아직 어머니와 단둘이 여행을 해본 적은 없지만, 언젠가 그런 기회가 생긴다면 돌아오는 길에 나도 저자와 같은 생각을 하고 울어버릴 지도 모르겠다. 넓은 우주에서 가족으로 만나 서로 닮은 얼굴을 하고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낸다는 것만으로도 기적인데, 같이 여행을 한다는 건 기적 중에서도 드문 일이다. 그러나 언젠가는 그것도 끝이 나겠지. 우리가 함께 했던 시간을 그 누가 기억할까. 가족 여행은 그래서 더 애틋한 것 같다. 물론 다른 여행들도.
또 하나, 정말 울어버릴 뻔 했던 대목. "나라 공원에는 수학여행 온 중학생들이 우르르 몰려온 데다, 먹이를 탐내는 사슴이 그들을 따라붙어서 왁자지껄 시끄러웠다. 멈춰서서 그 집단을 물끄러미 보았다. 그러다 발견했다. 혼자 있는 아이. 어느 그룹과도 섞이지 못했다. 사슴도, 나라공원도, 예쁜 노을도, 토산품 가게도, 그 아이에게는 상관없는 것들이 아닐까. 이 일정을 무난히 넘기는 것만이 전부일지도 모른다. 빨리 '어른'이라는 장소로 도망쳐 오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는 그에게, 그녀에게 빔을 보냈다. 어른이 되면 좀 자유롭단다. 혼자 여행을 떠나도 괜찮아." (p.186) 학창시절 나는 결코 수학여행이나 수련회 같은 학교 행사를 좋아하는 학생이 아니었다. 하루종일 정해진 일정에 맞춰서 생활하고 단체 행동을 한다는 게 얼마나 거북스럽던지. 반장이나 회장 같은 직책이 아니었다면 참가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어른의 여행은 참 좋다. 가고 싶은 곳에 가고, 보고 싶은 것을 볼 수 있다는 건 학창시절엔 누릴 수 없었던 사치다. 그런 사치를, 나는 일상의 무게에 눌려 실컷 누리고 있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언제라도 떠나고 싶게 만드는, 참으로 사랑스러운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