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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r. 버돗의 선물

[도서] Mr. 버돗의 선물

테드 겁 저/공경희 역

내용 평점 4점

구성 평점 3점

과거에 투영 된 삶 부시맨의 콜라병을 집어 들고 쳐다본 세상은 아름다웠다.

누구나 자신의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의 삶을 추적하고 알려고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들의 오래된 일기장이나 사진첩은 충분히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작가가 기자였기에 조금 더 체계적으로 망을 넓혀가고 관련 된 사람들을 찾아갈 수 있다는 장점이 있기도 하지만, 그래도 공통적으로 우리는 자신과 관련된 사람들의 이야기에 더욱 관심이 있다.

하지만 그의 기자라는 직업이 있었기에 그는 부시맨의 콜라병으로 쳐다보듯 샘스톤과 버돗을 찾아가는 방법을 사용했다. 객관적으로 순차적으로 단순히 가족의 인위적인 생각과 고려가 들어가지 않으려는 노력이 충분히 있었다.

시계의 태엽을 돌리듯 연관성을 찾아가고 있다. 어쩔수 없는 가난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되는 것이다. 대공항속에서 누구라는 예외는 없었다.

배고픈 사람들도 자존심은 있다는 것 말이다.

운이 좋아 아직 집을 갖고 있는 사람들도 침대를 비롯해 가구 전부를 팔고 맨 바닥에서 생활하거나 낡은 오랜지 나무 상자 위에 아무렇게나 걸터앉아 있곤 했다. 시골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Mr.버돗은 이 슬픈 상황을 모두 목격했다.

외할머니도 나처럼 잡동사니를 모아 두는 사람이었다. 나와 외할머니는 아무 것도 버리지 못한다고 가족들에게 항상 놀림을 받곤 했다.

자신의 처지에 대해 거침없이 말할 수 있는 그 담담함이 놀라웠고, 그들이 묘사한 우울한 상황이 무척이나 안쓰러웠다.
마치 내가 열쇠 구멍을 통해 이웃의 불행을 엿보기라도 한 듯 마음이 불편해졌다.

그가 항상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은, 그래야만 타인의 관심을 조종할 수 있고 그의 사적인 영역을 침범당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아침마다 영혼이 새로 태어나므로 나는 매일 밤 오늘의 기록을 묻는다. 오늘이나 어제의 실망이 내일의 가능성에 영향을 미치게 하지 않는다.

내게 공항이란 하나하나의 이미지의 연속 같은 것이었다.

내가 아는 대공항은 역사책의 한 단면이었고, 그저 연구와 영화의 좋은 재료였다. 하지만 여기에는 진정성이 빠져 있었다.

풍요로운 시대에 성장한 나는 제2의 대공항은 있을 리 없다고 믿었다. 공황은 소아마비처럼 과거지사였다. 나는 어리석게도 법규를 통해 위험을 피할 수 있는 시대에 산다고 믿었다.

신발이 필요합니다.

불과 60년전 공개된 6.25 사진들을 보면서 우리는 그것을 역사라고 한다. 역사는 나랑 상관 없는 것인가? 신발과 옷이 필요한 사람들의 이야기, 그것도 미국의 대공항때의 이야기, 이것은 이런 신발 저런 메이커 상품에 대한 선택에 관한 쉽게 쉽게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의 소재가 아닌 것은 분명한다.
 

편지는 내게 세상을 바라보는 넓은 시야를 제공했고 생활에서 느끼는 불편과 삶의 비참함의 차이를 비로소 깨닫게 했다. 소비를 억누르며 투덜거리는 소비자들의 불평과 밤마다 자식들을 굶겨야 하는 부모들의 통곡의 차이를 상기시켰다.

1년간 나는 두 가지 추적을 병행하고자 했다. 하나는 버돗에게 편지를 보낸 이들의 신분을 추적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내 외할아버지의 진짜 신분과 동기를 발견하는 것이였다.
사람들에게서 자신과 닮은 점을 발견해 낸 샘은 그들처럼 자신을 지키려 노력햇으며, 잃어버린 것을 되찾기 위해 애썻다.

버돗의 제안으로 그들은 이야기를 하게 된다. 그들 가슴속에 있는 가정사를 서슴없이 이야기 한다. 그것은 누군가 통화할 대상이 있어서, 한시간 두시간 하염없이 신세타령을 하면서 가슴속 웅어리를 없애는 것이기도 하다. 

