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의 일을 마무리하며 길을 걷다가 아무런 생각 없이 가을 하늘을 바라보았다. 노랗게 물들어 가는 은행잎을 바라보며 걸음을 멈추고 나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져 본다. 반세기가 넘어 가는 인생을 살다보니 나이 들어가는 모습이 어색하여 내 삶의 모습에 안주를 하지 못하고 가끔 거리를 헤매곤 한다. 푸른 은행잎을 청춘이라 생각하며 노랗게 물든 은행잎을 바라보고 있자니, 젊음은 기억 속에 묻어 두고 나이 들어 감을 익숙하게 생각하며 받아 들여야 하는 모습이 보인다. 그런 마음을 알았는지 1977년과 2017년을 견주며 이야기를 전개하는 『빛의 과거』를 만나게 되었다. 여고 시절의 추억을 헤매며 과거로의 여행을 떠나곤 했던 내게 시기적으로 안성맞춤의 책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빛의 과거』(문학과 지성사.2020)는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를 만난 뒤로 오랜만에 만나게 된 은희경 작가의 장편소설이다. 이야기는 40년 전, 대학을 입학하며 처음 접하게 되는 기숙사에서 만났던 친구와의 이야기로 시작이 된다. 새내기 대학생이 되면서 나 또한 기숙사 생활을 꿈꾸었었다. 그렇지만 동생을 데리고 자취를 할 수 밖에 없었기에 기숙사 생활을 할 수 없었다. 나는 할 수 없었지만 새로운 사람들과 시작되는 기숙사 생활에 많은 궁금증을 갖고 책 속의 친구들을 만나기 위하여 여행을 시작한다.
'親舊', 오래두고 가깝게 사귄 벗을 친구라 한다. 2017년 중년 여성 김유경, 오래되었지만 가깝다고 하기에는 조금 거리가 있는 김희진의 소설 『 지금은 없는 공주들을 위하여』를 읽으며 1977년 설렘이 가득했던 여대 기숙사에서의 생활을, 2017년 나이가 들어 과거형이 된 그 당시를 돌아보며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화자인 '나' 김유경은 국문과 1학년이다. 그녀의 기숙사 방은 322호, 낯선 상황에서는 말을 더듬는 약점을 갖고 있다. 학생운동에 관심이 많은 화학과 3학년 최성옥, 연애사업으로 바쁜 교육학과 2학년 양애란, 의사표현이 분명한 의류학과 1학년 오현수를 룸메이트로 만나게 된다. 유경으로서는 처음으로 인간의 '다름'을 만나게 된 것이다. 만일 내가 유경이라면 기숙사에서 어떻게 지내야 할까? 많은 생각을 하며 설렘에 잠 못 드는 밤이 며칠 계속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최성옥의 절친 으로 알게 된 산업미술과 3학년 송선미로 인하여 417호의 불문과 1학년 희진도 만나게 된다. 그렇게 시작된 그녀들의 기숙사 생활 모습을 보며 1977년 비슷한 시기였던 대학생활의 추억여행도 잠시 떠나본다. 그저 모든 것이 낯설기만 하고 처음으로 집을 떠나 생활을 했었기에 어렵기는 했지만 젊음이 무기가 되는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가고 싶은 마음도 살짝 든다. 다양한 캐릭터와 더불어 세상을 달리 바라보게 되는 70년대 대학 신입생의 이야기를 나의 대학생활과도 견주게 되어 흥미로웠다.
그녀들은 대학생활을 통해 '나'를 알아가고, 다른 사람들과 '다름'과 '섞임'의 의미를 느끼며 어른이 되어 간다. 이제는 기억이 가물가물한 첫사랑의 아픔도 겪어 낸다. 정말 다시 한 번쯤 느껴 보고 싶은 마음이다. 육십을 바라보는 아줌마로서는 느낄 수 없는 감정이었기에…….
2017년에 만나는 1977년 , 내 입장이 된다면 2020년 그리고 1982년 이 된다. 과거로의 소환은 그 시절을 떠올리게 한다. 첫 미팅의 기대감에 나갔다가 여고 시절에는 꿈도 꿀 수 없었던 만남을 갖고 설렘을 안고 돌아왔던 일, 첫 발령지에서 동기를 만나 행복하게 지냈던 일. 첫 사랑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만남을 갖고 있다가 이별을 당한 일을 비롯하여 많은 일이 생각난다.
그렇게 세월을 엮어 가며 만났던 '유경'의 인연들처럼 '나'를 알고 있는 인연들은 과연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해진다. 잠시나마 사랑의 감정을 느껴 연락을 하고 싶었지만 소심한 성격으로 몇 번 먼 발치에서 보고 마음을 접었던 약사, 30년 넘게 직장 생활을 하며 만났던 인연들, 40년이 넘게 만나고 있는 여고 동창 등, 서로가 '다름'을 안고서 만났던 인연이다. 그렇게 인간 본연의 존재들은 모두 '다름'을 안고 있다. 그래서 인연의 끈이 이어지거나 헤어지기도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지금도 나의 모습을 비추고 있는 '빛', 과거의 빛도 아름다웠지만, 지금을 비롯한 앞으로 내게 남겨진 시간의 빛, 또한 아름다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 빛을 생각하며 황금보다 더 소중한 지금의 '빛'에 충실하리라 다짐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