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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의 재생산

[도서] 자본의 재생산

고병권 저

내용 평점 4점

구성 평점 4점

철학자 고병권과 함께 읽는 북클럽 자본 시리즈 열 번째 책 [자본의 재생산]은 마르크스 [자본] 1권의 마지막 편인 제7편 ‘자본의 축적과정’중 제21장 ‘단순재생산’과 제22장 ‘잉여가치의 자본으로의 전화’에 대한 읽기이다. 제7편은 제21장부터 제25장까지이다.

 

저자는 제7편에서 마르크스가 자본의 생산을 다루기는 하지만 그가 주목하는 것은 생산이 아니라 생산의 반복, 즉 축적과정이라고 말한다. 자본생산의 반복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생산물을 판매하여 화폐로 전환하고 그 화폐가 다시 생산에 투입되어야 하는데, 이러한 유통과정을 마르크스는 [자본] 2권에서 다룬다. 또 앞에서 살펴본 대로 잉여가치는 전적으로 자본가의 소유만은 아니다. 그런데도 이자, 지대, 상업이윤 등 여러 형태로 분배된다. 마르크스는 이를 [자본] 3권에서 분석하고 있다. 따라서 [자본] 1권에서는 유통과정과 잉여가치가 분배되는 형태에 대한 분석은 생략하고 단순화했다고 한다. 저자는 그렇게까지 하면서 마르크스가 1권에서 재생산을 다루는 이유는 재생산의 관점에서 자본의 생산을 보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그래야 생산과정만 분리해서 보았을 때 볼 수 없었던 것들, 즉 개별성이나 우연성에 가려 있던 자본주의적 생산의 정체와 한번만 보아서는 알 수 없었던 자본주의적 생산의 어떤 경향이 보이기 때문이다. 재생산의 관점에서 자본의 정체를 폭로하는 것이 이 책의 주제이고, 축적과 더불어 나타나는 자본의 기본 경향을 읽는 것이 시리즈 열한 번째 책인 다음 책의 주제라고 한다.

 

재생산의 조건은 생산의 조건들과 동일하다. 생산수단과 생산자인 인간의 충원이 되면 재생산은 끊임없이 이루어진다. 그리고 이것은 사회적 형태와도 상관이 없다. 자본의 입장에서 생산수단의 충전은 생산적 소비 형태를 띠는 생산재이고, 인간의 충원은 소비재이다. 마르크스는 이러한 재생산을 정식을 통해 자세하게 분석하지만 개별자본가의 입장에서 쉽게 말하면 잉여가치가 자본가 자신이 소비하는 돈보다 크거나 같아야 한다는 말이다. 같으면 단순재생산이고 크면 확대재생산이다. 만약 적다면 경제공황이다. 그리고 이것은 생산과 소비가 끊임없이 유통되어야 함을 전제로 한다. 따라서 생산과 유통은 일련의 유기체적 관계임에도 우리는 서로 독립적인 것으로 생각하여 자본의 본모습을 쉽게 알지 못하게 만드는 가상이 제거된다고 저자는 말한다. 또 노동자는 필요노동과 잉여노동을 통해 노동력의 대가와 잉여가치를 생산한다. 다시 말해 외견상으로는 자본가가 노동자에게 임금을 지급하지만 실제로는 노동자가 자신이 생산한 임금(노동력의 대가)을 자본가를 통해 받는다. 이는 노동력의 대가가 화폐로 전환되면서 일어나는 착각이며, 거기에 더하여 자본가는 이를 분배의 문제로 바꾸어버렸다고 한다. 이로써 임금의 지불자는 자본가라는 또 하나의 가상이 사라진다고 한다. 결국 마르크스가 이를 통해 주장하는 것은 초기자본은 자본가 자신의 것일지 몰라도 재생산이 이루어지면 그 자본은 잉여가치에서 나온 것이며, 노동력에 대한 등가교환은 단지 외관이자 형식이고 기본적으로는 착취라고 저자는 설명하고 있다.

