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을 대표하는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 하면 음식을 빼놓을 수 없다. 책장에 있는 그의 책 중에 아무거나 골라 아무 페이지를 펼쳐도 "나는 할 수 없이 냉장고에서 얼음을 꺼내 양주 올드 크로우 온더록스를 마셨다. 이미 해도 저물어가고 있어 위스키를 마셔도 좋을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아스파라거스 통조림을 따서 먹었다. 나는 하얀 아스파라거스를 매우 좋아한다. 아스파라거스를 다 먹고, 훈제 굴을 식빵에 끼워 먹었다. 그리고 두 잔째 위스키를 마셨다. (세상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1권 p.143)" 같은 군침 도는 문장이 나오니 말 다 했지 뭐.
하루키 문학 속 음식 이야기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하루키 레시피>를 읽어보는 것은 어떨까. 제목이 <하루키 레시피>라서 하루키의 작품 속에 나오는 음식을 독자가 직접 만들 수 있도록 레시피를 제공하는 요리책으로 오해하면 곤란하다. 저자 차유진은 1997년 대학교 4학년 때 PC통신 하루키 동호회 회원들로부터 <세상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에 나오는 '손녀딸'이라는 닉네임을 하사(?) 받은 이래로 오늘날까지 손녀딸이라는 이름으로 요리를 하고 요리에 대한 글을 쓰는 하루키 마니아. 이 책은 하루키의 작품과 작품 속에 나온 음식에 얽힌 저자의 추억과 감상을 하나하나 써내려간 위로의 에세이다.
저자와는 세대도, 경험도, 하루키 마니아로서의 이력도 다르지만, 같은 작가를 좋아하고 읽은 작품이 겹치다보니 공감가는 대목이 많았다. 이를테면 하루키의 단편집 <빵가게 재습격>에 수록된 <패밀리 어페어>에 나오는 크로켓에 대한 감상. 소설의 주인공인 오빠는 여동생이 약혼자에게 잘 보이기 위해 비시수아즈며 스테이크, 감자튀김 같은 고급 요리를 하는 모습이 영 불편하다. 보다 못해 오빠는 모름지기 남자라면 그런 고급 요리보다는 얇게 썬 양배추를 듬뿍 곁들인 크로켓과 바지락 된장국 같은 음식을 더 좋아하는 법이라며 여동생의 화를 돋운다. 하나뿐인 여동생에게 사랑하는 남자가 생긴 현실을 부정하고 싶은 마음을, 작가는 크로켓과 된장국이라는 소박하고도 맛깔나는 음식으로 담백하게 표현했다.
책에는 이밖에도 <노르웨이의 숲>,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양을 쫓는 모험> 등 하루키의 작품에 나오는 요리들과 그에 얽힌 이야기들이 다채롭게 실려 있다. 3부 '길 위의 만찬, 하루키의 여행법'에는 저자가 직접 하루키의 자취를 좇아 하루키가 경영한 재즈 다방 '피터캣'과 하루키가 데뷔작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의 원고를 보낸 진구마에 우체국, 하루키가 극찬한 크로켓을 파는 고베 토끼정 등에 가본 여행기가 실려 있으니 하루키 마니아라면 꼭 읽어보길 바란다. 하루키 이야기와 더불어, 십여 년 전 평범한 하루키 팬이었던 여대생이 음악 기자에서 요리사, 푸드 칼럼니스트, 작가로 변신하기까지 먹고 살고 사랑하며 성장해온 과정을 보는 재미도 쏠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