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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지 소녀

[도서] 거지 소녀

앨리스 먼로 저/민은영 역

내용 평점 5점

구성 평점 5점

 이 책의 서평 이벤트에 당첨되고서 바로 확인한 것은 목차였다. 책 제목의 유래가 '왕과 거지 소녀', 정확히 하자면 이 이야기에서 영감을 받아 그려진 '코페투아 왕과 거지 소녀'라는건 알았지만 그 제목이 책 제목으로만 쓰였는지, 단편집이 으레 그렇듯 한 챕터의 제목이 책 제목으로 쓰인 것인지에 따라 추측해볼 수 있는 내용이 크게 달라지기 때문이다. 본 결과 챕터의 제목 중 하나가 '거지 소녀'였고 나는 거지 소녀에 해당하는 인물이 해당 챕터에서만 주요 인물로 등장할 지, 기존의 인물 중 하나가 거지 소녀로 변천 할 것인지 흥미가 생겼다.


 책을 읽어본 결과 굳이 따지자면 결과는 후자였다. 말 그대로 인생을 거지인 소녀로 살아온 주인공, 로즈는 '거지 소녀' 챕터에서 왕의 역할을 맡은, 기업 집단의 후계자인 패트릭과 만난다. 각 주인공은 거지 소녀와 코페투아 왕의 역할에 걸맞는 사회적 신분을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서사는 아니었는데, 먼저 원본이 되는 '왕과 거지 소녀'의 서사는 수많은 이야기로 변주되어져 온 만큼 '그 결말이 하나가 아니다. 한국에 널리 퍼진 이야기는 왕이 그간 견지해오던 성군의 입장도 내버린 채, 왕이길 포기하고 거지 소녀와 결혼하는 결말이다. 왕이 신하들의 반대를 모두 물리치고 그녀와 결혼해 거지 소녀가 최하위 계층에서 단숨에 나라 안의 모든 여자들의 위에 서는 여왕이 되는 결말도 있다. 그러나 그 모든 결말이 공유하는 하나의 모티프는 거지 소녀에 대한 왕의 운명적 사랑이며 그 사랑이 실현된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거지 소녀'라는 제목은 역설적이다. 패트릭과 로즈 중 누구도 서로를 사랑하지 않았다. 패트릭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기사도에 대한 열망을 채울 수단을 원했고, 가난하지만 학식이 있고, 불행한 일을 당했으며 외모도 괜찮은 로즈는 딱 들어맞는 수단이었다. 로즈는 사랑에 대한 로망이 있었고 그 로망을 잃은 후론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대신해 줄 기둥을 원했으며, 패트릭은 처음에 로망을 채워주었고 이후엔 기둥이 되어주었다. 


 이러한 이야기의 제목으로 '거지 소녀'를 쓴 것은, 유럽에서 사랑 이야기의 대명사로 유명한 '왕과 거지 소녀'를 헛된 사랑이 파탄에 이르는 이야기의 제목으로 쓴 것은 냉소적인 느낌을 배가시키려는 작가의 의도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리고 이 책 내내 이런 냉소적인 분위기가 흐른다. 냉소에서 끝나는 것도 아니다. 동성애, 근친, 가정폭력, 강간, 불륜, 쓰리섬과 같은 자극적인 이야기가 당연한 듯이, 마치 철도 위를 달리는 기차의 모습을 서술하듯 덤덤하게 쓰여져 있어 로즈가 마주한 광기와 그 자신의 광기가 잔잔하면서도 분명하게 다가온다. 


 막심한 시간의 변화를 통해 각 이야기는 각 챕터에서 완결되지만 연결은 끊기지 않고 서로 상호작용한다. 또한 언뜻보면 지나치게 극단적이여서 현실에선 경험하기 힘들다고 착각할 법 하지만 각 이야기는 현실의 내가 언제든 마주하거나 직접 경험할 수도 있는 이야기들이며 이런 매력적인 이야기들이 로즈라는 한 개인으로 묶이게 되면서 확장된 의미를 가지게 된다. 하나의 장편을 읽듯 로즈라는 인물의 희노애락을 함께 느끼며 읽어나가도, 여러 단편을 읽듯 각 이야기 하나 하나에 집중해도, 재미있게, 자신만의 감상을 떠올리며 읽을 수 있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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