 

자본가는 자본의 인격적 구현, 즉 인격화된 자본을 말한다. 사회적 총자본에도 그에 부합하는 인격으로써 총자본가가 있다. 총자본가란 개별적이고 특수한 자본가들을 하나로 합쳐 부르는 말로 자본가계급을 의미한다. 마르크스는 자본의 재생산이란 노동력의 재생산이자, 소외의 재생산, 가난의 재생산이며 계급관계도 생산하는 자본관계의 재생산이라고 말한다. 생산과정이란 자본가가 구매한 노동력의 소비과정으로 노동력은 자본가의 전유물이다. 따라서 노동력에 대한 전제적 지배는 노동자에 대한 전제적 지배가 될 수밖에 없으며, 이렇게 볼 때 자본의 재생산은 당연하게 노동력의 재생산이자 소외의 재생산이 된다. 또한 자본의 사회적 재생산을 계급의 관점에서 보면 가난은 자본가의 하수인이다. 가난은 노동력이라는 상품이 출현하는 역사적 조건이자 노동력의 지속적 공급을 보장하는 현실적 조건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자본의 재생산이 계급을 생산하는 과정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일반적으로 잉여가치는 계속해서 자본으로 변신하기 때문에 자본은 성장하고 축적된다. 자본 축적이 진행되면서 더 분명해지는 것은 노동하지 않는 인간이 소유자가 되고, 노동하는 인간은 무소유자가 된다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이를 두고 자본주의적 취득(소유화)방식이 본래의 상품생산 법칙들과 상충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것은 법칙의 위반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법칙의 적용에서 생겨난 것이라고 보았다. 처음 노동력을 구매하여 상품을 생산한다면 그 생산물은 자본가의 것이고, 생산물 속에 포함되어 있는 잉여가치도 자본가의 몫이라는 것이 자본주의적 생산법칙이기 때문이다. 이는 노동력의 상품화가 자본가의 잉여가치 취득을 정당화해주는 핵심기제임을 알려주고 있다. 그러나 당시 고전파 경제학자들은 노동가치설을 주장하며 모든 추가 자본은 모두 생산적 노동자가 소비하고 자본의 크기는 고정된 것이라 오도하며 자본가 계급의 이익을 위해 복무했다고 한다. 자본가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자신들의 이익을 옹호하기 위해 이들의 주장을 악용했다. 고정된 것이라는 자본의 크기를 자본 전체가 아니라 가변자본에만 적용한 것이다. 다시 말해 노동자에게 줄 수 있는 돈은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마르크스가 당시의 경제학자들을 비판한 내용을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자본이 고정된 크기가 아니듯 가변자본 역시 고정된 것은 아니다. 노동생산력의 증대로 잉여가치 생산이 늘어나면 노동자들은 투쟁을 통해서라도 잉여가치의 일부를 임금으로 요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야 노동자들이 사회전체의 생활수준 향상에 조금이나마 다가갈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도 우리 주변에서는 고전파 경제학자들의 주장을 심심찮게 들을 수 있다. 바로 총액임금제라는 말이 그것이다.

 

마르크스는 자본축적을 향한 자본가의 열망이 자본주의 사회의 사회적 메커니즘인 한에서 자본가의 실존은 자본주의와 더불어 이행적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다고 보았다. 다시 말해 자본가들은 자본축적을 위한 톱니바퀴이자 자본의 죽음, 곧 새로운 사회형태로의 이행을 돕는 톱니바퀴라는 것이다. 우리가 이러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이행적 성격을 띤다는 것을 제대로 이해하기위해서는 마르크스가 [자본]에서 주장하고 비판하는 내용이 무엇인지를 더 알아야하지 않을까 싶다. 자본축적과 더불어 나타나는 경향은 무엇일까? 다음 권으로 넘어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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