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립 도서관에 가려면 10분 정도를 걸어가서 6.70여 칸의 가파른 계단을 밟아야 열람실에 도착한다.
대 여 섯권의 책을 대여해서 들고 내려오는 순간에도 나는 수행의 길이라 생각했다.
십 여 년 전 한 달 두 ,세번 의미 없이 왔다 갔다 한 기억이 난다.
그러다 어느 순간 발길을 끊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책에도 흥미를 잃을 때쯤 운동 삼아 올라간 도서관 정자에서 책 한 권을 주웠다.
누군가가 깜박하고 놔두고 간 모양이었다.
도서관 책은 분실 시 본인 배상을 해야 하기에 4층 열람실로 가져갔다.
자초지종 설명을 하고 돌아서는 순간 문득 그 책이 궁금했다.
책에 대한 기대와 발품으로 수많은 책 속에서 선택 되었지만 결국엔 내 손에 들어 온 그 벽돌 책이.
그날엔 밥도 먹지 않고 넘겨보던 책을 목이 뻐근해져서야 덮었던 시간이 새벽을 넘어섰다.
이언 매큐언의 "속죄"-atonement 이다.
상상력을 가진 믿음의 확신을 자부하는 건 나이의 선이 있을까?
내가 보는 일부가 사실 일수도 있겠지만 조금만 빗겨 보면 사실에 가려진 오해 일수도 있지 않을까?
그리고 내 믿음의 확신이 타인에게는 돌이킬 수 없는 운명으로 바뀌지 않을까?
13살 어린 소녀의 눈에 비친 단면이 상상력을 더해 큰 범죄가 되고 온전한 사랑이라는 꽃봉오리를 피우기도 전에 아름다울 두 연인은 오해와 편견 속에 짓밟혀 비극을 맞았다.
신분의 차이, 편견의 부조리,그리고 용기 없는 책임감에 대한 자기반성의 합리화는 아마 지금까지도 은연히 이어지고 있지 않나 생각해 본다.
나는 반전 있는 이야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화가 나면서 슬픈 반전은 오래도록 그 여운에 몸서리를 친다.
이언 매큐언의 이야기는 항상 극에 달하는 서사가 많은 것 같다.
그러면서도 눈에 보일 듯 세밀하고 적절한 비유의 문체, 흉내 내기 어려운 직유의 문장으로 장엄한 스토리를 긴장감 놓치지 않게 이어간다.
4번의 정독으로도 매번 다른 느낌 답할 수 없는 메시지를 묻곤 했다.
속죄!
브리오니는 자신의 잘못을 속죄하는 마음으로 참혹한 전쟁터의 간호사로 자원해 부상병들을 돌보며 훗날 이루지 못한 언니 부부의 행복한 결말을 소설로써 이어주었다.
13살의 나이는 전쟁터의 시체가 되기도 했고, 상상력을 가미한 한마디로 누군가의 삶도 좌지우지 할 수 있다.
그 책임은 시간이 훨씬 지나도 질 수가 없다.
죄책감은 세월이 흘러도 흐려지지 않지만 당사자는 없다.
누구를 위한 속죄인가.
누군가의 인생을 망친 자신의 잘못을 속죄라는 매개체로 표백할 수 없다.
소설은 팩트가 아니지만 어디엔가 있을 법한 누군가에게 일어날 법한 이야기라 더욱 여운이 많이 남는다.
그러면서 나는 스스로의 눈에 비친 믿음으로 남에게 상처 주지 않았을까.
어떤 거짓말로 타인의 삶을 달라지게 했을까 하고 기억을 더듬어 본다.
세상은 내가 보는 순간이 진실이 아닐 수 있다.
그러나 거짓일 수도 참일 수도 없다.
인생은 늘 반전 이란 게 존재 하니까.
인간은 완전하지 않다.
그로써 불완전한 나는 누군가에게 속죄하는 마음으로 수행을 위한 고행의 계단을 다시 밟으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