그들이 빼앗긴 것은 돈이 아닌 자존심이었다.

시에서 가장 사랑받는 사업가 중 한 사람이던 몬노는 이제 가족을 먹여 살리려고 발버둥 치는 가장으로 세상에 내동댕이쳐졌다. 가진것은 자존심뿐이었지만, 신문에서 읽은 버돗이라는 사람의 제안에 그는 자존심마저 내려놓고 손을 뻗었다.

버돗의 선물은 소박했지만 거기 담긴 몸짓은 결코 작지 않았다.

칼린 가족 부모님은 예배에 참석하지 않았어요 아마 입고 갈 옷이 없어서 그러셨을 거예요. 하지만 나는 꼭 가게 하셨지요.

도나본 브라운과 아내 마벨 저희가 모두 돈을 받을 수는 없겠지만, 정직하게 말해서 가난은 창피한 일이 아닙니다.

모두가 힘든 시기였지만 사실 지금보다 더 나은 시절이기도 해요. 사람들이 지금보다 훨씬 더 친절했으니 더 좋은 때였지요.

힘든 시절이 오자 사람들은 실업자들에 대한 다른 시각을 갖게 되었다. 이는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 대한 사회의 태도에 변화의 바람을 일으켰고, 희생자들을 향하던 비난은 정부와 사회의 책임으로 돌려졌다.

그는 자신을 새로 만들어야 했다. 미국 태생이라는 주장만이 아니었다. B.버돗은 그가 타인들에게 준 선물이었지만 자신에게 준 선물이기도 했다. 그것을 통해 두 번째 기회를 얻고, 다른 사람으로 재탄생한 것이다.

내 인생의 전반부에서는 아버지 같은 어른이 될까봐 항상 두려웠어요. 하지만 후반부에서는 아버지처럼 될 수 없다는 걸 알았지요. 아버지의 진가를 파악하려면 그를 제대로 알아야 해요.

아버지가 직장을 다니든 실직했든 우린 행복했어요. 우리에게는 서로가 있었고 서로 사랑했으니까요. 우린 살아냈어요. 살아냈다고요.

저희 같은 사람이 도움을 구할 이유는 없지만 여기 어디서든 조사해 보면 이들 모두가 똑같은 사람임을 아시게 될 겁니다.

버돗과 샘스톤의 이야기, 그들은 시대를 잇는 견고한 다리였다.
구세계와 신세계를 잇는 다리
샘 스톤은 자신의 선물이 여러 사람의 인생에 여향을 주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죽었다.
그는 다리를 건너며 죽었고 그것은 어울리는 일이었다. 그의 가족에게 샘은 구세계와  신세계를 잇는 다리, 과거의 학살과 현재의 약속을 잇는 다리였으니까, 급히 초년의 삶에서 도망쳐 새로운 삶을 끌어안으면서, 그는 거짓말을 엮으면 안전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결국 그 거짓말들이 그를 영원한 위험에 빠뜨리기도 했다. 그날 차단기가 내려오는 것을 보고 공포에 질려, 기다리는 대신 돌파하기를 기대하며 가속 페달을 밟은 것은 얼마나 샘다운 행동인지. 우리 후손들은 앞으로 그 다리를 건널 때마다 샘을 떠올리고, 다리를 건너 우리 모두를 이곳에 있게 해 준 그분, 샘 스톤과 버돗에게 경의를 표할 것이다.

샘은 근본주의 유대교인으로 키워졌기에 티쿤 올룸과 체다카의 개념을 잘 알았다. 티군 올룸은 세상을 고친다라는 뜻의 히브리어이다. 체다카는 기본적인 정의의 개념이 깔린 히브리어지만 가난한 이들을 보살핀다는 뜻도 갖게 되었다.
루벤 키멜먼 교수는 체다카는 우리를 구원하지 못하지만 우리를 구할 가치가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준다고 말했다. 그것이 버돗의 선물이 가진 힘이었다.

샘은 딸들의 이름을 따서 B.버돗 이라는 가명으로 기부했다. 그의 어린 시설을 지배한 완고함과 구세계의 증오를 벗어난 세상에서 자녀들이 살기를 바라는 소망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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