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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읽은 책

중국 군벌 전쟁

권성욱 저
미지북스 | 2020년 07월

 

우한은 한커우·한양·우창 등 인접한 3개 도시가 합쳐져 이루어진 도시로, 1927년에 이들 세 도시가 통합되면서 명명된 이름이라고 한다. 지금은 2019년 12월 코로나19 바이러스의 발생지로 알려지며 더 유명해져 버린 곳이지만, 이 도시는 청나라를 멸망시키고 중화민국(공화국)을 수립시키는 계기인 신해혁명의 도화선이 된 우창 봉기의 진원지이기도 해서 이미 오래전부터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도시이기도 하다.

 

1911년 10월 10일. 후베이성의 성도 우창에서 횃불이 타오른다. 그 부근에 주둔하고 있던 공병부대에서 점호를 위한 순시를 돌던 초관(소대장) 타오야오셩이 살기 어린 표정으로 소총에 총알을 장전하던 모습을 발견하고 호통을 치고, 그 병사 중 한명이 발란이면 어쩔 거냐고 따져 물으며 소대장의 머리를 내려치고, 머리를 부여잡고 도망가는 그를 향해(물론 빗나갔지만) 총을 쏜다. 이 것이 우창봉기의 신호탄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렇게 시작된 우창봉기는 애초에 치밀하게 계획된 것이 아닌 우발적으로 시작된 사건이라는 점이 특이하다. 소대장 저격 상황에서 보듯이 봉기에 가담한 이들 대부분이 병사였고, 외부 지원 또한 거의 없었다고 한다. 혁명파 지도자인 쑨원은 자금 구축을 위해 미국에 있었고, 중국동맹회 간부들도 반청혁명들 또한 혁명을을 주도하면서도 스스로 가능성 없다며 당시 놓인 자신들의 상황을 보며 비관하기 일수일 정도로 준비가 매우 어설펐다고 한다. 그럼에도 싱거우리 만큼 손쉽게 성공한 것은당시 현지 책임자였던 루이청과 장뱌오의 무능학 덕분이었다고 했다.

 

특히 루이청은 이 사태로 운 나쁘게 붙들린 병사 3명을 본보기로 참수 후 성문 앞에 내걸고 주변의 모든 성문을 폐쇄할 정도로 삼엄하게 경계를 하고, 혁명파의 회원 명부도 확보한다. 그러나 자칫 섣불리 움직였다가 그들을 자극하여 일이 커질까 겁을 내며 신속히 대책 마련 후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고, 그렇게 우물쭈물 하는 사이 혁명파 병사들이 움직여 우창봉기를 일으키게 되고, 자신의 보신에만 능했던 루이청은 부하들을 버리고 제일 먼저 도창을 친다. 이 상황을 두고 저자는 우창봉기의 성공이 그저 무능한 관료들 때문만은 아니라고 말한다. 이미 그 이전에 그러한 관료들에게 이골이나 청조를 등졌던 민심도 큰 이유로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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